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영화 <굿바이 싱글> 읽기 : 가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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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에는 탈이라 불리는 가면이 있다. 다양한 얼굴 모양과 표정을 가진 탈은 보는 자에게 기쁨과 두려움을 선사하지만 때로는 슬픈 사연을 전하기도 한다. 가면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원래 기능은 표현이다. 종교적으로는 각종 제의에서 신을 표현하고, 예능적인 면에서는 다양한 캐릭터를 표현한다. 가면은 오직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일로 인간이 실제와 다른 존재, 곧 초월적 대상이나 다른 인간 혹은 동물 등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존재의 변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할 필요에 따른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존재이고 싶은 마음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가면은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데, 필요가 사라지면 가면을 벗고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가면을 아예 자기 자신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가면에 비친 이미지가 실제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혹은 자신을 감출 필요를 위해서도 그렇다. 실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때 가면은 대단히 유용하다. 이럴 때 가면에는 자신의 소원과 바람이 투영된다.

한편, “복면가왕이란 음악프로그램은 기존에 알려진 이미지가 아니라 오직 음악만을 통해 실력을 평가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복면을 쓰고 노래를 부르며 평가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가면 뒤의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맞히는 일이 더 흥미진진하게 여겨질 정도로 처음의 의도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이 프로에서 사용되는 가면은 캐릭터를 표현하거나 자신을 감추기 위한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보는 자의 이중성을 폭로한다. 그동안 가수의 실력을 음악이 아닌 이미지로만 평가했던 모습들을 드러내면서 또한 복면 뒤에 감춰진 가수의 진짜 실력을 가려낸다. 여기서 복면은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방편이다.


 

2.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다양한 이유에서 가면을 쓰고 산다. 특히 생얼 혹은 민낯을 보여줄 이유가 없는 사람 앞에선 대체로 가면을 쓴다.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신분과 지위라는 이름으로 혹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쓴다. 가면이라는 것이 보기에 따라선 사회적 인격이라 말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인격이라는 의미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가면 뒤의 사람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가면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사람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일 뿐이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은 철저히 가면 뒤로 숨긴다. 가면이 많다면 그만큼 많은 관계를 갖고 산다는 것이고, 가면이 적다면 관계의 폭이 그만큼 좁은 것이다. 여기에 사회적인 인지도가 변수로 작용하면, 가면은 그야말로 철의 장막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렇게 되면 대중의 우상이 된다. 그래서 대중이 만족할 수 있기 위해 보여주고 싶은 것 이외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한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는데, 만일 인기 연예인이라면 소속사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를 받는다. 실제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실제를 알게 되면 가면의 의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대중 앞에서 상처로 가득한 얼굴이나 혹은 얼굴 없이 나서는 겪이다. 연예인은 어떤 가면을 착용하느냐에 따라 인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가면은 사회적 인격이 된다. 사회적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인격이다. 인기 연예인, 특히 여성인 경우엔 가면 자체가 캐릭터이기 때문에 가면을 관리하는 것이 인기를 관리하는 것이다.

 

가면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가면은 이미지다. 자신의 이미지 가운데 사회적으로나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미지가 가면이 된다. 자신에게 불리한 이미지를 가면으로 착용하는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정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면은 대중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여겨지는 이미지를 선택하거나 혹은 대중에 의해 투사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서 굳어진다. 가면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기대하기 쉽지 않다. 사실 가족 사이에서도 가면을 쓰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전혀 알지 못하고 지내다고 어떤 계기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가면을 쓰고 사는 존재다.

 

가면을 쓰고 살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가면을 벗어야 할 때가 있다. 친밀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되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고 지내다가 어떤 순간에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감춰져 있다고 보아도 좋다.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자기 자신에게까지 감춰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가면 속에 숨어 살다보니 가면을 자신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본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모를 정도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가면 뒤에 감추고 산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 위해 사람들은 철학에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혹은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자신을 숨기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해당한다면, 자신의 본 모습을 찾는 일 역시 인간으로 사는 일에서 본질적인 과제에 해당한다. 철학자는 철학적인 성찰과 논쟁을 통해 고군분투하고, 종교는 종교적인 수양을 통해 자신의 진면목에 이르려고 애쓴다. 기껏해야 타자를 통해 나를 보는 방식을 발견했을 뿐이다. 과연 그렇게 해서 나의 진실을 알 수 있을까? 타자를 보는 방식 역시 나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니 결국 나 자신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나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면, 아마도 철학과 종교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철학과 종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 궁극적인 대답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철학과 종교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유는 그만큼 인간이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인간은 죽은 후에나 자신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면은 죽음과 함께 벗겨진다. 죽음은 가면을 벗는 일이다. 그러니 자신의 진면목을 아는 일은 죽음 이후에나 가능하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죽은 후에도 생명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기독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코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예컨대, 요한일서 32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그러나 이어지는 말에서 기독교는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비로소 나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나를 아는 기회가 전혀 없지 않고, 또 죽음 이후로 무한정 미뤄지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종말을 말하면서 소위 현실에서 이뤄지는 종말경험을 말하기 때문이다.

 

종말은 세상의 마지막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구세주와 심판자로 나타나시는 때이다. 이에 비해 종말경험이란 비록 세상의 마지막 때는 아니지만, 마치 마지막인 것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다.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종말경험을 하게 되며, 그 순간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때에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을 때 베드로에게 있었던 경험이나 사도 바울의 회심 경험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경험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기 때문에 이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진면목을 발견하든가 아니면 고집스럽게 가면 뒤에 머물러 있게 된다. 제대로 반응하면,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회개한다면, 자신의 진실을 알 수 있고, 이에 비해 여전히 가면을 쓰고 하나님 앞에 나서길 원한다면, 진실은커녕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을 맞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진실이 드러나려고 하는 순간에 제대로 반응한다는 말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가면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진실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세워놓는 것이다.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면 또 다른 가면이 필요하겠고, 그래서 자신의 진면목을 볼 기회를 놓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으려 하고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보길 원한다면, 가면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얼이든 민낯이든 그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 앞에선 모든 것이 다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벌거숭이 임금님 이야기처럼 오직 자신만이 가면이 벗기어져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3.

[글의 전개를 위해 영화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굿바이 싱글>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인기 여배우의 가면과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여중생 임신과 인기 여배우의 싱글 탈출기를 씨실과 날실로 삼아 엮어졌다. 다시 말해서 인기 여배우 고주연(김혜수)이 가족에 대한 열망을 풀어나가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해프닝으로 구성된 이야기다. 엄마와 아빠를 모두 잃고 외롭게 살아가면서도 여배우로서 성공한 삶을 살지만, 남자와의 관계는 늘 실패다. 연예계에서 철없는 사람으로 소문날 정도로 천방지축 좌충우돌의 삶의 연속이다. 소속사는 연일 이어지는 그녀의 사고를 뒷수습하기에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연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떠나면서, 주연은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인기가 시들해질 조짐이 보이자 소속사가 재빠르게 다른 여배우를 물색하는 것을 보고는 결국엔 모두가 떠날 것을 염려한다. 이런 암울한 미래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주연은 적어도 가족은 영원히 자신의 편으로 남을 것이란 기대 하에 가족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입양을 하려고 했지만 자격은 안 되고, 설상가상으로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조기 폐경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 때 주연은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우연히 임신한 중학생 다빈(김현수)이 인공중절수술을 받으려는 것을 듣게 되고, 소속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그녀와 합의를 이끌어 낸다. 아이를 낳으면 자신이 입양하겠다는 조건으로 다빈은 몸을 풀 때까지 주연의 집에 머문다.

비록 가짜이지만 주연의 임신 소식은 예상외로 여론에 동조를 얻게 되고, 그동안 추락했던 인기는 급상승한다. 인기에 목말라 있었던 주연은 다빈과 뱃속의 아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인기와 관심만을 따라간다. 그러다 결국 생각지 못한 복병을 만나 모든 사실이 폭로되면서, 주연은 하루아침에 모든 인기와 명예와 재산을 잃게 되고, 소속사도 해체되는, 그야말로 배우 인생으로서 종말을 경험한다.

모든 것을 잃은 주연은 다빈의 소지품을 정리하면서 다빈이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노트를 보게 되는데, 그동안 자신이 다빈과 아기에게 무심했던 사실을 깊이 반성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소속사가 애써 마련한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장으로 가기보다 먼저 다빈에게 달려간다. 마지막 순간을 경험하면서 주연은 인기로 포장된 새로운 가면보다 진실을 선택한 것이다.

 

김혜수의 연기가 돋보이고, 임신한 여중생으로 나오는 김현수의 연기도 뛰어나게 발휘된 작품이다. 가족의 관점에서 본다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을 구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가족의 탄생>(2006)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 과정은 <과속스캔들>(2008)과 유사하다. <과속스캔들>은 인기 방송 연예인이 자신의 아이라고 데리고 온 여자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해프닝을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결국엔 인기와 진실의 갈등 상황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진실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다. 조금 다르다면 여중생 임신이라는 설정이다.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미지가 영화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가족의 탄생>에서처럼 이질적인 구성원으로 형성되는 가족이라는 측면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주연이 마지막 순간까지 인기에 연연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상실하는 순간을 맞이하면서 진실을 선택할 것인지에 관해 초점을 맞추어 끌고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길게 쓴 글이 서두에 나오게 된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종말 경험을 한다. 이 순간을 모든 것을 잃는다는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나 자신을 보다 정확히 바라볼 기회로 삼는 것이 지혜다. 잃는 것은 다만 그동안 착용하고 다녔던 가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면을 모두 벗어버리고 진실을 대면하며 살 기회로 삼을 때, 우리의 삶은 비록 가면을 쓰고 사는 것보다 힘겹게 느껴지긴 해도 더욱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종말경험은 하나님의 나타나시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놓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마지막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기회로 삼는다면, 다시 말해 다만 새로운 가면으로 바꿀 기회로만 삼는다면, 결코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나 자신이 없는 부와 명예와 권세와 인기는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천하의 모든 것을 얻고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최성수 박사가 본 <굿바이 싱글>은?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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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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