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영화의 고전들 <삼손과 데릴라> - '악녀'의 회심으로 완성된 이스라엘의 영웅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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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이스라엘의 영웅

 

  우연이었을까. 이스라엘 건국(1948) 이듬해,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등장하는 성경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었다. 1949년작 세실 B. 드밀의 영화 <삼손과 데릴라>와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의 가사Gaza’가 바로 이 땅이다. <십계>(1923)를 만들었던 드밀이 1954년 파라마운트에 <십계>의 리메이크를 제안했을 때, 대다수가 유대인이던 파라마운트 이사들이 반대하자 당시 이사회 의장이었던 아돌프 주커는 호통을 쳤다. “우리 민족이 대규모 학살을 당한 이 시대에, 드밀은 유대의 전설적 영웅 삼손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유대인을 칭송했다. 그가 다시 모세 영화를 만들겠다는데, 우리가 무릎 꿇고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드밀은 감리교인 부친과 유대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인이다.


  주커가 말했듯이, 드밀은 삼손을 모세에 버금가는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로 그리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의 여러 영화들처럼 감독 자신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삼손과 데릴라> 서두에서 드밀은 말한다. “역사가 시작되기 전 최초의 남자가 영혼을 얻기 전에 인간은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모든 힘에 저항해왔고 거대한 힘을 지닌 자연도 항상 이겨내려 애썼다.” “소라라는 마을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천여 년 전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위대함만큼 나약함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민족의 자유라는 사명이 걸려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삼손. 40년 동안 블레셋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노예처럼 부렸다.”


  곧 이야기가 시작되면, 한 노인이 동네 아이들에게 이집트에서 백성들을 구해낸 모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아이들 중에는 사사시대를 마감하고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될 사울도 포함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사울은 삼손이 죽은 후 43년이 지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영화는 삼손의 후계자로 소년 사울을 지목했다. 사울은 이 드라마에서 제법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있다. 드밀의 <삼손과 데릴라>는 이렇게 해서 최초의 남자 인간 모세 이스라엘 왕국을 이룬 최초의 왕의 계보의 중앙에 (가자 근교의) 삼손을 새겨 넣었다.



 

데릴라, 회심한 블레셋의 여인

 

  영화의 기본 서사는 사사기(13-16)에서 전하는 바와 같다.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바쳐져 머리털과 몸에 칼을 대지 않고 일체의 술과 부정한 것을 금해야 했던 삼손(빅터 맞추어 분)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고 여인들의 유혹에 빠져 수수께끼의 답과 힘의 비밀까지 털어놓고 만다. 그는 노예생활로부터 민족을 구하기는커녕 두 눈이 뽑혀 맷돌을 갈면서 스스로 노예 중 노예로 전락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삼손을 세상이 감당치 못할사람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연약함과 실수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이룬 결과였다.


  하지만 전성기 할리우드의 영화는 전래동화도 주일학교 공과교재도 아니다. ‘힘센 삼손이나 나실인 삼손대신 <삼손과 데릴라> 라는 제목을 택한 이상, 영화는 제목에 합당한 영예와 비중을 우리의 여주인공에게도 할애해야 했다. <삼손과 데릴라>는 새로운 인물을 삽입하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재창조하고 내러티브의 강조점을 이동하는 일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악녀의 표본이었던 데릴라(헤디 라머 분)는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인 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사사기의 데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이 각기 은 천 백씩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 삼손을 팔아넘긴 하수인에 불과하지만, <삼손과 데릴라>의 데릴라는 방백들에게 먼저 거래를 제안하는 적극성과 대담함을 보인다. 영화에서 삼손이 결혼한 사마다(안젤라 랜즈버리 분)의 여동생인 데릴라는 삼손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는다. 사마다를 좋아했던 블레셋 사령관 아투어(조지 샌더스 분)를 부추겨 사마다를 통해 삼손이 낸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도록 한 것도 데릴라였고, 블레셋 방백들의 우두머리 사란(헨리 윌콕슨 분)의 애첩이 되어 삼손을 붙잡는 데 기여한 것도 데릴라의 선택과 지략에 의한 것이었다. 삼손을 둘러싼 사사기의 여러 에피소드들은 이처럼 데릴라를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있다.


  데릴라가 삼손을 블레셋 군인들에게 넘기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삼각관계와 질투로 설정한 것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소렉지방에서 삼손이 데릴라와 머물 때, 삼손을 어려서부터 연모했던 미리암과 소년 사울이 찾아와 삼손 부모와 백성들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리자, 데릴라는 미리암에게 강한 질투심을 드러낸다. “사자가 양이 되어삼손이 머리털을 깎이는 영화의 절정은 삼손이 미리암을 따라 자기 백성에게 가려하자, 데릴라가 그를 막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데릴라는 미리암에게 말한다. “넌 삼손을 신처럼 숭배하지. 난 한 남자로서 그를 사랑해. 신에게 저항할 순 없지만 너 같은 여자한테 삼손을 빼앗길 순 없어!”


  흥미로운 것은 이런 데릴라에게 드밀이 회개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에서 여인의 집요한 욕망이 정당성(또는 공감)을 얻으려면 악녀는 잘못을 뉘우쳐야 했다. 눈을 뽑힌 삼손에 대한 죄책감과 연민으로 괴로워하던 데릴라는 삼손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자신이 삼손의 눈이 되어 블레셋을 상대로 한 그의 마지막 싸움을 돕고 함께 최후를 맞기로 결심한다. 두 눈을 찍히고서야 비로소 영의 눈을 뜨게 된, 결점 많은 우리의 장사 삼손은 이렇게 해서 변화된 여인의 아름다운 눈을 새로운 무기로 장착하고 다곤 신전을 무너뜨린다.




  마치 이 이야기가 '요부'의 실패한 복수극과 영웅의 참회로만 마무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듯이, 영화는 에필로그에 다시 순박한 미리암과 소년 사울을 등장시킨다. 그들의 짧은 대화를 통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삼손의 죽음과 그 역사적 의미가 부연되면서 삼손 이야기는 잠시 신화의 지위로 복귀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영화 개봉 후 67년이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우리는 그것이 성과 속, 명분과 욕망을 다루는 그 시절 할리우드, 특히 이 세계의 대부였던 세실 B. 드밀의 뛰어난 통치전략중 하나였음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실상은 그 명분이라는 것마저도 정치적으로 그다지 순수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삼손과 데릴라>는 약3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파라마운트에 2880만 달러 이상을 벌어다 주었다. 미국 내 극장 개봉 수익만 1천만 달러 이상으로, 이 영화는 그해 할리우의 가장 큰 흥행작이자 성경영화 전체로도 손에 꼽히는 수익을 올린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아돌프 주커가 옳았다. 파라마운트는 드밀에게 무릎 꿇고 감사를 전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영토를 허락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못지않게 공손하게.  


최은 | 영화를 매개로 한 크고 작은 만남들과 글쓰기의 기회들에 감사한다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하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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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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