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떠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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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

<그녀가 떠날 때>(페오 알라닥 감독, 드라마, 15세, 2010)


매스컴을 통해 종종 접하는 소식이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가족의 명예를 매우 중시한다. 대체로 종교적인 가르침이 문화로 형성되고 삶으로 구현될 때는 강한 구속력을 갖게 되는데, 가족의 명예는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는 이슬람 종교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문화이며 또한 삶의 한 방식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강한 구속력을 갖는 전통에 해당한다. 여성의 행실 때문에 가족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판단될 경우, 심지어는 남자 형제나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다 해도 그 사회에서는, 비록 논란의 여지는 많을지라도, 범죄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이것은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이기 때문에 전 세계 여론을 들끓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떠날 때>는 특정한 사례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해도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를 다룬다. 터키계 독일 태생인 우마이는 터키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다. 독일의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우마이가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강한 집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남편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는 것은 초반부의 몇 개의 장면들을 통해 제시되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된 생활에서 결혼 생활의 의미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던 우마이는 아들 챔과 함께 친정이 있는 독일로 돌아간다. 여자가 이혼을 하거나 또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던 이슬람 전통은 우마이의 결정과 가족 사이에 심각한 갈등 관계를 유발한다. 우마이로 인해 가족이 독일 내 터키 사회에서 가쉽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가족 모두가 참기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어느 날 참다못한 아버지가 챔을 생부에게 강제로 돌려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우마이는 경찰의 도움에 의지해서 여성보호센터로 몸을 피신한다. 그녀에게는 의미 없는 결혼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챔과 함께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박한 꿈과 희망을 이해할 수 없었던 친정 식구들은 우마이의 완고하면서도 돌발적인 행위 때문에 마침내 그녀를 집안의 수치로 여긴다. 더군다나 동생의 결혼이 언니의 이혼문제로 무산될 위기에 처해지자 우마이에 대한 가족의 태도는 급변한다.

그러나 우마이가 가족, 곧 혈연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달랐다. 여성보호센터의 책임자가 가족의 누구와도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마이는 엄마와 여동생 남동생 등을 만나면서 혈연관계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표현해 보일 정도로 혈연관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영화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결국 가족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의 결혼식에 가족의 일원으로서 참석하려는 우마이의 의지는 가족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녀는 왜 혈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녀가 가족에게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도 가능할 수 있었고, 마지막 장면의 불행한 결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녀는 혈연을 떠나지 못한 것일까? 자신의 혈연은 떠날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왜 챔과 생부와의 관계는 끊어놓으려 했던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단서는 있다. 영화의 독일언 원제인 Die Fremde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방인, 낯선 자, 타자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은 '그녀가 떠날 때'로 의역해서, 그녀가 여성으로서 종교적으로 각인된 전통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운명을 다루는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제가 주는 의미를 다소 희석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가족과 전통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고통스런 삶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들 챔이 결코 이방인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다.

우마이는 터키계 독일인이기 때문에 만일 터키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면 이중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독일에서 나서 자라고 독일 사회와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란 여성이기 때문에 자아 정체성도 그렇지만, 문화나 외모를 보아도 그렇다. 독일 사회가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폐쇄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독일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 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가 떠날 때’라고 할 경우에는 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방인”은 우마이가 겪을 수밖에 없는 두 개의 국면을 나타낸다. 하나는 가족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방인이요, 터키계 독일인으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태생적으로 독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은연중에 겪어야 하는 이방인으로서 정체성이다. 우마이가 가족을 떠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았던 것이나 따뜻한 독일 친구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결코 안착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두 개의 상황이 만들어낸 갈등 때문이다.

이 영화는 종교적으로 각인된 문화가 가족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그러한 전통이 특별히 여성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이방인, 곧 타자들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정체성과 삶이 강조되기 보다는 엄마로서의 모습이 더 강하게 부각된 것 같아 다소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전체가 주는 강한 인상과 메시지를 결코 반감하진 못한다.

이미 서울기독교영화제에서 상영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이 독립적인 삶을 살려고 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갈등의 국면이 어떠하다는 것을 잘 엿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개인과 개인의 갈등이었다면, <그녀가 떠날 때>는 가족과 개인, 개인과 전통, 개인과 사회의 갈등 등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종교는 결코 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적인 전통과 문화가 사회의 양심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배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낯선 자로서 타자로서 버려진 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런 일이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도록 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전통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복음은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관용과 용서와 인내를 통해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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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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