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온리 유>를 보고 - 사랑할 때 왜 운명을 기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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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왜 운명을 기대할

<온리 유>

(장호로맨스/멜로, 15, 2015)



최성수




 

장호 감독의 <온리 유>는 스토리 라인에서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삼은 것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노만 쥬이슨 감독의 1994년 작품 <온리 유>를 리메이킹했다고 볼 수 있다. 탕웨이가 출연한 영화는 단체여행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드 무비에 가까운 로맨스이며 가을의 정서에 잘 어울린다. 특히 스쳐가는 사랑과 운명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리를 잘 표현해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마음에 더 가깝게 다가갈 것으로 예상된다. <만추>(김태용, 2011)에서 보여준 가을의 여성 탕웨이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을이 남성의 계절인 이유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더욱 빛나기 때문일까 의심이 들 정도다.

 

모든 여성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결혼을 화두로 이야기할 때 운명의 힘을 말하는 경우는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많다. 남성이 운명을 말한다면, 첫 눈에 반했다는 정도라고 할까. ‘운명인 것 같다는 말로 남성은 여성을 향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한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꿈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남자의 말을 듣고 결혼을 했다. 참 순진한 사람이었는데, 물론 그렇게 말한 남자에게서 끌리는 것이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운명적인 사랑을 지금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그 남자를 사기꾼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요즘 개그 프로그램의 한 코너는 결혼 전과 결혼 후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다분히 남성의 변신과 변심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개그의 소재가 될 정도로 결혼 전에 들었던 운명에 대한 기대와 결혼 후 경험하는 운명의 현실이 많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이에 비해 여성이 사랑과 결혼의 문제에서 운명을 말할 때는 단지 호감의 수준만은 아닌 것 같다. 여성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운명을 말하는 여성이 없진 않아도, 그것만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여성에게는 있다. 결혼 전임에도 불구하고 운명이라고 여겨지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난 평유안의 이야기를 계기로 여성이 사랑과 결혼에서 운명을 말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이후 스포일러 있음)

 



수의사인 평유안은 어려서 두 번에 걸쳐 다른 곳에서 결혼 점을 보았는데, 두 점괘에서 모두 손쿤밍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약혼자는 치과의사로서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지만 평유안의 마음은 여전히 운명의 남자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중에 우연히 남편의 친구라며 전화를 한 사람이 손쿤밍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고, 그가 이탈리아로 출장을 떠난다는 말을 듣는다. 결혼 전 예기치 않게 모습을 드러낸 전화 속 손쿤밍을 평유안은 운명의 남자로 여기며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평유안은 자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손쿤밍으로 소개한 평달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그가 손쿤밍이 아님을 알고는 크게 실망한다. 그럼에도 평유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평달리는 계속해서 평유안 주위를 서성거리며 평유안의 마음을 얻을 기회를 찾는다. 평유안과 평달리 사이에는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이름인지 아니면 사랑의 감정인지를 두고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평달리는 사랑의 감정을 중시하지만, 평유안은 이름을 더 중시한다. 이후 영화 이야기는 진짜 손쿤밍을 찾는 과정으로 운명의 남자를 찾기 위한 여행을 생각하면 된다.

 

일상 언어에서 사용되는 운명이란 말은 필연성을 함의한다. 운명적이라 함은 필연적이라는 말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필연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운명적이라고 믿었던 만남이 깨지고, 그렇지 않은 만남이 평생 이어지는 사례가 더 많기 때문이다. 운명적인 필연이란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내적인 확신을 가리킨다. 또한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질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늘이 서로 맺어준 사이라는 말로 서로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도록 할 뿐이다. 비록 결혼 생활에서 실망을 겪는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운명이란 복잡다단하게 전개되는 결혼 생활을 후회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택 과정에서 겪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운명을 믿고 따르는 여성이 없지 않다. 자신의 선택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점을 치고 궁합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다. 운명을 선택한 경우엔 큰 고민이 불필요하다. 그저 잘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에서 운명을 유독 여성에게서 많이 듣는 이유 가운데는 사회적인 요인이 없지 않다. 사랑과 결혼의 문제에서 주체적인 선택이 제한되어 있는 환경을 말한다. 사실 한 번의 선택으로 평생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것은 자연스럽다. 게다가 선택에서 부모의 결정이 더 크게 좌우하는 경우는 운명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교적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과 결정이 보장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선 과거에 자주 들었던 운명이라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온리 유>가 다소 복고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운명을 말할 정도로 그렇게 여성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결혼에서 여성은 심리적으로 남성보다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현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고민을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운명의 실현을 기다리는 경우가 남성보단 여성에게서 더 많다.

 

여성들이 사랑과 결혼에서 운명을 말할 땐 헌신과 희생을 각오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여성은 대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을 파트너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또 자신과 관계를 갖는 사람을 보호하는 일에서 매우 강한 의지를 보인다. 운명을 말하는 것은 이런 상호관계에서 자신이 기꺼이 헌신할 수 있고 심지어 희생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서 조건보다 상대의 조건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우선하는 여성 특유의 모습을 언어 관행에서 엿볼 수 있다.

 

운명은 다분히 민간종교의 한 형태다. 운명에 따른다는 말은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에서 운명을 말하는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을 종교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소위 하늘에 맺어준 사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운명이라는 말로 서로의 만남에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배타적인 관계의 정당성을 확신한다.

 

영화는 운명적인 남자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뜻밖의 남자에게서 진짜 운명의 남자를 만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만일 사랑과 결혼에서 운명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단서일 뿐이고, 또한 운명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녀가 주체적인 선택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라는 울림을 받는다. 사람은 운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은 만남의 실제적인 결실을 통해 비로소 확인되는 것임을 역설한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방식에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된다. 성경은 비록 운명이란 표현을 사용하진 않지만, 결혼을 말할 때 하나님이 짝지어주셨다고 한다.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맺어주셨듯이, 모든 결혼은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으로 고백한다. 성경이 이혼을 금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이혼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보다 자신의 결혼 경험을 더 우선시한다.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인내의 삶을 살기 보다는 자신이 기대하고 설계하는 삶의 의미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계명을 통해 이런 경향을 막아보려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선택과 결정을 강제로 막진 않으셨다. 하나님이 원래 무력하신 존재이기 때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은 스스로 약해지시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왜 그런지는 장차 분명하게 밝혀질 날이 올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사랑과 결혼에서 운명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행하셨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다. 누구를 선택하든, 결혼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짝 지어주셨음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파트너를 선택하려는 경향은 정해진 운명을 따르려는 평유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결코 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만남과 사랑의 수고로 결혼으로 결실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고백한다. 고백을 통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현실로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또한 그 때까지 인내하며 살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만날 것을 소망한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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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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