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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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과 인간

<베를린>(류승완, 액션, 드라마, 18, 2013)

 

<베를린>을 보는 나는 <쉬리>와 같이 분단국가가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의 단면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와 같이 이념보다는 순전히 나와 내 가족의 문제에서 비롯하는 비극의 이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한반도가 아닌 독일의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 다소 희망적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이미 분단의 벽을 넘어 통일을 이룬 나라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갈등과 반목은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동서독의 케이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혹시 없을까? 혹시 마지막 순간에 반전으로 서로의 벽이 무너지는 일을 다루지는 않을까?

순전히 영화를 보기 전에 가진 내 추측이었다. 영화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베를린이란 도시가 선택되었음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막다른 골목이라고 할까. 베를린은 다른 도시와 달리 남북이 비교적 자유롭게 오고가며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념의 분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곳, 그러나 상호에 대한 불신과 오해 그리고 반목은 여전히 앙금으로 남아 있는 도시다. 이곳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념적 정체성을 버리고 가는 것이어서 남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일 수 있지만, 북한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일 수밖에 없다. <베를린>은 막다른 골목으로 밀린 독일 주재 북한대사관의 직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일면을 보여준다. 국정원 직원이나 미국, 아랍 혹은 이스라엘 정보원의 등장은 단지 배경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되 북한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에 집중해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감독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는 이렇다. 중심 내용은 북한이 김정일에서 김정은 체제로 바뀌면서 일어날 수 있는 숙청과 관련해 있다. 즉 권력의 이동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던 한 북한 고위 관리는 새로운 체제의 신임을 얻기 위한 계략을 실행에 옮겼다. 주독 북한 대사는 이것을 모르고 비밀 무기 거래를 수행했지만, 실패한 후에 자기 측에서 공작이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망명을 계획하는데, 이것이 탄로가 나게 된다. 이 와중에 공작원 표종성(하정우 분)은 위험에 빠지게 되고, 이 모든 계략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아내마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역학관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해프닝으로 전개된다. 이야기의 추동력은 매우 강해 긴장의 끈을 놓기가 쉽지 않았고, 액션은 볼만 했으며, 배우의 연기 또한 흠잡을 데가 없다. 베를린을 조금 아는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이지만 다른 곳과는 다른 도시의 독특한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액션에 치중되어 있는 영화라도 남북 관계를 다룬 이상 성찰할 내용이 많을 것 같은데, 그것을 드러내고 있지 않아 재미는 있었다 해도 오랫동안 보고 음미할 영화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비록 새로운 발견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면서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한 인간이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당의 도구로 여겨지고 있고 또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만족하며 살고 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감독 역시 실제 간첩을 만나 확인한 사실이라고 하고, 영화에서 꽤나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들은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믿거나 의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부이기 이전에 당의 영웅임을 인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북한의 공작원들 사이에서 드러난 사실이라 해도, 사실 영화 속 우리 국정원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부하 직원이면서도 같은 동료인 직원이 업무 중에 다쳐 힐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어도, 이 사실보다 윗선의 계획과 지시가 이행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원 직원에게 문제는 조직이지 그 안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조직 내에서 인간은 하나의 도구요 소모품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격체로서 인정받고 인격적인 관계로 조직을 이끌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인권침해의 한 사례임에 분명하지만, 결코 그렇게 여겨지질 않는다. 이점에서 북한이나 남한이나 전혀 달라 보이질 않는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시국이나 대중문화와 관련된 교회의 일이 마치기까지 성도들은 하나의 도구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도구라는 의미가 부여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인지, 아니면 목회자 개인의 야심을 드러내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성도들의 입에서 아무런 의식도 없이 종북이니 사탄이니 하는 목회자로부터 학습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는 황망함을 금치 못한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성도들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사실 조직과 인간의 관계 문제는 영원한 숙제다. 조직이 살기 위해서 개인은 희생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인격은 어쩔 수 없이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개인을 살리기 위해 조직이 위험을 무릅쓴다면, 조직 내의 더 많은 인간이 희생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비록 비인격적인 경우가 생긴다 하더라도 묵인된다. 그러나 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인격과 인권의 문제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을 볼 때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민주주의 원칙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회의 과제는 다른 조직과 달리 건강한 인격체들의 교류를 통해 조직이 유지되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건강한 조직문화를 세우면서 또한 기독교 문화를 생산하는 일이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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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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