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 여왕은 솔로몬을 왜 찾아왔나?
구약성경 열왕기상 10장(1-13절)과 역대상 9장(1-12절)에는 솔로몬의 지혜를 소문으로 듣고 찾아온 시바의 여왕(스바 여왕)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은 그가 난해한 질문으로 솔로몬을 시험한 후 만족하고 감탄하여 향품과 보석 등 수많은 선물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그를 지혜롭고 부유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갔다고 기록한다. 후에 예수님은 눈앞에서 진리를 목격하고도 여전히 표적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을 때, 지혜를 찾아 먼 여행의 수고를 감내한 시바의 여왕을 언급했다(마태복음 12장 42절, 누가복음 11장 31절).
한편 역사가들은 이 방문의 경제적인 목적에 주목한다. 아라비아 남부의 시바Sheba는 향수와 향품 무역이 발달했던 국가로, 당시 솔로몬이 통제하고 있었던 무역로가 절실했다. 솔로몬이 시바 여왕의 소원대로 베풀었다는 성경의 기록에 따라, 시바 여왕과 솔로몬의 교류는 단지 지혜의 교환과 확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리적인 이익을 낳았으며, 둘 사이에 육체적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킹 비더의 1959년 영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 제시하는 여왕의 방문 목적은 사실상 정치적인 맥락에서 출발한다. 이집트의 파라오를 중심으로, 다윗 왕조의 이스라엘이 부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이웃 동맹 국가들은 시바의 여왕을 유대 땅으로 보내 솔로몬을 무너뜨릴 비밀을 캐려한다. 이를테면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동경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를 해치러 왔다가 그의 지혜에 반해 마음이 약해진 경우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여왕은 들릴라, 정확하게는 세실 B. 드밀의 <삼손과 데릴라>(1949)와 닮았다. 드밀의 데릴라가 그랬듯이, 시바 여왕은 이방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곤경에 빠뜨렸다가 결국은 자신이 회개하고 회심함으로써 용서와 구원에 기여한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와 민족을 뛰어넘는 둘 사이의 로맨스이다. 영웅담에 흔한 ‘역경’의 일부로서 당연하게도, 당대에 환영받지 못했던 사랑이었다.
군인과 시인, 전쟁과 평화
구약성경과 역사적 기록이나 외경 등을 두루 참고하되 영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 상상하고 재구성해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다윗왕이 늙고 병들자, 아들들 중 유력한 후계자였던 아도니야(조지 샌더스 분)가 스스로 왕임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통치를 꿈꾼다. 열왕기상의 아도니야는 선왕의 여인이었던 아비삭을 넘보다가 분노한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만, 영화에서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 된 솔로몬(율 브린너 분)은 아도니야를 살려둘 뿐 아니라 그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맡긴다. 결국 이 일은 솔로몬의 왕위를 불안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데, 아도니야는 시바 여왕(지나 롤로브리지다 분)에게 솔로몬을 치기 위해 동맹할 것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이집트 파라오에게 도움을 청해 솔로몬 군대를 공격한다. 이 때는 이미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진 후였고 솔로몬은 여왕과의 스캔들로 인해 백성들에게 신임을 잃어가던 시기였다. 영화는 솔로몬이 이방신의 제사에 동참하고 어리석은 행보를 보인 것은 백성을 분열시키고 솔로몬의 왕권을 약화시키려 했던 시바 여왕의 정치적인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다윗의 계보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뜻하기도 했다. 단, 그의 곁에는 수넴 여인 아비삭과 전투 중 죽음에서 그를 구해준 다윗의 방패가 있었다. 다윗의 침상에서 늙은 다윗의 몸을 덥혀주되 그와 동침은 하지 않았다는 수넴 여인 아비삭은 다윗의 사후에도 솔로몬궁에 남아 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솔로몬을 보필했고, 시바 여왕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신을 향해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솔로몬이 타락해갈 때 고통스러워하며 성전에서 솔로몬을 위해 기도하다가 희생당하고 만다. 그의 죽음은 시바 여왕이 회심하고 솔로몬이 회개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솔로몬에게 있어서 아비삭의 존재는 다윗의 뜻을 상기하는 매개체이자 그 자체로 선왕의 유산이었다.
또 다른 유산이자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약호는 ‘다윗의 별’이다. 이스라엘이 현대국가의 재건(1948)에 성공한 1959년의 할리우드는 다윗의 별을 아도니야의 방패에도, 솔로몬의 방패와 전차와 옷에도 마구 새겨두었다. 여기서 아도니야와 솔로몬은 둘 다 다윗의 혈통이며 다윗의 두 가지 자질, 즉 군인과 시인으로서의 능력을 각자 물려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다윗의 예언대로 결국 승리한 것은 시인 솔로몬의 ‘평화’였다. 평생 전장에서 손에 피를 묻혀가며 쫓고 쫓기는 삶을 살았던 다윗이 아들의 이름을 ‘솔로몬(‘평화’라는 뜻)’이라고 지었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꽤 의미 있는 각색이다. 감독 킹 비더는 이 작품 전에 톨스토이 원작의 <전쟁과 평화>(1956)를 연출하기도 했다. 요컨대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잇는 인물이되 그의 미덕 중 시인으로서의 감수성과 평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계자라는 점은 영화 초반부터 중요한 화두였다.
그런데 솔로몬은 지혜를 어디에 썼나?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서 우리가 만나는 솔로몬은 그러므로 지혜의 왕이라기보다는 평화의 왕이다. 흔히 솔로몬 하면 떠오르는 ‘솔로몬의 재판’과 성전건축이나 일천 번제는 영화에서 시바 여왕과의 로맨스를 위한 배경으로 기능할 뿐이다. 반면 솔로몬의 지혜가 가장 인상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부족의 평화를 위한 재판이나 국정 난제를 풀기 위한 정상들의 토론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치열한 전투장면에서였다. 파라오와 아도니야 연합군에게 밀려 솔로몬이 패배 하기 직전, 아비삭의 부친인 아합의 지원군이 도착한다. 그는 희생된 딸 아비삭을 위해 싸우러 왔다고 말하는데, 앞서 보았듯이 그것은 곧 다윗을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이 싸움에서 솔로몬은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진군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해서 반짝이는 방패로 태양빛을 반사시켜 적군을 전멸한다.
‘평화주의자’ 솔로몬은 이제 자신의 지혜를 동원하여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다시 말하면 다윗 혈통의 두 가지 자질인 용맹스러움과 평화 애호는 이렇게 해서 솔로몬에게서 성공적으로 통합되고 화해한다. 밧세바의 아들이 전사이자 시인이었던 대왕 다윗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는 순간이다. 다만 그 근저에는 아비삭이나 시바의 여왕 같은 여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는 점 정도는 기억해두자.
두 번의 잔혹한 세계대전과 대학살을 경험한 후, 냉전(전쟁)으로만 간신히 유지되는 평화의 한복판에서 20세기 할리우드는 솔로몬이 아이를 잃은 창녀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인 사건보다는 지혜롭게 “싸워서” 평화를 되찾은 일을 지혜의 정점으로 다루었다. 그것이야말로 ‘왕의 지혜’에 관한 20세기식 해석이자 당대의 모순된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가 곧 지식이 아니고 전략이나 전술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고, 최고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위태롭게 해왔는지 목도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무엇이어야 할까. 솔로몬 시대, 시바 여왕 뿐 아니라 세상이 다 놀라고 찬양했다는 하나님의 지혜는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발현되어야 할까. 그것은 다윗의 평화와 전쟁을 마감하는 그리스도의 평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에게, 지혜롭고도 평화로운 승리는 가능할까?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답답함을 뚫어내는 지혜가 그 평화와 공존할 수 있을까.
최은 | 영화를 매개로 한 크고 작은 만남들과 글쓰기의 기회들에 감사한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하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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