[연재] U-네트워크 사회 속 교회 공동체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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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네트워크 사회 속에서의 교회공동체와 그 역할

#4

 

 

 

안도헌 목사 (영남교회)

 

#1. 21세기 교회가 처한 현실 [바로가기]

#2. U-네트워크 사회 이해 [바로가기]

(1) Ubiquitous의 'U' - 새로운 권력, 편재하는 힘

(2) User의 'U' - 새로운 주체, 사용자

#3. U-네트워크 사회 속에서의 공동체 이해

(3-1)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의 견해에 대한 비판 [바로가기]

(3-2)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바로가기]

#4. U-네트워크 사회 속에서 교회의 현실 [현재글]

#5. U-네트워크 사회 속에서의 교회 네트워크 [바로가기]

#6. 결론 [바로가기]


4. U-네트워크 사회 속에서 교회의 현실


역사를 통해 교회가 세상 가운데 끼쳤던 것은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이 역사성을 띨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파급되고 보편화되기까지는 나름의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교리와 신념 체계가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과 인간으로 연결되는 망, 곧 네트워크였다. 하지만 과거의 네트워크는 지역적으로,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내용과 형식이 크게 변화하지 않고 되도록 원형을 유지한 채 보편화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도, 공간이 변해도, 교회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서서히 퍼져가는 네트워크 가운데 권력을 만났고 자본을 만났다. 그렇게 교회는 파놉티콘이 되어 갔다.

그런데 네트워크가 속도의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지역적, 시간적 제약을 초월하는 네트워크 현실, U-네트워크 현실이 교회 앞에 도래한 것이다. 사회 구조가 속도에 적응하도록 변화되고, 사람들의 의식 또한 그 구조에 맞춰져 갔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폭주하는 설국열차처럼 더 가파른 가속도를 내며 사회는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의 변화 속에서 교회는 현재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모진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성()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아니면 유연하게 파도를 타며 서핑을 즐기고 있을까? 아니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 놓여 있을까? 안타깝게도 현재 교회의 모습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교회가 보여 주고 있는 한 가지 대표적인 모습, 바로 서열화(hierarchy)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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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교회 내의 서열화

 

우선 교회의 구조적 현실을 들여다보면 첫 번째, 교회는 일종의 일반적인 사회가 갖고 있는 조직적 틀을 유지하면서 교회 내적으로 분명한 서열(hierarchy)’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직분은 더 이상 역할로써 기능하지 않고 있다. 직분 간의 서열뿐만 아니라 직분 안에서도 서열이 있다. 해당 직분을 받게 된 것이 얼마나 되었느냐에 따라 직분 내에서도 위, 아래가 형성된다. 마치 직장이나 군대에서 서열이나 계급을 따지는 것과 동일한 원리로 교회 안에 있는 직분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 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교회의 본질적 구조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적 구조이다. 초대교회 안에서도 수직적 구조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할에 따른 구조였지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수평적 구조이다. 이러한 전통은 분명 교회의 역사를 통해 교회 안에 의식화 되어왔고 대외적이든 대내적이든 교회는 이 본질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수직적 구조가 수평적 구조를 흡수해 버린 상황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 내 직분의 수평적 구조는 소위 대외명분이고 실질적으로는 수직적 구조로 굳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직분이 하나의 서열처럼 여겨지다 보니 교회 내 직분을 놓고 여러 갈등들이 발생하며 이것이 교회의 내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일부에서는 직분을 획득하기 위한 과열 현상들도 일어나고 그 과열 현상을 이용하여 잘못된 관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012J교회는 빚 청산을 위해 교회를 합병하면서 내적으로 심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임직 대상자들에게 신청서를 받으면서 그 곳에 헌금 약정란을 만들었다. 장로와 안수집사는 700~900만원, 권사는 300~500만원 선에서 선택해야 했다. 이러한 사태는 교회 안에 임직 포기자를 양산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신청서를 작성할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일부 교인들은 직분을 매점매석하는 기분이라는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직분의 서열화가 가져온 더 큰 비극은 역할에 따른 직분의 본질적 의미 가운데 이 역할마저도 서열화 되었다는 것이다. 직분이 서열화 되다 보니 그 직분자가 행사하는 역할 또한 서열화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 가장 낮은 서열에 존재하는 이들은 보통 주일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교사직은 그 서열에 준하여 평가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직분이 올라갈수록 -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 서열이 낮은 쪽에서 하던 역할은 자연스럽게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직분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환원되는 이야기이지만 그 역할도 서열화 되어 있어서 서열이 낮은 쪽에서 하던 역할을 하지 않음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되기 어렵다. 본래 역할이 서열화 되어서 직분이 서열화 된 것인지, 직분이 서열화 되어서 역할이 서열화 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직분의 서열화나 그에 따른 역할의 서열화는 본래 교회가 지향하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4-2. 교회 간의 서열화

 

두 번째, 교회 간의 서열도 중시한다는 것이다. 정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통례적으로 교회의 규모를 설명할 때, 대형과 중소형으로 나눈다. 또한 자립하지 못하는 경우는 미자립교회, 혹은 개척교회라고 표현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이라고 했을 때, 큰 몸, 중간 몸, 작은 몸 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규모는 교회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교회가 받은 사명에 따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분명이 다르다. 교회의 규모가 다양한 것은 그 역할의 차이이며 역할의 차이가 존재할 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은 하나의 유기체적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야구 경기에서 작지만 빠른 선수, 크고 힘 있는 선수, 적재적소에 기치를 발휘하는 선수, 잘 받쳐 주는 선수 등 다양한 선수들이 자신의 몸에 맞는 적절한 역할을 하면서 한 팀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교회도 그 크기에 맞는 역할로 신앙공동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열로 보는 것이다. , 대형이나 준대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교회는 높은 위치이며 소형이나 미자립교회 혹은 개척교회들은 낮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각자의 위치와 크기에 맞는 역할에 집중하기 보다는 규모를 키우기 위한 불필요한 경쟁을 일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역 사회 안에서 교회 간의 갈등 중 하나는 전도의 과열 현상이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곳 주변의 교회들은 경쟁하듯이 전도를 한다. 자교회의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타교회의 단점을 폭로하며 급기야 교회 간에 얼굴을 붉히는 낯부끄러운 일들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이는 교회의 규모에 대한 교회의 인식이 바르지 못한 것에서 비롯한다. 많은 교회들이 규모를 키우기 위해 미리교회 건물을 짓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것은 소위 믿음에 기초한다. 이 믿음은 지어 놓으면 성도가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의 딴이름 한소리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공허한 울림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첫 번째,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믿음은 성도가 늘어날 것이라는 문구를 신앙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그 외의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이것이 신화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금융 위기 사태를 불러 온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의 저반에는 집을 지으면 잘 팔릴 것이다라는 신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기대와 신화를 기초로 리스크가 높은 상품들이 우후죽순처럼 팔려 나갔고 그 신화가 이루어지길 바랬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신화였다. 신화는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변수에 노출되어 있고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신화가 깨지면서 초과 공급(excess supply)에 맞춘 가수요(imaginary demand)가 채워지지 못하게 되고 결국 금융 위기를 불러일으킨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미리 지어 놓으면(초과 공급) 성도들을 채워야 하고(가수요) 그렇지 못할 때, 위기는 찾아온다.

크기에 따른 교회 간의 서열화는 경쟁을 부추기고 각자의 몸집 불리기에 혈안이 되다 보면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것에는 소홀하게 된다. 큰 몸은 건강한 몸이고 작은 몸은 병든 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비만이 더 많은 합병증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무분별하게 커져버린, 혹은 커지기를 바라는 교회라는 몸에 더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4-3. 타종교와의 서열화

 

세 번째, 사회적 관계 속에서 교회와 타종교 간의 서열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등종교의 조건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역사성을 바탕으로 경전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교리와 그 교리를 따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을 때, 그 종교를 고등종교라고 부른다. 보통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 포함), 불교, 이슬람교를 세계의 3대 고등종교로 분류하는 이유는 위의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등종교라는 말 속에는 종교 간 서열, 곧 타종교에 대한 우월의식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믿는 종교를 고등종교로 정의할 때, 자연스럽게 어떠한 타인이 믿는 종교는 하등종교라는 것을 자동적으로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역사성도 없고 교리와 경전이 부재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도 소수일 경우 그것은 거의 미신(superstition)으로 취급한다.

사실 모든 종교에 동등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종교의 역사성은 무시할 수 없는 종교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긴 종교에는 그만한 이유, 곧 진리를 추구했거나 인간의 삶을 견인할 수 있었던 신비한 능력이 있었기에 소멸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역사성의 누적이 교리와 전통을 만들었고 세대를 거듭하여도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세계에 그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종교의 고등과 하등, 곧 종교의 서열을 말하지는 않는다. 종교 간에는 서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이 존재한다. 자신의 종교의 특수성이 특수성으로 인정 받을 수 있으려면 타종교와의 다름을 인정할 때에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모든 종교는 시공간적이고 문화적 토양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고등종교이든 하등종교이든, 정교이든 미신이든 관계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회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이신 성령을 믿는 기독교라는 종교적 공동체이다. 이것은 종교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포함하고 있는 신앙의 고백이다. 그런데 이것이 타종교와의 구별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타종교와의 서열을 가르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배타적인 진리 체계를 소유했다는 것이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진리의 배타성으로 인해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 우월감을 신앙으로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하다. 과거 교회의 선교적 경향이 공격적인 이유는 배타성에 의한 상대적 우월감 때문이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이 다른 종교를 비방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우월성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타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배타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논리를 수용한다고 해서 특수 논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님과 동일한 이치이다. 오히려 두 가지의 논리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더 나은 해결의 양상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과정을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타종교의 다양성과 구원의 배타성이 조우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며 그것이 종교적 다원주의로 전락하지 않고 교회의 본질을 세워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4-4. 결과적인 현실

 

최근 영국의 전 캔터베리 대주교인 캐리 경(Lord Carey)이 기독교는 영국에서 30년 후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가 젊은이들을 믿음으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특단의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30년 후에 기독교는 영국에서 사라지며 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성직자들이 점차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 가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가장 걱정스럽고,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할 대상은 젊은이들이라고 말하면서 젊은이들에 대한 사역을 하지 않는 영국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했다.

교회 내적으로 존재하는 서열화는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 정착하는 것에 걸림돌이 된다. 여러 차례에 걸친 U-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젊은 세대들은 권위를 권력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권위의 차원에서 부여된 역할이다. 하지만 그것이 서열을 이루면서 권위는 자동 권력으로 전환되었다. 특별히 강압적이고 고정적인 권력화를 거부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직분은 하나의 권력으로 이해되고 권력화를 거부하듯이 교회의 직분자들을 권력을 소유한 자들로 해석하여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이러한 서열화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견디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은 교회를 이탈하여 탈권위적이고 상호 소통적인 대안적 공동체를 찾거나 관심사가 유사한 이들과 자유로운 모임들을 만들어 그 곳을 통해 정신적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사실 권위와 권력은 다른 문제이다. 교회 안에는 반드시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권위는 겸손과 섬김을 통해 세워지는 권위이다. 예수의 권위가 2000년 이상이 흘러도 유효한 것은 그 분이 세우신 권위는 겸손과 섬김을 통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철저히 낮아지셨고 희생의 죽음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그 분의 삶으로부터 권위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지배와 억압을 통해 형성되는 힘이다. 권력은 분명한 주종 관계를 바탕으로 하며 위아래가 분명하다. 그리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가 구별되고 억압의 기제가 될 수 있는 것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이 지배와 억압의 조건이 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윤리적 지침이나 교리, 전통들이 권력의 수단이 될 때, 권위는 사라지고 오직 권력만이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 외적인 서열화는 교회 안에 잔존하고 있던 부정직과 부패를 가속화시켰다. 규모에 따른 서열화를 기초로 발생한 과다 경쟁은 감당할 수 없는 교회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경쟁에 승리한 교회는 더 많은 재정과 성도를 바탕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일부 지도자들의 물질적, 윤리적 타락이 가시화되고 그것이 SNS를 타고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교회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가 된 것이다. 반면에 신화에 의해 지어진 교회 건물들은 초과 공급에 따른 가수요의 지체 현상에 따라 경매와 매각 현장의 매물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는 매각된 교회의 주인이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 건물을 매각한 건물주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타종교와의 서열화, 즉 타종교에 대한 우월감은 교회를 배려가 부족한 집단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자선(charity)도 잘못하면 적선(積善) 정도로 여겨지는 세상이며 관용도 오만한 똘레랑스로 해석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타자에 대한 우월감은 관계성을 차단하는 주요인이 될 수 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악인까지도 신성한 근원어(-)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릴 때에는 홀연 그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는⁂*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종교에 대한 배려, 그리고 상호소통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자세 등은 교회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배타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교회는 이러한 관용의 자세를 잃고 네트워크에서 외롭게 소외된 섬처럼 여겨지며 사회에서 배제,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누가복음 21장에 예수는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화려하게 꾸민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너희 보는 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성전의 본질은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공간이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겉만 화려한 성전 안에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떠나신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닌 단순한 건물인 것이다. 그래서 그 건물은 무가치하기에 예수는 그 성전을 향하여 무너진다는 경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U-네트워크 사회가 가져온 여러 변화들이 교회의 현실을 세상 가운데 폭로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는 반증이 된다. 예수의 말씀대로 무너지는 성전이 되느냐, 아니면 희망으로 다시 세워지는 성전이 되느냐는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과제인 것이다


* 사실 직분을 신청한다는 개념이 비기독교적이다.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회의 사례는 직분에 대한 헌금 약정도 문제지만 직분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개념부터 잘못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 장로교 통합측 헌법에 의하면 교회는 당회가 있는 조직교회와 당회가 없는 미조직교회로 구분할 수 있다. 당회의 구성 조건은 시무하는 목사, 부목사, 장로 2인 이상으로 조직하되 세례 교인 30인 이상이 있어야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172, 186.)

 영국 대주교 기독교는 영국에서 30년 후에 사라질 것”, 뉴스앤넷, www.newsnnet.com, 2013.11.28.

⁂* Martin Buber, Ich und Du, 김천배 역, 나와 너,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20.

 누가복음 21장 6절


 

 

#1. 21세기 교회가 처한 현실 [바로가기]

#2. U-네트워크 사회 이해 [바로가기]

(1) Ubiquitous의 'U' - 새로운 권력, 편재하는 힘

(2) User의 'U' - 새로운 주체, 사용자

#3. U-네트워크 사회 속에서의 공동체 이해

(3-1)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의 견해에 대한 비판 [바로가기]

(3-2)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바로가기]

#4. U-네트워크 사회 속에서 교회의 현실 [현재글]

#5. U-네트워크 사회 속에서의 교회 네트워크 [바로가기]

#6. 결론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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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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