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토토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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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빛과 소금일까?

<토토의 모험>(이정익/정신규, 애니메이션, 2012)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또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해야 할 점은 지금은 아니지만 장차 빛과 소금이 “되라”가 아니라 지금 빛과 소금“이다”라고 선언하신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섬기는 사람들은 믿음과 함께 이미 빛이며 소금인 것이다. 제자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믿는 자가 소금과 빛으로 변화 된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 말이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빛으로서 혹은 소금으로서 살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예수님의 선언은 창조의 원리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행해야 할 일들을 명령하신 것 같이,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 소금으로서 빛으로서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빛과 소금은 가능성으로 주어진 복이며 은혜다.

바로 이런 사실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 현실적으로 빛이며 소금인 것인가? 빛으로서 소금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빛과 소금으로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는 믿는 자에게 복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어떤 존재임을 깨닫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드러나도록 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서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는 때는 분명한 정체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나타내며, 또한 사람들이 우리들의 행실을 보고 우리가 믿는 주님을 참 하나님이요 구주로 인정하게 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고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이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실을 가리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설명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이것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는 일이며, 우리 신앙 전통에서 가장 우선되는 일이다.

<토토의 모험>은 바로 이런 주제의식을 갖고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총회와 문화선교연구원, 그리고 소망교회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2012년 기독교교육용 단편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개구쟁이 토토는 언제나 약자인 고양이를 괴롭히는 재미로 살아간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고양이를 쫓다가 교회 창가에서 떨어져 스스로 고양이가 된다. 심지어는 엄마조차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처지가 된 토토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런 와중에 토토는 같은 고양이들에게 도움과 친절을 받게 된다. 비가 많이 와서 냇물에 휩쓸린 토토는 고양이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친구 고양이들을 위협하는 동물들과 싸워 친구들을 구해내기도 한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친구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했을 때, 곧 친구들을 돕는 일을 실천하는 순간에 토토는 자신에게 위대한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것을 발휘하여 친구들을 위기로부터 구해낸다. 그럼으로써 토토는 빛이며 소금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저예산 영화로서 제작된 것이라 상업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에서와 같은 수준 높은 스토리텔링이나 세련된 영상미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반응이 기대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화의 장면 가운데 고양이의 행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고양이는 어두운 곳을 잘 보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토토가 동굴에서 빛으로서 그들을 인도한다는 설정은 고양이에게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토토를 돕는 고양이들의 선한 행위에 대해선 철저히 침묵하다가 갑자기 토토가 행한 한 번의 선행으로 토토의 빛 됨에 집중하는 것은 너무 억지스럽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아이들의 의미 파악을 돕기 위해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질문을 만들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토토는 몇 번 그리고 어떻게 변화하는가?

토토 스스로는 결코 빛으로서 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 다시 말해서, 토토가 스스로를 빛으로서 나타나게 된 때는 언제인가?

우리는 빛이요 소금이다. 토토의 경우에 비추어서 언제 그렇게 되는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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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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