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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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의 마중물

<스토커>(박찬욱, 드라마, 스릴러, 청소년관람불가, 2013)


대중적이지 않아서 목회에 쉽게 활용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영상미학적으로 뛰어나거나 다양하게 음미할 만한 장면들이 곳곳에 포석해 있을 때, 특히 의미론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될 때다. 간단히 말해서 좋은 영화라고 생각될 때는 비록 대중적이지 않아도 소개하고 싶은 충동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니 감상이 쉽지 않아도 한 번 쯤은 주목해서 볼 일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받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 자본과 배우들을 중심으로 제작된 박찬욱 감독의 작품 <스토커>가 그 경우이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의 영화에서 복수 행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중심 주제로 다루었던 박찬욱 감독은 비록 복수는 아니라 해도 주제 의식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염두에 둔 질문을 영화를 통해 재구성해 본다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계기를 통해 발현될까?”일 것이다.

크게 보아 인간에게는 두 개의 본성이 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두 개의 가능성에서 인류 사회는 할 수만 있다면 인간에게서 선한 본성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종교는 물론이고 교육이나 사회의 각종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직접적으로는 선과 악의 구도이지만, 영과 육, 하늘과 땅,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속과 겉 등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은 선을 원하고 선한 본성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자주 좌절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내친 김에 본성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인간의 타고난 성품을 본성이라고 한다. 타고났다 함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교에서는 천성이라고 말하면서 단순히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는데, 기독교에서는 창조된 것이 타락했다고 믿으며 원죄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창조주의 은혜 아래 있음을 믿는다. 생명의 영으로서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인간에게는 악한 것만이 있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중적인 본성은 단지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적절한 계기가 주어지거나 기회가 되면 드러난다, 어려움일 수 있고, 부유함일 수 있고, 욕망일 수 있고, 주변 상황일 수도 있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간이해는 물론이고 교육철학이 달라진다. 예컨대 맹자는 인의예지를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면서 사단을 말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덕망 있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려야 세상이 밝아진다면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다. 그가 말하는 사단이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다. 맹자의 사단설은 인간 본성에 관한 성선설의 바탕을 이룬다. 앞서 말했듯이, 기독교는 천성을 말하진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형성되는 성품과 원죄의 결과로 생기는 성품을 말한다(5:16-26).

본성은 대개 성장과정에서 발현되는데, 숨겨진 것들이 일정한 계기를 통해 겉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대개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매개로 해서 발현되지만, 드러나지 않고 평생 숨겨져 있거나, 아니면 사회적으로 드러내놓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아는 상태로 머무는 경우도 있다. 사람마다 시기와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대개의 경우 사춘기 시절, 곧 관계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수많은 자극에 노출되는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동반하며 나타난다. 이 때 교육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개발하고 악한 본성은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사춘기 시기나 대개의 성장 과정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상반된 본성 가운데 선한 본성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다. 기독교는 내주하시는 성령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교육한다.

이쯤 해서 앞서 제기한 두 개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의 본성은 어떤 계기를 통해 발현될까? 그리고 인간은 선을 원하고 선한 본성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자주 좌절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뱀의 유혹이라는 모티브를 제시한다. 유혹을 받아 촉발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의 가치관과 기준에 따라 사용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보다는 그것을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능력으로 삼아 살려고 한다.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한 본성의 변화는 불가능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가려질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것을 일컫는다. 소극적인 방법이긴 해도 악한 본성이 촉발될 수 있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며, 가능하다면 비록 약하게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해서 사는 것이 악한 본성을 잠재우는 최선의 길이다. 섣불리 나서다가는 오히려 사로잡히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때 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시는 것으로 느끼셨던 것을 기억하라.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는 악이 존재하는 이유를 탐색하거나, 악의 현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드러나는 계기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철학적이면서도 종교적이다. 인간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매우 깊이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다소 비슷한 주제의식이라고 생각되는 영화를 생각해보자. <악마를 보았다>(김지운, 2010)는 인간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영화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방식이나 쫓기는 과정에서 보이는 극악무도한 태도는 결코 인간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은 유형의 인간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한 시민이 그에게 희생당한 자신의 아내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잔혹하게 복수하면서 스스로 동일한 사람으로 전락해가는 모습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먹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다. 어쩌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은 어떤 계기에서 촉발되는 것일까?

<스토커>는 스토킹을 하는 사람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영어의 철자를 보면 그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아마도 동음이의적인 말을 통해 영화를 대하는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생각한다. 감독은 영상미학적으로 깊이 고려된 미장센들을 통해 마치 한 편의 동화 같은 구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영화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많아서 독자들의 영화 이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를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양해하기 바란다.

세 명의 남자 형제를 가진 스토커 가족의 행복은 첫째인 리차드가 막내를 편애하는 것을 시기한 둘째 찰리가 막내를 모래밭에 생매장함으로써 비극으로 치닫는다. 정신병원에 보내지고 가족과 떨어져서 그곳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찰리는 그럼에도 가정부를 통해 집안 소식을 빠짐없이 전해 듣는다. 형에게서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찰리는 조카인 인디아에게 끔찍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인다. 해마다 신발을 선물하기도 했지만 인디아는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삼촌의 존재를 숨겨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18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날 인디아는 평소에 받던 신발이 아닌 열쇠를 선물로 받는데, 그날에 아버지는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삼촌이 등장한다. 사업차 중동에 혹은 유럽에 머물렀다는 말을 듣지만 사실이 아니다. 장례식을 마친 후 함께 머무는 기간에 인디아의 주변에 연거푸 이상한 일들이 생기면서 분위기는 급격하게 스릴러로 전환한다. 남편과 많이 닮은 모습에 끌린 엄마는 삼촌과 애정관계를 갖게 되고, 가정부가 사라진 후에 시신은 냉동고에서 발견된다. 장례식이 지난 후에 찾아와 죽은 아버지와 삼촌 사이의 비밀을 전하려던 고모 할머니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는데, 그녀가 가르쳐준 번호로 전화를 건 인디아는 마당의 땅 속에서 핸드폰 벨소리를 듣게 되고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자는 삼촌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 모든 것이 삼촌이 저지른 일임을 알게 되면서 극도로 긴장하지만, 인디아와 삼촌이 함께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암시하고 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아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삼촌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인디아는 아빠의 서재를 정리하다 삼촌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열쇠의 도움으로 숨겨진 편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모두가 자신에게 보낸 삼촌의 편지였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보낸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삼촌은 정신병원에 머물면서 인디아가 18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인디아는 아버지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자신의 사악한 본성을 삼촌의 자극을 받아 발견하게 되고 결국 해방된 모습으로 세상으로 나선다. 마지막 노래 가사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제시해보이고 있진 않아도 리차드는 딸이 찰리를 많이 닮았음을 직감했던 것 같다. 딸의 악한 본성을 감추고 선한 본성을 길러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찰리의 영향을 막기 위해 아버지는 편지를 인디아에게 전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사냥을 가르쳤다. 엄마는 딸과 남편이 먼 데까지 가서 새를 잡고 그것을 박제로 만들어 오는 일을 끔찍하게 여겼지만, 이는 비교적 작은 악을 통해 더 큰 악을 막고자 했던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디아의 악한 본성을 억누르기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다. 아버지의 계획은 인디아가 18세 되던 해에 집으로 오려고 했던 삼촌을 저지하려다 살해당하고, 결국 인디아는 삼촌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영화의 내용이나 마지막 장면에서 필자는 <완득이>(이한, 2011)의 내용과 마지막 장면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던 완득은 어쩌면 악한 본성이 드러날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담임 선생님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찾아 나설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밝은 세계를 향해 나서는 완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인디아의 장면과 이상할 정도로 대조적이다.

<스토커>는 인간 본성이 발현하기 위한 마중물이 있음을 주장한다. 나는 내 스스로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것들이 함께 작용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인디아의 독백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마중물은 지하수 상태에 있는 물을 펌프질로 끌어올리기 위해 붓는 물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삼촌은 악한 본성의 마중물이며, 아버지는 선한 본성의 마중물이다. 사실 찰리의 본성을 이끌어낸 마중물은 리차드의 편애였다. 그렇다면 복수극의 단면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언제나 동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도 인간 본성의 마중물을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사실 인간의 본성은 잠재해 있다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촉발될 때 발현되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선한 본성을 계발하기 위해서 용서와 수용과 관용 그리고 공평한 사랑 등이 갖는 의미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이중적이다. 선한 면이 있는가 하면 악한 면도 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말한다 해도 타락 이후에 주어진 은혜, 곧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선한 본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능력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것을 성령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고백한다. 이것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회심의 가능성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악한 본성이라도 성령의 은혜로 주어진 우리 안에 숨겨진 선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중적인 본성은 인간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자극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선한 본성이 길러지기도 하고 악한 본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은 숙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관계에서 종종 듣는 말 가운데,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너를 만나고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한편으로는 무책임하게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지만, 내 안의 악한 본성이나 선한 본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 가운데 인간학적인 맥락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함으로써 은혜로 주어진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려는 데에 있다.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을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은 우리 주위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수고하고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사회제도를 통해 인간을 바르게 이끌어간다 해도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여지없이 발현되는 까닭은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우는 사자와 같은 사악한 마중물이 사회도처에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철저한 훈련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선한 본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들은 계속 좌절하는가? 사탄의 영향력으로 말하기 전에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마중물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선생이라면 학생들에게, 목사와 장로라면 교인들에게 마중물이다. 왜 우리 사회는 선한 본성으로 가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이 지배하는 인상을 일으키는 것일까? 누구를 탓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와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중물로 살았는지를 반성해보아야 할 일이다.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고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살지 않기를 그렇게 강조하며 말했던 까닭은 바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본성을 이끄는 마중물에 대해서도 주의하며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마중물이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 일이다. 복음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 방향에서 유효하게 작용한다. 우리가 비록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철학이나 이념을 전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은 나의 선한 본성을 이끌어주며, 또한 나를 죽임으로써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는 존재가 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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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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