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



반응형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희망

<프로메테우스>(리들리 스콧 감독, SF, 청소년관람불가, 2012)





불후의 SF 명작 <블레이드 러너>와 <에이리언>에 이어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화제작 <프로메테우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회자하고 있듯이 단순히 <에이리언>의 프리퀄이라고 볼 수 없는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예컨대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블레이드 러너>를 연상하게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이해에 따르면, 제목 자체가 암시하고 있듯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을 영화적으로 성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영화는 전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SF 상상력을 통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각색하였고, 이를 통해 인류의 현재와 미래와 관련해 경고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영화가 추구하는 중심 화두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인류의 기원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의 멸망이다. 아마도 2012년 지구 종말론이 떠도는 현실에서 인류의 멸망 자체에 대해 회의를 품은 스콧 감독이 시대의 고민을 공감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비판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정은 이렇다. 인류의 운명은 지구의 운명과 함께하기에, 지구 종말론은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 만일 진화론에 근거한다면, 인류의 운명에 대한 질문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멸망하게 되는 요인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기원과 관련해서 창조론 혹은 지적 설계론 같이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생각할 경우엔 사정이 달라진다. 멸망을 생각할 때마다 창조의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멸망할 운명이라면 도대체 왜 만든 것일까? 창조의 이유에 멸망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멸망을 초래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창조주 혹은 지적 설계자의 의지와 계획에 달려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류 자신이 스스로 초래하는 것일까?

이것은 리들리 스콧 감독이 <프로메테우스>를 구상하면서 가졌을 것 같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바로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탐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 혹은 지적 설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외계인’, ‘엔지니어’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영화의 이야기는 성경적인 창조론보다는 지적 설계론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듯이 보인다. 사실 영화의 내용 가운데 엔지니어로 여겨지는 세 명의 존재는 우주를 만드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홀로그램으로 볼 수 있었던 장면에서 한 명이 피리를 불자 우주가 생성되었는데, 나머지 두 명은 협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의 하나님을 염두에 둔 것일까?

다른 한 편으로 엔지니어들은 지구로 운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살상무기를 준비해놓았다.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류에게 어떤 하자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엔지니어들을 분노하게 하는 어떤 행동을 했던 것일까?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영화의 스토리는 전개된다.

영화는 인류의 기원을 화두로 삼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며 형식적인 구조일 뿐이다. 왜냐하면 엔지니어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간이 그들로부터 유래되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의외로 너무 쉽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모두는 사망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본질적인 질문이라면 이렇게 빠른 대답을 얻도록 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럼으로써 앞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길이 막히게 된다. 쇼 박사는 그들이 비록 인류의 기원인 엔지니어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하나의 피조물로서 최초의 창조자로서 스스로는 창조되지 않은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녀의 확신은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또 다른 화두이지 핵심은 인류의 멸망과 관련된 문제의식과 메시지다. 즉, 엔지니어들은 죽기 전에 인류를 살상할 무기를 제작하고, 그것을 가지고 지구로 향하려고 계획을 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인류를 멸망할 계획을 가진 것일까? 이것은 영화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질문이었고, 또한 대답을 얻을 만한 단서들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스콧 감독은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지구촌 곳곳에서 회자하고 있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고, 자기 나름대로 그 원인을 숙고하는 가운데,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성찰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멸망 보고서’와 ‘희망의 이유에 대한 보고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스콧 감독은 하필 왜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차용해서 새로운 서사를 구성한 것일까?

영화가 프로메테우스 전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이해하기에 앞서 먼저 전설에 대해 일별해볼 필요가 있다. B.C. 700년경에 활동한 시인 헤시오도스는 프로메테우스와 관련해서 2가지 전설을 전해준다. 겹치는 내용이 있지만 상이한 부분은 제우스의 분노를 산 프로메테우스가 영원히 독수리에 의해 간이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벌이 내려진다는 내용이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관심은 후자에 기울어져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 출신의 최고의 책략가이며, 그의 이름의 뜻이 암시하고 있듯이(“미리 생각하는 자”), 대단히 지적인 존재이다. 그는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어 그들에게 갖가지 능력과 이성을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스승이었다. 신들은 프로메테우스가 만든 인간들을 주목했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숭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인간에게 호의를 가진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대신해서 꾀를 내어 황소를 잡고 둘로 나누었는데, 큰 부분은 뼈와 내장으로 된 것이고, 작은 부분은 고기로 된 것이었다. 그는 양쪽 모두를 황소 가죽으로 덮어서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했고 양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모든 계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부분을 선택했는데, 이는 인간들의 멸망을 계산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계략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제우스는 분노하였고 형벌로서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았다. 그러자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부터 불을 훔쳐 지구로 가져왔고, 그 덕분에 인간은 다시금 불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는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는 일을 포기하고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복수를 계획하였다. 아들 헤파이스토스로 하여금 환영을 만들도록 했는데, 그 환영에 꽃으로 된 옷을 입히고, 그 입에는 화려한 화술을 주고, 그리고 매력을 갖추도록 했다. 그녀가 판도라이다. 제우스는 신들의 각종 선물이 들어 있는 상자를 판도라에게 주었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형제인 에피메테우스(“나중에 생각하는 자”란 뜻으로 항상 앞서 나가는 프로메테우스를 견제한다)에게 선물로 준다.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맞아들인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자마자 모든 불운하고 사악한 일들이 상자 밖으로 나왔다. 급히 상자를 닫았지만 오직 희망만 남은 채 모든 것이 빠져나온 뒤였다. 이 후로 인간들의 세계에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제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영화의 첫 장면은-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한 이론체계인 지적 설계론에 따르면-소위 ‘엔지니어’로 여겨지는 한 인물이 거대한 원반형의 비행물체가 떠도는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먹는다. 그 후에 산화되어 죽은 그의 시신은 폭포로 떨어지는데, 물속에서 그의 DNA와 동일한 DNA를 가진 존재가 형성된다. 이것이 인간이다. 엔지니어의 죽음은 인간의 탄생을 위한 희생으로 여겨진다. 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지구 위의 고대인(아마도 죽기 전에 엔지니어가 남겨 놓은 것이 아닐까)은 지구의 멸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예고의 표시로 동일한 형태의 동굴벽화를 통해 어떤 행성을 지시하는데, 쇼(누미 라파스 분)와 찰리(로갠 마샬-그린 분)는 이것을 인류의 외계인 기원설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로 믿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보내는 하나의 초대장으로 여긴다. 인류기원의 비밀을 풀기위한 확실한 단서를 찾는 그들의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동조한 웨이랜드(가이 피어스 분)는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프로메테우스 호’에 관련된 분야의 학자들을 태우고 벽화가 지시할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행성으로 가는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탐사 계획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비커스(샤를리스 테론 분)다. 웨이랜드의 딸인 그녀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다소 부정적인 성격을 가졌다. 로봇으로 오해될 정도로 냉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아마도 에피메테우스에 해당되는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가 프로메테우스 호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는 휴머노이드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 분)이다. 데이빗은 그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 비커스는 노파심에서 탐사팀에게 탐사 중에 발견한 것들에 대해서 결코 손대지 말고 보고만 할 것을 경고한다. 행성에 도착한 탐사팀은 인공 구조물을 발견하는데, 그 안은 지구 환경과 유사하였다. 그곳에서 탐사팀은 데이빗의 도움으로 엔지니어의 시체들을 발견한다. 시체의 형태를 보니 무엇인가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죽은 것 같다. 쇼 박사는 그 가운데 머리 부분을 가지고 와서 분석하는 중에 놀랍게도 엔지니어가 인간과 동일한 DNA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쇼 박사는 인류 기원이 외계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가설이 확인되었다며 기뻐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일한 DNA를 가진 엔지니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그들은 왜 집단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최초의 창조를 믿고 있던 쇼 박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갖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존재는 데이빗이다. 인간은 휴머노이드를 필요에 따라 만들었지만, 정작 그는 인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고, 심지어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고 말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케 한다. 데이빗은 로봇이면서도 인간과 동일한 행동 패턴을 하려고 하는데, 탐사팀의 일원인 찰리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아냥거린다. 데이빗은 그런 찰리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것일까? 행성에서 발견한 유기물을 그의 술잔에 타서 마시게 해서 미확인 유기물에 감염시킨다. 데이빗은 대체로 명령에 따라 행동했지만 동굴에서는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그 이유는 탐사 목적 이외에 오너인 웨이랜드가 원하는 숨겨진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사람들의 과거를 읽고 그것을 홀로그램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능력으로 그는 과거 동굴 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재현함으로써 숨진 엔지니어들의 행적을 찾아내고 또 사람으로서는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은폐된 장소를 발견하였으며 또한 도저히 열지 못했을 동굴의 문을 연다. 게다가 비커스가 아무것도 손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물체에 손을 대어 그것이 변형될 조건을 충족시킨다. 그것은 에이리언으로 변형될 수 있는 유기물이었다.

미확인 유기물이 담긴 술을 마신 뒤 찰리는 쇼 박사와 성관계를 갖는데, 찰리를 매개로 해서 쇼 박사의 태중에는 에이리언이 자라게 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된 찰리는 다른 팀원들에게 감염되지 않도록 스스로 희생의 길을 택한다. 쇼 박사의 태중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에이리언을 확인한 데이빗은 그녀를 수면상태로 만들어서 지구로 귀환시키고자 하는데, 쇼 박사는 이것을 거부하고 자동의료기계를 통해서 스스로 제왕절개를 해서 에이리언을 분리해낸다.

자세한 설명이 없어 추측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아마도 에이리언은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한 무기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스스로는 활성화 능력이나 재생산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오직 일정한 환경이 갖추어질 때 활성화 되고 또 인간을 숙주로 삼으면서 비로소 생산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엔지니어들의 집단적인 죽음은 무기의 형태로 만들어 놓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적인 사고를 당한 것이며, 바로 자신들을 숙주로 삼으려는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려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라 생각한다.

에이리언을 자신의 태로부터 분리해낸 쇼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웨이랜드가 일행과 함께 수면상태로 왔고, 또 그가 원하는 것은 수명의 연장이며 그 생명의 비밀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데이빗은 동굴 속에 있는 한 장소에서 모두가 죽은 것으로 알았던 엔지니어 가운데 하나가 아직도 살아 있고, 그의 계획이 지구로 가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엔지니어를 통해 수명을 연장받기 원했던 웨이랜드를 그에게로 데려간다. 데이빗에 의해 깨어난 엔지니어는 오히려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 데이빗의 목을 몸통으로부터 분리해 무력화시키고, 웨이랜드는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면 외계인 지적 설계론의 단서로 작용했던 동굴벽화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지구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사전에 막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에이리언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인간을 끌어들이려는 계획으로 이해된다. 후자의 실행 주체는 데이빗이었다. 인간의 피조물이 오히려 인간을 위기로 모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에 비해 전자는 쇼 박사와 프로메테우스 호의 비행사들에 의해 실행된다. 다시 말해서 동굴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쇼 박사는 프로메테우스 호로 달려가 지구를 공격하기 위해 비행물체가 날아갈 것을 알리고는 지구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쓰든지 그것을 저지해야 할 것을 외친다. 쇼 박사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파악한 프로메테우스 호 비행사들은 행성을 이륙하는 비행물체를 향해 돌진함으로써 충돌하여 목적을 달성한다. 여전히 소통의 능력이 있었던 데이빗은 쇼 박사의 도움을 받아 기능을 회복하고, 쇼 박사는 우주선 비행능력을 가진 데이빗과 함께 창조자는 인류를 창조하였으면서도 왜 멸망시키려는 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지구가 아닌 또 다른 행성을 향해 떠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서사 구조와 유사하다. 먼저 한 명의 엔지니어에 의해 인류가 태어나지만, 인류가 다른 엔지니어들에 의해 멸망의 위협에 놓여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만들었지만, 이에 반해 다른 신들은 인간의 멸망을 생각했던 것과 동일하다. 동굴 벽화를 통해서 인류의 멸망을 앞서 예고하는 것은 제우스 몰래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가져다 준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여기서 불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며 인간에게 하나의 축복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재앙을 위한 단초였다. 멸망의 도구로서 인류에게 불행과 질병이 만연하게 만든 것처럼, 엔지니어들은 에이리언을 만들어 인류를 파멸시키고자 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인류를 불행에 빠뜨릴 악이 나온 것처럼, 휴머노이드 데이빗을 통해 열린 동굴에서 에이리언이 활성화 되었다. 판도라 상자에는 오직 희망만이 남았듯이, 쇼 박사의 믿음과 십자가만이 남아 있는 것 등이다.

두 개의 서사를 비교한 후에 이제 우리가 다뤄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현대에서 SF 영화를 통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각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프로메테우스 전설이 주는 교훈은 인간의 희망이다. 전설은 인간의 현실에서 만연해 있는 질병과 불행 그리고 악에 직면해서 그 이유를 성찰한 것이며, 이런 현실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희망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리들리 스콧 감독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지구의 멸망과 위기의식이 지배적인 현실을 염두에 두고, 그것의 세 가지 원인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의 무절제한 호기심이다. 이것은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둘째는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과 생명에 대한 상업주의적인 욕망이다. 셋째는 데이빗이 자신을 만든 인간과 동일한 패턴으로 사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피조물로서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주와 동일하게 여기면서 다른 피조물을 포함해서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전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창조주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경고한다. 마지막으로 감독은 다소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런 위기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희망,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기독교적인 희망임을 강조한다.

반응형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