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영화의 고전들 <벤허> - "당신의 길이 너무 험하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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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영화의 고전들[1]

당신의 길이 너무 험하지는 않기” - <벤허>(1959)


 최은

왜 '고전(古典)'인가?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VR)을 말하는 시대에 '고전'을 말하는 이유는, 반복되는 역사와 고민들 가운데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인류의 지혜의 유산들이 바로 '고전'이기 때문입니다. 어제가 없이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 있을 수 없듯이 [성경 영화의 고전들]을 통해 내일을 헤쳐나가기 위해 어제의 영화가 오늘의 기독교에 주는 메시지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성서 영화를 향한 향수

2014년 한 해 동안 <노아>, <선 오브 갓>,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과 같은 굵직한 성경 내러티브 영화들이 연이어 개봉하면서 기독교 안팎에서 할리우드 성서 스펙터클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심심찮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올해만 해도 부활절을 맞아 <부활>이 개봉했고, 여름 즈음 리메이크작 <벤허>가 개봉될 예정이라 하니, 전혀 근거 없는 진단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여기엔 장편영화가 시작된 이래 변함없는 인기장르였으며 1950년대 정점을 이루었던 기독교 서사영화에 관한 동경과 향수가 작용하고 있다. 당대 최고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어져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쿠오바디스>(1951), <성의>(1953), <십계>(1956)가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그리워하는 걸까? 성경 내러티브 영화가 만들어낸 장엄한 스펙터클? 탄탄한 스토리와 영적으로 위험하지 않은감동? 왜곡되지 않은 성경 해석? 어쩌면 그런 영화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소비되고 심지어 칭찬받는 시대정신?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주말의 명화나 특선영화 단골메뉴이던, 어딘지 다 비슷비슷한 영화들로 막연히 기억할 뿐 우리가 그 시절 그 작품들을 제대로 적이 없다면 어떨까?

하여 전성기 할리우드의 기독교 서사영화들을 읽어가는 연재칼럼을 시작해보려 한다. 윌리엄 와일러의 1959년작 <벤허>로부터 출발해보자. 글을 연재하는 동안 내가 지나간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알리바이와 고전영화라는 안전함 뒤에 숨지 않기를, 주께서 나의 손끝에서 고루한 문장들을 거두어가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벤허>가 할리우드를 구원하리라.”

1950년대 할리우드는 다양한 맥락에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극장 관객들을 안방으로 불러들였고, 영화사가 극장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연방 법원의 판결로 수십 년간 확고하던 스튜디오 시스템은 무너지고 있었으며, 유럽에서는 대안적이고 새로운 영화의 물결이 일어나 할리우드를 공격해왔다. 설상가상으로 냉전시대 국제정세에 따라 미국 내에서는 소위 매카시 열풍이 불어 검열과 통제가 강화되었고, 근본주의 종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1920년대부터 이미 활동해왔던 자체검열기구의 영향도 아직은 무시할 수 없었다.

성경을 기초로 한 스펙터클 영화는 1950년대에도 여전히(‘좋았던 1950년대여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돌파할 수 있는 교집합이자 탈출구였다. 위기를 겪던 제작사 MGM1925년에 이미 <벤허>를 통해 큰 재미를 봤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1950년대 스튜디오 상황이 어려워지자 다시 <벤허>를 선택했다. 텔레비전이나 흑백 무성영화가 할 수 없는 일을 1959년의 <벤허>는 해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벤허>65mm 와이드 필름(보통은 35mm) 테크니컬러 촬영에 70mm 와이드 스크린 상영, 15백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 3시간 30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탄탄한 스토리와 충분한 볼거리를 보장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다. 다만 이미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훼손된 당대 관객들의 신앙심과 사상의 흐름을 고려하여 너무 노골적으로 종교적이지는 않아야 했다. 영화보다 유명한 대표적인 영화 장면, <벤허>의 전차 경주 신(scene)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멜로드라마의 대가인 윌리엄 와일러(<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 <로마의 휴일>(1953), <퍼니 걸>(1968)의 감독)가 연출을 맡았다.

 



왕자가 신자가 된 사연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의 조각난 기억과 달리 <벤허>에는 전차 장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대의 명문가 허(Her)씨 집안의 왕자인 유다 벤허(찰턴 헤스턴 분)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로마인 메살라(스티븐 보이드 분)를 오랜만에 만난다. 소년시절 예루살렘에 살았던 메살라는 로마의 새 지휘관이 되어 돌아왔다. 메살라는 영향력 있는 유대 귀족인 벤허가 그를 도와 로마에 충성하기를 바라지만, 벤허는 우정 때문에 민족을 배신할 뜻이 전혀 없다. 새 총독의 부임식에서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려 반역죄인의 누명을 쓰게 된 벤허는 노예선으로 끌려가고, 모친 미리암(마사 스콧 분)과 누이 티르자(캐시 오도넬 분)는 지하감옥에 수감된다. <벤허>는 한 민족의 왕족에서 순식간에 식민지 노예로 몰락한 벤허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기적을 체험하는 과정을 다룬 서사극이다.

벤허에게는 모세와 요셉 같은 구약의 인물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겹쳐있다. 이집트의 왕자였지만 노예들과 함께 유랑을 떠난 모세가 유대의 왕자였다가 노예가 된 벤허로 나타난다면, 이집트에 팔려갔지만 국무총리가 되어 왕의 인장까지 받았던 요셉은 노예생활 중에 로마 집정관인 퀸터스 아리우스(잭 호킨스 분)의 양자가 되어 가문의 반지를 받아든 벤허가 되어 있다. 죽은 줄 알았던 벤허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바라보는 여종 에스더(하야 하라릿 분)의 시선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마리아의 것과 같다. 베들레헴에서 아기예수에게 경배했던 동방의 발데사르는 벤허를 나사렛 예수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고 요셉은 한 가문(예수가 속한 가문이다.)을 살렸으며, 예수는 전 인류를 구원했지만, 벤허에게는 자신의 회심이 전부였다. 적어도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의 결말은 그렇다.

1925년 버전의 <벤허>(프레드 니블로 감독)와 비교해보자면 이 점은 더 흥미롭다. 1925년의 벤허는 전차경주에서 이겨 부와 명성을 회복한 후 발데사르로부터 예수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대를 조직해 민족지도자로 나선 반면, 같은 상황에서 1959년의 벤허는 발데사르를 두 번째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냉소하며(“당신은 평생의 답을 찾았으니 참 좋겠소.”) 회심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1959년의 <벤허>는 냉소적이고 냉담한 귀족청년이 여러 번의 의심과 거절 끝에 결국 예수를 만나는 개인적인 회심의 드라마에 집중한다. 요컨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난 후 두 벤허는 모두 칼을 버리고 평화를 택하신 예수의 뜻을 이해했지만, 1925년의 벤허가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군대로 하여금 창칼을 내려놓게 했다면, 1959년의 벤허는 자신이 메살라에게 행한 복수를 회개하는 선량한 신자가 되어 있다.

 


인기 있는 영화, ‘인기 있는복음?

영화 <벤허>에서 (한 민족의) 왕자가 (일개)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복음의 공평함과 겸양인가? 성경내러티브 영화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복음이 환영받는 것처럼 보이던 1950년대 말, 세상의 폭력과 압제에 반해야 할 평화의 복음이 가장 내밀한 개인의 영역으로 숨어들고 있었다고, <벤허>가 혹시 징후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윌리엄 와일러는 마침 루 월레스의 원작(“Ben-Hur: A Tale of the Christ”)에서 그리스도 이야기라는 부제를 생략하고 예수님의 모습은 뒷모습과 원경으로만 다루어 까다로운 재현의 문제를 영리하게 피했다(1925년 버전의 <벤허>에서도 예수님은 신체의 일부로만 등장하지만 둘은 서로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와일러의 <벤허>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성경 드라마였다. 물론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와일러 자신에게도.

동방박사 발데사르가 벤허에게 했던 대사를 떠올려본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여러 가지지요. 당신의 길이 너무 험하지 않기를.” 그리스도의 흔적을 쫓아 평생을 떠돌았던 노인이 할 수 있는 축복의 인사이자 실상은 예수 만날 기회를 눈앞에서 자꾸 놓쳐버리는 혈기왕성한 한 젊은이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성경 내러티브 영화는, 특히 영화 <벤허>는 대중을 상대로 하여 그것을 매우 쉽고 안전하게 전유한 모양새가 되었다.

오늘날 영화가 복음에 다가가는 수많은 통로 중 하나일 수 있다면, 그 길이 때로는 험한 길이어도 좋겠다, 고통과 유랑은 주인공 혼자의 몫이고 관객에게는 쉽고 매끄럽고 안전해서 비껴가기도 쉬운 그런 길만이 아니라. 심지어 전혀 길 같지도 않아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발데사르의 축복처럼, 너무 험난하지 않게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이 시대의 역설일지도. 2016년의 <벤허>는 혹시 이 일을 해냈을까

 

최은 | 영화를 매개로 한 크고 작은 만남들과 글쓰기의 기회들에 감사한다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하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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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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