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허드슨 감독의 <불의 전차>와 관련해서 먼저 주목할 몇 가지가 있다. 1981년에 영국에서 처음 개봉되었고, 국내에선 영화관보다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게 되었는데, 1986년(KBS), 1995년(SBS), 그리고 대구육상선수권대회를 계기로 2011년(KBS)에 방영되었다. 극장 개봉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카데미 4개 부문(작품, 음악, 의상, 각본)에서 수상을 했는데, 비록 영화는 몰라도 주제 음악은 익숙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많다. 영국 영화협회가 선정한 100대 영화 중 12위를 차지할 정도로 영국인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실화에 근거했더라도 극적 효과를 위해 사실의 일부를 바꾸어 연출해 엄밀히 말해서 팩션(faction)이다. 비록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은 되었지만, 이런 영화가 그동안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영국과 영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 영화는 1924년 파리 하계올림픽을 배경으로 한다. 영국은 육상 종목 100m와 400m 부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영예의 두 주인공인 해럴드 에이브럼스(벤 크로스)와 에릭 리델(이안 찰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에이브럼스를 추억하면서 시작하는데 두 명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새로운 기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포츠 영웅들에게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휴 허드슨 감독이 두 선수들을 특별히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과 영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로 여겨진 까닭과 겹쳐진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영화를 이해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영국 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한 두 선수에게는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두 선수 모두 순수 영국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생인 에이브럼스는 유대인으로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부친 밑에서 자라면서 온갖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다. 에릭 리델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선교사였다. 두 사람 모두 자기 나라의 이름을 걸지 못하고 영국 국적의 대표선수로 뛰었는데, 특히 리델의 마음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심정과 비슷할 거란 생각을 한다. 영화는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여동생의 반대를 통해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영국인으로서는 영국의 영광을 위해 뛴 두 사람의 모습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2012년 영국올림픽에서 영화의 주제곡이 연주된 것도 과거의 영광을 되새겨보자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올림픽 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했고, 마침내 파리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달리기에는 나름대로 동기가 있었다. 에이브럼스는 어려서부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는 치열한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오직 실력으로 유대인의 우월함을 나타내 보이고 싶었다. 이를 위해 그는 달렸고, 기록을 내었고, 승리를 위해 발버둥 쳤다. 학교 규정상 전문가에 의한 개인교습이 아마추어 학생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 하지 않고 실력 향상을 위해 개인코치를 고용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100m 경주에서 에릭 리델에게 패배한 이후 그의 승리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졌는데, 연습을 위해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까지 단절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로서 에릭 리델은 자국의 국기가 아닌 영국 국기를 달고 출전하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특히 여동생의 반대에 부딪혀 올림픽 출전과 관련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그러나 달리기 역시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고, 달리기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올림픽 출전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100m 경주에서 올림픽 대표로 참가한다.
같은 종목의 대표선수로 발탁된 리델과 에이브럼스는 경쟁자로 참가하게 되었다. 리델보다는 에이브럼스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일전에 리델에게 진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리델은 100m 경기 일정이 주일에 잡힌 것을 뒤늦게 알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데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리델에겐 치명적인 일정이었다. 영국 황태자와 올림픽위원장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리델은 신앙을 이유로 100m 경기를 포기할 결심을 한다. 하나님을 위해 달리기로 한 것인데, 달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게 되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연습한 것들이 수포가 되고, 또 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영국과 영국인들을 크게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리델의 확고한 결정에 모두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이미 200m 경주에서 입상한 영국인 친구가 400m 경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에릭이 달릴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리델은 100m가 아닌 400m 경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수상했다. 100m 경기에서 리델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던 에이브럼스 역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영국으로선 두 분야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게 한 기회가 된 것이다.
휴 허드슨 감독은 기억 속에 들어있는 스포츠 기록을 통해 두 젊은 영웅에게서 신념의 힘을 보았던 것 같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표현하였다. 영화 제작과 개봉은 영국으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일로 여겨졌는데, 왜냐하면 과거 화려했던 영국의 정신을 회상하는 데에 충분히 기여했기 때문이다. 에이브럼스에게는 소수민족으로서 받는 차별에 맞서기 위한 한 방식으로 달리기가 의미가 있었지만, 휴 허드슨 감독은 그를 믿음을 위해 달렸던 리델과 대조적인 캐릭터로 조명하였다. 결국 관객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또 우월성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신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되,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 비교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으나,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신념보다는 믿음의 힘이 더욱 크다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이브럼스와 리델 사이에 금메달을 놓고 큰 경쟁이 있을 수 있었지만, 에릭 리델의 결단으로 오히려 금메달을 하나 더 따는 영예를 얻은 사실을 볼 때, 신앙적 결단이 비록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고 또 사람들에 의해 이해되지는 못한다 해도, 마침내 선한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말씀이 진리로 입증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롬8:28)
이전에 텔레비전에서만 방영되었던 영화가 이번에 극장에서 처음 개봉하게 된 것은 CBS의 노력에 따른 것이었는데, 이 영화를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조명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에릭 리델의 결단을 우리는 믿음으로 보지만, 올림픽 출전과 관련한 그의 결정을 사람들은 신념으로 이해하고, 휴 허드슨 감독 역시 신념으로 이해하고 영화를 만들었던 것 같다. 신념은 어떤 생각이나 사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강한 의지를 말한다. 감각적인 확신을 넘어, 가치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심리적인 반응이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를 포함한다. 가치에 대한 확신은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의지가 없다면 그것은 단지 생각일 뿐 신념이라 말하지 않는다. 생각은 많아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 하지 않으면 신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천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신념에는 폭발적인 힘이 있어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세상의 많은 영웅들은 역사가 간직하기를 원하는 생각들을 행동과 삶으로 구현한 사람들로서 신념으로 가득했다.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운 수많은 영웅들을 다룬 영화들이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만 언급한다면, 미국 FBI에 체포되었으나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의 포로 교환을 다룬 <스파이 브릿지>나 북아일랜드의 통일을 원하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옥중에서 죄수복과 샤워를 거부하다 마침내 단식투쟁을 벌이다 사망했던 바비 샌즈의 옥중 투쟁을 다룬 <헝거>,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대한 신념을 위해 시의원으로 활동하다 살해당한 하비 밀크의 삶을 다룬 <밀크> 등이 있다. 국내 영화로는 미전향 장기수들의 문제를 다룬 <송환>을 들 수 있겠다.
이에 비해 믿음은 세상에선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지만, 믿음 역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크게 장식할 수 있으며, 세상의 영웅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은 일을 이룰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어떤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이유로 믿음을 제시하고 있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면서 겪는 일 때문에 종종 신념으로 작용한다. 기독교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현실로 옮기려는 의지로 표현된다는 말이다. 믿는 자들이 볼 때는 믿음에 따른 행위이고 실천에 옮기는 믿음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는 신념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이다. 영화 <셀마>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감행한 그의 행동은 목사로서 기독교 신앙을 표현한 일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인간은 인종과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신념에 근거한 인권운동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최근에 개봉된 기독교 영화 <신을 믿습니까>와 <신은 죽지 않았다 1,2>는 믿음이 세상의 도전을 만날 때 어떻게 신념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신념의 기원이 기독교 믿음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정의와 평등과 인권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에 대한 신념이 대표적인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신앙이 세상에서 신념의 형태를 띤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의 전차>는 신념에 관한 영화다. 영웅이 되기까지 신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에릭 리델을 통해서는 믿음이 세상과 만날 때 어떻게 신념으로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한 의지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기독교적인 신념이 영화에서처럼 항상 보기에 좋은 결과로만 이어지진 않아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건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적인 신념은 결코 현실의 결과에 좌우되지 않고 미래의 소망으로도 표현된다. 왜냐하면 신념으로 표현된 믿음은 속성상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에이브럼스의 신념과 리델의 신념은 겉으로는 같은 모습일지 몰라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볼 때,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보여주는 뜨거운 믿음이 세상에서 제 역할을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적인 가치로 토착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교회와 신학의 문제이다. 목회자와 신학자는 믿음이 어떻게 삶의 가치로 작용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주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삶이 오히려 현실에서 욕을 먹는 이유는 신앙을 삶의 가치로 전환하지 않고서 민낯 그대로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만 소통되는 언어의 의미로 세상에서 관철시키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당연한 결과다. 세상이 교회가 되고 하나님 나라로 바뀐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여전히 종교적으로 혹은 다양한 가치관으로 중첩된 구조에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독교 믿음은 삶의 가치로 구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록 믿음과 신념을 동일시할 순 없다 해도, 기독교인들이 신념을 갖고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은 분리되어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고, 혹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기독교에서는 이 영화가 주로 성수 주일의 중요성과 관련해서 이해되는 것 같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에릭 리델의 신앙적 결단 때문에 에이브럼스에게도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삶에서 주일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있는 현실에서 주일 성수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1924년대의 상황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당시의 신앙형태를 오늘에도 당연시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주일성수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던 주일 관행과 오늘날의 주일 관행을 비교하면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것 같다.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성과사회에서 비롯하는 현대인의 피로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안식일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성과사회가 필연적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는 피로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쉼을 강조한 것인데, 이로써 한병철은 안식일 신앙을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안식의 가치로 환원하여 새롭게 부각시켰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 정신이지 안식일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듯이, 주일 성수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최성수 |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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