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 신부의 편지>



반응형

진실한 기도와 응답의 힘

<야곱 신부의 편지>(클라우스 해로, 드라마, 12세, 2009)




원제는 “야곱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로 핀란드 영화다. 2009년 작품이지만 2011년 제9회 서울기독교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고, 일반 영화관에서는 2012년에 개봉되었다.

시각 장애인인 야곱 신부가 할 일은 오직 자신에게 온 편지를 읽고 또 답장을 써주는 것이다. 그것이 은퇴한 신부의 목회사역이라 할 만한 유일한 일이었다. 물론 스스로 할 수 없으니 남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영화는 당연히 그를 돕는 자를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다. 레일라, 그녀는 형부를 살인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으나 특별 사면을 받고 신부의 일을 돕게 된다. 출소한 그녀의 선택은 시각장애인인 신부를 돕는다는 사명에 있지 않았고,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내린 것이었다. 그녀는 갈 곳이 없었다. 아니 유일한 혈육인 언니가 있었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언니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듯 했다.

야곱 신부에게 배달되는 편지는 일상의 모든 일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 참 다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일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꾸준히 보내지만, 어떤 사람들은 몇 번의 시도로 끝내고, 단 한 번으로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가 누구든, 또 어떤 내용이든 야곱 신부는 레일라를 통해 들은 기도 요청에 대해 진지하게 기도하고 또 적당한 성경구절을 찾아 정성스럽게 답장을 한다. 물론 레일라는 이런 일들을 하찮게 여겼는데, 배달되는 편지의 일부를 우물 속에다 내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편지는 더 이상 배달되지 않았다. 고대하는 편지가 더 이상 오지 않는 것에 크게 실망한 야곱 신부는 편지를 받고 기도하는 일을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역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신 것임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서 편지가 없어진다는 것은 세상과 이별할 때가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신부의 속내를 읽은 레일라는 우편배달부와 모의하여 가짜 편지를 배달하고 또 가짜 편지를 읽는 시늉을 내면서 신부에게 희망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이 여겨지는 순간에 레일라는 마음 속 깊이 묻혀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낭독한다. 비록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진실이 담긴 이야기였다. 엄마의 폭력으로부터 매번 자신을 보호해주던 언니가 형부에 의해 폭력을 당한 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 곁을 떠나지 못한 언니를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일, 그리고 마침내 언니에 대한 형부의 계속되는 폭력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레일라가 형부를 죽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레일라는 야곱 신부에게 언니로부터 용서가 가능하겠는지 묻는 질문을 던진다.

야곱 신부는 그 이야기가 레일라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 이미 언니로부터 계속된 편지를 받았었고, 언니의 간청에 의해 레일라의 특별사면을 요청했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신부에게 보냈던 수십통의 편지를 넘겨받고 읽으면서 레일라는 자신이 이미 언니로부터 용서받았음을 알고는 흐느낀다.

<야곱 신부의 편지>는 등장인물도 적고 또 짧은 상연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었고, 할 말 역시 다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연출된 영화다.

영화는 비록 사제관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곧 눈 먼 신부와 살인자 레일라 사이에서 긴장감 속에서 벌어지는 소박한 일상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신앙인으로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도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읽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비록 개신교와는 다른 정서와 체계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지만, 야곱 신부에게 보내지는 편지는 그의 기도를 요청하고 기대한다는 점에서 기도의 실천과 맥을 같이 한다. 단 한 번의 기도로 끝내는 일도 있는가 하면, 몇 번에 걸쳐 기도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 일도 있다. 얼마나 자주 기도하든 또한 비록 응답이 바로 오지 않는다 해도,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또한 사무엘도 백성들 앞에서 고백하듯이 말했듯이, 교역자로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궁금한 점은, 왜 야곱 신부는 처음부터 언니의 간청과 동생에 대한 용서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영화를 본 관객은 분명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영화에 제한해서만 본다면 그리고 레일라의 변화에 비추어서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백 혹은 기도의 진정성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응답의 힘은 진실한 기도에 있다는 사실!

반응형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