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뮈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 자체가 화젯거리였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일에서 그동안 꽤 까다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감독들의 러브콜을 거부했던 작가를 한국 측에서 어떻게 설득했는지 궁금증이 커졌다. 깊은 감동을 받았던 소설이 영화로 거듭날 때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영화보기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동의 여운을 남겨둘지 아니면 실망을 각오하고라도 영화를 보아야 할지. 그러나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표현했는지가 궁금해 보게 되었다. 영화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려 했고, 지나친 상상을 절제하여 비교적 현실에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을 담았다. 판타지일 수밖에 없는 시간여행을 CG 한 장 없이 촬영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장단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판타지 영화는 영화적인 기술력을 총 동원하여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게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물리적인 시간에 매이진 않아도 시간을 온전히 초월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는 갖가지 상황에서 다양한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인터스텔라> 같이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하여 제작되는 영화도 있고, <나비효과>처럼 나비효과이론을 설명하는 영화도 있다. 그리고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처럼 단순한 상상력만을 바탕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그런데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면서 경험되는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현실을 반영할 목적을 지향한다. 시간여행은 단순한 소재일 뿐이기 때문에, 관객은 그것을 통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며 감상할 필요가 있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서 들을 수 있는 질문은 이렇다. 만일 당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지는 사람마다 달라지겠지만, 서로 다른 대답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질문 자체는 비현실적이라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인류나 세상을 대상으로 하는 거시적인 관점이 있을 수 있고, 개인에 초점을 두고 보는 개인적인 관점도 있을 수 있겠다. 어떤 관점을 취하든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면, 관건은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현실에 만족한다면,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현실을 바꾸려 할 것이다. 영화는 바로 후자를 염두에 두고 전개된다. 게다가 세계 혹은 인류라는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전개된다. 할리우드식 영웅 만들기로 기울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금은 친근하게 또 현실적으로 느끼며 감상할 수 있다. 한번쯤 눈을 감고 상상한다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스포일러 있음)
수현(김윤석)은 외과의사다. 폐암 말기 상태에서 혼자 살아가는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젊었을 때 학회에서 처음 만난 여성과 하룻밤 인연으로 얻은 딸이다. 딸아이의 엄마는 미국에 살고 있다. 수현은 캄보디아로 의료봉사 갔다가 위험을 무릎 쓰고 홀로 남아 아이를 치료해준 대가로 노인에게서 10개의 알약을 받는다. 남보다 뒤늦게 의료봉사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수현은 알약이 30년 뒤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여행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서 30년 뒤로 돌아갈 수 있는 수현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무얼까?
보통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수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겠지만, 수현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30년 동안 후회하고 또 아쉬워하며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가슴 아픈 추억이다. 결혼을 꿈꾸며 사랑했던 연아(채서진)의 죽음이다. 돌고래 조련사였던 연아는 갑작스럽게 이상 행동을 하는 돌고래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이 일이 함께 여행하려던 계획을 자신이 미루면서 생긴 사고였음을 알게 된다. 수현이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한 방법을 찾기보다 먼저 연아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가 30년 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연아가 죽은 후 30년을 보낸 수현은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연아를 볼 수 있는 기대를 갖고 과거로 여행을 한다. 그러나 30년 전의 수현(변요한)은 여전히 연아와 달콤한 사랑을 즐기는 중이다. 그리고 그는 30년 후의 자신을 만나면서 연아가 자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그 방법이라는 것이 연아와 헤어지고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이다. 만나면 연아를 살릴 방법이 사라진다. 그런데 만일 연아의 죽음을 막는다면 그녀와 결혼하여 살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 함께 살아왔던 사랑하는 딸 수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헤어져야 하고, 또한 사랑하는 딸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다. 이런 슬픈 역설을 도대체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수현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신의 고통보다 연아가 살아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함께 마련한다. 수현은 연아도 살리고 딸도 지켜내지만 끝내 자신의 죽음을 막진 못한다.
수현은 그렇게 목숨을 잃는다. 죽마고우로 늘 수현 곁에 있었던 태호(김상호)는 수현이 남긴 일기를 통해 그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고, 30년 후의 연아를 찾아가 수현의 사망 소식을 알려준다. 연아의 슬픔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집으로 돌아온 태호는 불현 듯 수현에게 알약이 하나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알약을 먹고 과거로 돌아가 수현(변요한)에게 금연할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돌아온다. 그 후로 스스로 건강을 챙긴 수현은 폐암에 걸리지 않고 살아있게 된다. 연아도 살고, 딸 수아도 지키고, 또 수현도 사는,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이다. 해피엔딩이 비현실적이라서 식상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 건 무엇일까? 그건 분명 돌이킴이다. 30년 후의 수현이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잘못을 수정한 결과로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맞은 것이다. 연아와의 관계에서 잘못을 고치고 또 자신의 건강문제에서 잘못을 고쳤을 때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텔레비전 방송 드라마 <나인>(TvN, 2013) 역시 과거의 잘못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었을 때 모두가 행복한 현실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점에서 비록 내용 전개는 다르지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주제에서 흡사하고, 기욤 뮈소의 흔적이 짙게 새겨진 작품이다. 잘못을 고치는 일이 어떻게 미래적인 의미를 갖는지를 잘 말해주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 이야기를 시간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은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다. 두 부류의 사람 모두는 현재를 살면서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말 동일할까? 겉보기에는 그렇다 해도 실상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현재를 살면서 실상은 미래를 살고 있다. 왜 그런 지를 살펴보자.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다. 당시 유대인에게 회개는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돌이키는 행위이고, 천국은 미래에 실현될 나라였다. 둘을 분리해서 보지 않고 함께 묶어서 보면, 회개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돌이킴과 미래의 문제가 된다. 양자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고, 다만 회개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로만 이해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양자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돌이키는 자는 비록 현재를 살고 있지만, 사실은 미래로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하나님을 ‘오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비록 현재를 살고 있다 해도 미래를 사는 것이다. 인간의 편에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진행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시간은 미래로부터 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지나간다.
독일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미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복음은 미래의 하나님이 현재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다. 현재에 살면서 미래로부터 듣는 메시지를 듣고 순종하며 반응하는 사람은 비록 현재에 있더라도 미래에 실현될 삶을 산다.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산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듣지 않고 들었다 해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가야할 미래와 상관이 없는 삶을 산다. 심판은 메시지를 듣는 순간에 일어난다.
<당신, 거기에 있어줄래요>는 미래의 메시지가 갖는 의미와 그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점에서 기독교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더불어 원작 소설을 읽으면 더욱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최성수 박사가 본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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