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검은 사제들>를 보고 - 종교, 합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변증법



반응형


종교합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변증법

<검은 사제들>

(장재현, 드라마, 15, 2015)


최 성 수

 

장재현 감독은 영화 <버스>로 8서울국제사랑영화제 단편 코이노니아 부문 관객상 수상을 하면서 기독교계에 이름을 알렸다. 아들의 희생과 버스 승객의 구원 사이에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 깊은 인상을 준 영화였다. <검은 사제들>2014년 작품 <12번째 보조사제>라는 26분 분량의 단편영화를 기반으로 만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데뷔작이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연출력을 엿볼 수 있다.

<검은 사제들>은 한국에서 엑소시즘을 다룬 영화로서는 단연 최고로 꼽힐 것이며, 서구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기독교적인 엑소시즘이라는 소재가 한국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영화다. 즉 토속종교의 엑소시즘이 아니라 기독교 관련 엑소시즘이라 해도 한국에서 충분히 제작 가능하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교통사고로 정신이상이 된 한 소녀(박소담 분)가 있. 이런 그녀를 보는 시각은 둘로 나뉘었다. 부모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한 사고 후유증으로 보았지만, 김 신부(김윤석 분)는 그녀에게서 악령의 기운을 느낀다. 게다가 그녀는 과거 자기 교구에 속한 신도였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김 신부는 그녀에 대한 목회적 책임감을 갖고 구마(악령을 쫓는) 의식의 필요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주교는 그동안 힘겹게 쌓아올린 합리적인 교회 이미지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을 염려해 공식적인 승인을 거부한다. 결국 비공식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녀가 병원에서 자살을 기도해 코마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합리적인 사고와 영적인 사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시각과 관련해서 누가 더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쉽게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코마상태에 빠진 사람에 대해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었기에 교회 관계자는 김 신부의 구마의식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 신부는 자신을 도울 수도사를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된다. 구마 경험에 지쳐 모두가 중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김 신부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까지 돌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 신부는 신학대학 학장에게 자신을 도울 부제를 요청한다. 그래서 12번째 보조로 선출된 사람은 최 부제(강동원 분). 소문에 따르면 성추행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도 있어, 최 부제는 학장에게서 김 신부의 구마의식을 도울 뿐만 아니라 그를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들의 엑소시즘은 영화의 절정을 이루는데, 결국 영화는 소녀에게 일어난 일이 합리적인 시각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현상임을 확인하며 마친다.




<검은 사제들>은 마태복음 8장의 귀신들린 자에 대한 이야기를 참조하고 있다.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쫓겨난 귀신은 사람의 몸에서 나와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구하고 귀신은 새로운 숙주로 삼은 돼지로 하여금 언덕 아래로 돌진하게 해 물에 빠져 죽게 하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구마의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은 영화 <엑소시스트>의 실제 주인공 아넬리스 미셸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연상케 한다. 그녀는 당시 가혹한 구마의식을 받는 가운데 사망했기 때문에 구마 의식을 행한 신부는 검찰에 의해 구속이 되었지만,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악령의 현상으로 규정했다.

 

영화는 특히 가톨릭교회의 구마 의식을 다루고 있다. 무속의 세계관을 미신으로 간주하는 개신교에서 축사(귀신을 쫓는 행위)는 개인 신앙적인 관심과 소명에 따라 이뤄지는 일이지만,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구마 의식을 인정하고 있다. 구마 의식을 훈련하는 교육기관도 있을 정도다. 가톨릭의 구마 의식과 달리 개신교의 엑소시즘은 제도적인 뒷받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체로 기도원이나 비공식적으로 혹은 사이비 단체에서 주로 이뤄진다. 개신교의 엑소시즘이 왠지 사이비 같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사실 이런 구마의식이 개신교에게 낯선 이유가 전혀 없진 않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는 인간이해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맛을 충분히 느끼면서 감상하기 위해선 신학적인 인간 이해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인간학적인 이해의 차이는 교회의 역사에서 크게 두 개의 흐름을 각인해왔다. 두 개의 흐름과 상호 갈등은 다분히 인간학적인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영과 육의 분리를 믿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영과 육은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통합체로 보는 입장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영적인 측면에 민감해질 가능성이 높다. 영혼의 독립된 활동을 믿기 때문이다. 소위 영적인 감각과 영성을 강조하며 가톨릭교회가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일부 소수 개신교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이에 비해 영육의 통합체로 인간을 이해하는 입장에선 영과 육의 통합체로서 영혼의 작용은 인정해도, 육과 분리된 영혼의 독립된 활동을 믿진 않기 때문에 대체로 합리적인 방식으로 생각한다. 개신교 신학에서 현재 다수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다. 영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두 흐름은 마치 물과 기름 같아서 종종 서로 교차하면서도 결코 서로 섞이는 법이 없다. 무엇이 옳으냐를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성경은 두 개의 전통을 함께 지니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극단적인 길을 가지 않는 것이며, 또한 경우에 따라선 서로를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보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면서 또한 인간으로서 속성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검은 사제들>은 가톨릭의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인간 이해에 있어서 영혼불멸과 사후 영과 육의 분리를 신앙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가톨릭에서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고 영혼을 가진 존재다. 이에 비해 개신교 신학의 다수는 영과 육의 통합체를 주장한다. 영과 육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라는 통합체로 존재하며, 죽음과 함께 죽고, 또한 부활의 때가 되면 영과 육이 함께 부활한다. 곧 몸의 부활이 이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더욱 영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개신교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수많은 수호천사들에 대한 믿음을 가톨릭은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더욱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도의 투명성과 현실 문제를 영적인 방식이 아닌 현실 정치의 역학 관계에서 이해하기 때문은 아닐까?

 

관건은 인간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귀신들림의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성경학자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귀신들림과 축사에 관한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본문으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방점을 두고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떤가? 오늘날에도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한 귀신들림 현상은 있을까?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귀신들림을 대체로 정신이상으로 본다. 뇌 기능에 문제가 생김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귀신들림의 현상을 배제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컨대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이상과 귀신들림의 관계를 다룬 김진은 정신이상을 섣불리 종교적인 판단에만 의지해서 대처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며 정신의학적인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고 제한한다. 합리적인 사고와 영적인 사고를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마음 영혼 뇌 신의 저자 말콤 지브스 역시 영혼의 기능을 뇌의 기능으로 축소하거나 환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과거 독일 루터교 목사인 블룸하르트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계몽주의의 합리성이 지배하던 시기에 축사에 대한 증거를 기록으로 남겼고, 당시 루터교 정통주의에 의해 배척받았지만, 이에 결코 굴하지 않고 스위스 시골마을로 옮겨 사역을 계속 하였다. 블룸하르트 부자는 이런 현상을 예수는 승리자에 대한 증거로 삼았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1판과 2판 사이에 이뤄진 결정적인 전환에 블룸하르트 부자와의 만남이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귀신들림과 축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자임을 증거 하는 사건은 아닐까? 합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제대로 균형을 잡을 때 건강한 기독교 영성이 형성된다.

 

끝으로 영화 안에서 다소 의문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필자가 주목한 장면이 있다. 구마 의식이 카메라에 의해 방해받자 김 신부가 카메라를 제거하는 장면이다. 곧 최 부제가 학장의 지시에 따라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김 신부의 구마의식을 카메라로 녹화하려 했을 때 의식 자체가 방해받는다는 것을 느낀 김 신부는 카메라를 제거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의식은 속행할 수 있었다이것은 카메라가 세상을 보는 하나의 지각 방식을 의미하는 것과 관련한다. 카메라는 보는 자의 시각을 대변한다. 카메라는 사실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보는 자의 관점에서 구성되는 사실을 구성한다. 이 장면은 영적인 사건을 특정한 지각 방식으로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한 감독의 거부반응을 표현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일까?

 

사실 사회에는 언제나 비합리적인 요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소통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영적인 것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소통되길 원한다. 만일 그것이 존재하고 또 실제로 작용해서 최소한 믿기 위해서라도 이해되길 원한다면, 어떤 소통 방식을 선호할까? 영화에서 보듯이, 영적인 현상은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를 거부할까? 다시 말해서 영적인 것은 소통 방식으로 오직 경험한 자의 증언만을 선호할까부활의 주님을 만난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을 때, 자신을 만지기를 금했고, 의심이 많은 도마에겐 직접 보고 만지게 하셨음에도 보고 믿는 것보다 듣고 믿는 것을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부활 후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거 하는 자의 말을 믿지 않은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시고, 그 후 제자들을 부활을 증거 하는 자로 세상에 파송하셨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부활 후 경험되는 영적인 현상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곧 감각적인 직접 증거보다는 전하는 자의 말을 믿고 또 그것을 전하는 것이 감각적으로 보고 만지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영적인 것은 직접 보고 듣는 것보다 특별한 선택에 따라 경험한 사람들이 전하는 행위를 매개로 소통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의 가능성은 바로 성령의 역사에서 발견한다. 성령은 성도들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소통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더 이상 육체로서 세상에 계시지 않는 시대에서 성도들은 오직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다. 그러므로 증거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듣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단지 말의 의미를 소통하며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증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난다. 예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은,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주로 증거를 통해 소통된다. 이것은 왜 우리가 끊임없이 증거를 듣고 또 증거자로서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화선교연구원 소식 보기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 

반응형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