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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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오늘 우리가 살아 갈 이유이다

<달팽이의 별>(이승준, 다큐멘터리, 15세, 2012)

<달팽이의 별>은 장르상 장애인 영화이다. 2011년 전주영화제에서 처음 선 보인 후,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에서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장편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미국의 공영방송 PBS의 POV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다큐멘터리’ 중 12위를 차지했다. 화려한 이력이 말해주고 있지만, 이 영화는 전달되는 이야기와 내용을 담아내어 표현하는 형식이 서로 잘 조화된 작품이다. 무엇보다 장애 자체가 영화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속 인물들에 몰입할 수 있었다.

영화는 보도 듣도 못하는 시청각 장애인 조영찬씨와 어려서 사고로 척추를 다친 김순호씨 부부의 일상과 꿈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영화의 중심은 물론 영찬에게 맞춰져 있다. 영찬은 태어나면서부터 듣지 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은 할 수 있지만, 현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이런 이중 장애를 안고 달팽이처럼 오직 촉각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며 느릿느릿하게 사는 영찬의 세계는,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우주다. 아무 소리도 빛도 없는 세계에서 그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느낌으로 산다. 그래서 자칭 “우주인”이다. 단순히 시청각 장애 때문은 아니다. 우주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시청각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었던 외로움의 세계를 말하기도 한다. 빛과 소리에서 멀어지고, 장애인을 보는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으로부터도 멀어진 것이다. 바로 이런 고립된 세계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그는 천사 같은 여인을 만나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역시 척추장애를 갖고 있어서 작은 몸집을 갖고 있다. 영찬은 점자 자판기로 세상과 소통하고, 아내는 손등을 두드리며 남편과 소통한다. 소리와 모양과 위치와 공간을 자판 두드리듯이, 손등을 두드리며 전달해준다. 점자로 세계를 읽고 촉각만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일은 보통의 상상력이 아니면 도무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영찬은 그런 소통 방식으로 얻은 세계 경험을 시와 수필로 그려낸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달팽이의 별>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이다. 비장애인에게도 험난하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징애인으로 살아가는,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삶을 전해주는데, 영화에는 시청각 장애인의 삶과 경험 그리고 느낌을 전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묻어있다. 3중장애를 극복했던 기적의 인물 헬렌켈러에게도 그랬지만, 영찬이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손으로 느끼고, 또 손끝으로 베란다 철봉에 매달린 물방울을 경험할 때나,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 스크린으로 옮겨졌을 때는 숭고함마저 느꼈을 정도다.

장애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결코 어둡지 않고 따뜻하고 밝으며,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갖고 매우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의 일상에서 만끽하는 삶의 유희도 발견할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동정을 유발할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감독은 단지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는 삶의 한 유형을 제시하는데 집중하고 있으며, 촉각을 통해 세상을 살고 경험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통해 그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감상하면서 장애인의 현실이 어떠함을 알게 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한 행위를 할 수 있겠지만, 영화는 결코 이것을 겨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관객은 단순히 장애인의 현실을 아는 것 그 이상의 경험과 성찰로 이끌리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등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몇 개의 장면들을 통해 그들의 특별한 일상들을 소개하는데,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형광등을 가는 장면과 장애인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밥을 먹는 장면, 비를 경험하는 장면, 나무를 끌어안으며 소통하는 장면, 그리고 홀로설 수 있기 위해 아내의 안내 없이 길을 나서는 장면 등이다. 이렇게 하나둘씩 나열하다보니 영화 전체가 되었다. 그만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생각을 일깨우고 또 공감하게 하는 장면들로 가득하다는 말이다.

예컨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형광등 장면이다. 세상을 보고 또 듣는 자이지만 척추장애로 웅크리고 살 수 밖에 없는 순호와 텅 빈 우주에 갇혀 허공을 헤엄쳐 가는 듯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영찬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드러내는 이 장면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조이게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형광등이 고장난 것을 알아낸 것은 단연코 아내이다. 시청각 장애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위해 형광등은 교체되어야 한다. 문제는 형광등을 교체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비장애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해도, 두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일 수도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척추장애를 갖고 있는 아내는 키가 작아 아무리 의자를 갖다 놓고 올라서도 형광등 높이에 닿질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보도 듣도 못하는 남편에게 부탁하기에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 용기를 낸다. 먼저 침대에 올라 아내의 지시대로 손을 뻗어 램프를 더듬으며 형태와 구조를 파악한다. 그리고 연결단자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몇 차례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고장난 형광등을 빼낸다. 아내는 빼낸 형광등과 동일한 것으로 새것을 사오지만 새것을 끼워 넣는 일도 만만치 않다. 우선은 연결 단자를 찾아내야 하고, 형광등이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고리들에 안전하게 끼워야만 한다. 전선들이 서로 꼬이지 않도록 해야 하고 또 형광등이 제 위치에 놓이도록 돌려야 한다. 마침내 힘겹게 일을 마치고 스위치를 올리니 형광등에 밝은 불이 켜진다. 카메라는 밝게 켜진 형광등을 한참이나 응시한다. 영찬 안에 있는 마음의 빛이며 또한 두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비추는 빛을 그렇게 보여준 것이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이 장면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전해주고 싶은 것은 단순히 장애인의 일상을 넘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물론 장애인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스스로 장애를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어떤 의미인지를 조명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케 한다. 곧, 서로가 서로를 돕는 자로서 영찬과 순호는 서로 돕는 자로서 창조된 인간의 형상을 온전하게 구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장애인들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장면이다. 식당에서는 결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그들만의 만찬이다. 음식이 놓여 있는 자리를 알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눈이 되고 또 귀가 되어 대화하며 음식을 나누는 모습이 대단히 정겹고 인상적이다. 그 어느 풍성한 식탁도 전혀 부럽지 않은 자리이며 애찬의 현장이다. 식사 후 나누는 그들의 대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외로움이다. 영찬과 순호의 결혼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이 대화에서 영찬은 놀랍게도 자신의 결혼이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곧 도움을 받기 위함에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외로움이었음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것은 외로운 인간이 또 하나의 외로운 인간을 만난 것이지, 장애인으로서 만난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장애와 장애인을 보는 시각에서 영찬 스스로가 벗어나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화였다.

이런 대화를 통해 더욱 분명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영찬의 자의식이다. 그는 스스로를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 잠시 침묵 속에서 기다리는 우주인으로 생각한다. 그의 이런 자의식은 현실의 두터운 벽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장애를 긍정적으로 여겨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아내 순호는 바로 이런 의지가 구현되고 실천되기 위해 준비된 도움이었으며 또한 그것으로 스스로 만족한다.

중국의 여성 학자로서 짧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 중국 사회를 안타깝게 만든 위지안은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제목의 책에서, 왜 사람들은 세상 끝에 가서야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지를 물었다. 정신없이 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자신이 말기암 환자로 판정되고, 얼마 안 있으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그녀는 비록 뒤늦게 깨달았다 해도 결코 후회로만 끝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 남겼고, 그것은 지인들에 의해 책으로 엮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살아갈 이유라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일상, 그 자체였다. 남편이 또 가족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었다.

<달팽이의 별>을 보면서 떠오른 질문은 위지안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런 질문과 함께 오래 전 영화 <마이티>(피터 첼섬, 1998)가 떠올릴 수 있었다. 학습부진아이면서 거대한 몸집을 갖고 있는 소년과 천재적인 머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선천적인 기형을 앓고 있어서 결코 집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소년의 우정이야기다. 두 소년이 서로의 결점으로는 한 개인에 불과하고 게다가 고립된 삶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장애인에 불과했겠지만, 두 사람의 협력은 영웅을 만들어낸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우 희망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다. 물론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도 비슷한 주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언터쳐블>(올리비에르 나카체/에릭 토레다노, 2011) 역시 현실에서 고립된 존재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매우 필요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전해준다. 일련의 영화들에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인간은 개인으로서 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때 비로소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무능한 자를 돕는 유능한 자가 있다면, 장애인을 돕는 비장애인이 있다면, 결함을 가진 자에게 온전한 자가 있다면, 너와 내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면,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갈 이유로서 충분한 것이다.

서로를 주장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본질을, 만남의 의미를,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되새겨 본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우리가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아무리 못나고 나쁜 사람이라도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또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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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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