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케이:별에서 온 얼간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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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의미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

(라즈쿠마르 히라니, 코미디/드라마, 15, 2014)


최성수 (신학박사, 문학·영화평론가) 


기독교와 종교의 차이를 부각시킨 신학자는 칼 바르트이지만, 종교를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신학자는 폴 틸리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가 종교를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특정한 종교를 말하지 않아도 틸리히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 가능하다. 무엇보다 인간은 누구나 그것이 신이든 아니면 무엇이든 궁극적인 대상을 갖고 있고, 또 그것에 대해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과 관계하며 지내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정의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대개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왜 궁극적인 존재에 관심을 가질?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고, 또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심으로 인간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과 행위를 믿지 않으며 그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두고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의 현상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의 말씀과 행위가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혹자는 인간에게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 어느 곳엘 가도 종교가 없는 곳이 없다. 원시적인 형태로부터 소위 고등하다고 여겨지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것은 비록 인간이 아무리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 해도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을 막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기독교적으로 본다면 기독교 이외의 신앙을 갖는 일이 비록 안타깝긴 해도, 다양한 종교 현상은 그 자체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함을 알게 해준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궁극적인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다양한 설명이 있겠으나 야스퍼스의 말을 빌린다면, 한계상황 혹은 한계상황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죽음을 경험하면서 생명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생존의 위기 앞에서 능력의 한계를 경험했을 때, 급변하는 환경 때문에 삶의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그것이 충족되길 간절히 원할 때, 인간은 여지없이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종교는 결국 인간의 관심이 가시적인 것을 넘어 초월적인 존재를 지향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기독교가 종교와 다른 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비롯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인간의 죄성은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 제한되지 않고 인간의 욕망으로도 모습을 드러낸다. 초월적인 존재에 헌신하기보다 오히려 신을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사용한다. 초월적인 존재를 신앙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신앙을 이용한다.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이유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부족을 채우고, 한계를 극복하고,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나고 또 불안을 잠재우길 원할 때이다. 그러니 인간의 죄성은 바로 인간의 이런 연약한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종교는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신앙생활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일들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든다. 욕망을 채우는 일에 전력하게 한다.


문제의 핵심은 두 가지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죄성에 있다. 하나는 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설령 들어서 안다고 해도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믿는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들 듯이,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사람들이 모인다.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는 바로 이런 의미의 종교 현상을 제대로 꼬집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종교 박람회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도에서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종교의 폐단에 대한 자성의 움직임이 인도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어디 인도뿐이겠는가, 현재 종교의 폐단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영화 내용은 탐사 목적으로 지구에 온 어느 외계인의 이야기다. 피케이는 외계인의 고향 별 이름인데, 인도에서는 술 취한 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동음이의어다. 그래서 영화 부제는 별에서 온 얼간이. 그의 삶은 그야말로 예측을 불허할 정도이지만, 그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다. 지구인에게 탈취당한 자신의 목걸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을 되찾아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일이다. 피케이(아마르 칸 분)는 목걸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기도하면 찾을 수 있다는 말에 여러 종교단체를 찾아가 기도한다. 게다가 돈으로 정성을 바치면 가능하다는 말에 돈을 벌기 위해 일하기도 하고, 번 돈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또 헌금을 해도 목걸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때 그가 생각하고 또 발견한 점은 신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도를 신에게 전달하는 중개인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중개인은 일종의 교주나 사제, 성직자, 교역자 등에 해당한다. 영적으로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들은 설교를 하고 가르침을 전하고 필요하면 기적을 행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따르며, 또 그가 요구하는 대로 헌신한다. 중개인에게 잘못이 있어서 기도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피케이는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중개인의 다양한 잘못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 한다.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어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된 잘못된 중개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설교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중개인, 꾸며낸 기적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만 정작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적은 일으키지 않는 중개인, 카리스마적인 존재감을 나타내려 신에게서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처럼 꾸미는 중개인 등. 결국 중개인들의 숱한 잘못들을 발견함으로써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이 사람들의 불안과 염려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임을 알게 된다.



종교 천국인 인도에서 이런 영화에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 비판적인 내용임에도 인도 역사에서 역대 최고 흥행 수익을 올렸다는 사실은 그만큼 공감의 정도가 컸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주인공 아마르 칸의 연기와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세 얼간이><지상의 별처럼>으로 잘 알려진 인도의 국민 배우다.

 

<피케이>는 기독교에게도 매우 중요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성도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교역자 때문일까? 아니면 진정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일까? 자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함일까? 기도와 헌신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일까? 예수님은 자기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줄 잘 알고 계셨다. 자기에게 오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오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인간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심각한 문제를 보셨다.  먹을 것을 바라고, 병 고침을 바라고, 기적을 바라고 예수께로 모여든 것임을 잘 알고 계셨다.


교역자는 결코 예수님처럼 중개자가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중개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과 직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 병 고침을 받고 싶은 사람, 각종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교회로 오라고 초청한다. 정말 교회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가? 도대체 종교와 기독교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많은 경우 교회 선택의 기준은 대체로 교역자다. 교회의 사회학적인 속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해도 마치 교역자를 신인을 중개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큰 문제다.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것도 문제다. 성도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교역자 스스로 그렇게 처신하는 경우도 있다. 이단이 아니라면 누구도 스스로 중개자를 자처할 수 없지만 실제로 교회 생활에서 그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중세 가톨릭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교회 안팎으로 거센 비판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 교회 현실에서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다.


최성수 | 서강대 철학을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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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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