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니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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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인간 본질의 상관관계

<크로니클>(조쉬 트랭크, SF, 드라마, 액션, 2012, 15세)

힘이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에너지이다. 힘이 부족하다 생각해서 힘을 더하기 위해 애쓰는 행위를 노력이라고 한다. 노력에 따라서 힘은 더해지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힘을 잃게 된다. 힘의 이동은 사회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노력한다고 해서 당연히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사회에서 노력은 힘을 더하는 방식 가운데 최선의 것이다. 그렇지 않고도 얻어지는 힘은 특혜 혹은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판단을 받는다. 정의란 바로 힘의 균등한 배분에 대한 사회적인 통제력을 일컫는다.

본질적으로 상호작용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되고 또 이해되기 때문에 힘은 처음부터 관계적이다. 절대적인 힘이란 어떤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결코 우위를 잃지 않는 힘을 말한다. 그러나 힘이란 본질적으로 존재들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힘의 균형은 정상적인 상호작용에 기여하고, 정상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힘의 균형은 유지된다. 균형이 깨지면 상호작용은 약화되고 일방적인 것이 된다. 상호작용이 안 되면 균형을 잃게 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호작용에서 우위가 결정되기 때문에 힘은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다. 힘이 있으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힘에는 자기력, 중력, 만유인력 등과 같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생명력, 인지능력, 지각능력, 사고력, 상상력, 판단력, 정력 등이 있으며 이런 힘을 바탕으로 인간은 상호작용을 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잠재적으로 힘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다. 이밖에도 지력이나 창의력 그리고 예술적인 능력과 같이 노력을 통해 갖춰지는 것이 있다. 자연의 힘과 달리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만 주어진 것 외에 대부분의 힘은 인위적인 노력을 덧붙여서 획득하는 것이다. 권력과 재력 그리고 군사력 등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규약에 의해 형성되는 힘을 갖는다. 정치및 사회권력이 대표적이다.

어떤 힘이든 균형이 깨지면 혼란이 오기 때문에, 힘은 결코 무한할 수 없고 일정한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톨킨의 동명소설의 원작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반지의 제왕1-3>(피터 잭슨, 2001-2002)은 통해 바로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정상적인 범위 혹은 자연법칙의 한계를 넘어선 힘을 가리켜 사람들은 초능력이라고 일컫는다. 초능력의 실재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자고이래 동서고금으로 초능력에 대한 동경은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특히 각종 판타지 문학에서 초능력은 가장 선호되는 소재이다. 종교 역시 자연법칙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례들을 기적설화라는 형태로 전승해왔다. 기적은 자연법칙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의 작용임에 비해 초능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즈음해서 제기되는 질문이 있다. 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힘이 없다면,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과 사회에서 일대 혼란은 피할 수 없으며,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힘은 존재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상호작용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 힘은 존재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목적을 실행한다.

따라서 힘은 언제나 일정 범위 안에서 그리고 일정한 원칙에 따라 발휘되도록 통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이 되고 무질서와 혼란이 초래된다. 예컨대 권력이 세상을 휘두르기 위해 사용될 때,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지력이 균형을 잃고 더 이상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때,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정력이 과욕으로 이어질 때, 삶의 기운인 생명력이 자신만 살겠다고 힘을 발휘할 때, 바로 이러한 때에 폭력은 탄생한다. 폭력이란 자신의 의지를 강압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힘이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 교회의 권력과 근대의 전체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 그리고 독일 민족사회주의가 휘둘렀던 힘을 생각해보라. 폭력이 인류 사회에 어떠한 불행을 가져왔는지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동안 이런 힘의 역학과 논리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성찰하고 재현해왔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등. 처음에는 사회에 기여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연출되었지만, 편수가 늘어갈 수록 다양한 형태와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예컨대 스파이더맨은 처음과는 달리 점점 더 인간으로서 영웅의 갈등과 고민을 다루고, 엑스맨은 사회의 영웅으로 자리매김 되지 못하는 영웅담을 다룬다.

조쉬 프랭크 감독의 데뷔작 <크로니클>은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힘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매우 색다른 연출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크로니클>은 판타지의 성격이 강하지만, 특별한 방식의 촬영으로 마치 실제 동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파운드 풋티지 기법(실제 사건의 동영상인 것과 같은 착각을 주는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페이크 다큐라 불림)은 그동안 <REC>, <파라노말 액티버티>, <블레어윗치>, <포스카인드>, <클로버필드> 등의 영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크로니클>은 이들보다 더욱 강력하고 또 색다르게 리얼리티와 판타지 모두를 살려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는 우연한 기회에 초능력을 얻게 된 10대 소년들의 좌충우돌의 이야기다. 등장인물의 캐릭터 분석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주목되는 캐릭터는 앤드류 다트머이다. 소방관으로 재직하다 사고로 은퇴한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이고 폭력을 휘두르며, 엄마는 오래전부터 병을 앓고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다. 앤드류 자신은 또래 아이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오직 사촌인 맷과만 다니며, 또한 오직 카메라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경험하는 특이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앤드류는 엄마로부터 ‘나는 강하다’는 말을 되 뇌이도록 부탁받을 정도로 매우 심약한 성품을 갖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돈이 없어서 엄마의 병원비는 말할 것도 없고 약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앤드류에게 다른 두 소년보다 더욱 강력한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영화는 단순히 초능력을 가진 소년들의 장난스런 일상과 성장담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 바로 앤드류와 같은 캐릭터가 초능력을 갖게 될 때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열등감을 갖고 심약하며, 척박한 환경에서 살면서 사회적인 냉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앤드류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경우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인가를 묻고 대답한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인 범죄가 환경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는 지나치게 식상한 논리를 전개하는 듯이 보이지만, 앤드류의 경우엔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초능력을 사용해 장기자랑에서 재능을 맘껏 발휘하여 친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러나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기대와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오히려 친구들의 놀림감이 된다.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초능력은 친구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며, 엄마의 약값 문제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자, 앤드류는 갑작스럽게 통제력을 상실하고 극도의 흥분상태로 빠진다. 앤드류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분노를 해결함에 있어서 초능력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함께 초능력을 획득한 맷이 초능력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원칙을 제안하지만, 앤드류는 무시한다. 엄마의 약값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함에 있어서 자신의 초능력을 무절제하게 사용한다. 앤드류가 일으킨 일련의 해프닝 때문에 발전될 심각한 국면을 염려하여 그를 저지하는 친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야기한다. 결국 사촌인 맷에 의해 죽음을 맞게됨으로써 앤드류에 의해 초래된 혼란은 평정된다.

영화는 무엇보다 페이크 다큐의 형식을 기존의 것과 아주 다르게 연출한 것으로 돋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힘 자체보다는 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나 강력한 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인간은 과연 힘과 관련해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인간은 힘을 즐기기도 하고 추구하기도 하며, 그것으로 개인 혹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와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한다는 사실이 영화를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층 더 나아가서 힘에 대한 통제력이 무너질 때, 예컨대 심약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혹은 힘을 통제하는 수단이 사라지게 될 때는 사회적으로 대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힘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힘이란 통제가 가능할 때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사회의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한편, 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매우 상반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전능성을 스스로 제한하신 것을 말하며, 인간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세상에 대한 사랑,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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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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