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빈의 문화칼럼]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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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이중직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책임윤리적 관점에서 -


1부 현실과 신학적 근거

임성빈(장신대 교수(기독교윤리학), 문화선교연구원장)



1. 목회자 이중직 현실과 변화하는 상황

목회자들이 다른 직업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택시기사를 하거나, 대리운전, 우유배달, 학원 강사, 웹 디자인 일을 통해 수입을 얻기도 한다.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유학생인 K목사는 평일에는 여행 가이드를 한다.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 평일에는 카페를 운영하고 주일에는 그곳에서 예배하고 설교를 하기도 한다그러나 법적으로 한국교회의 경우 대부분의 교단에서 목사의 이중직은 허용되지 않는다. 목회자가 목회 외에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목회자가 목회에만 헌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 법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많은 수의 목회자가 교단법의 금지조항에도 불구하고 주중에 다른 직업을 가지거나 혹은 시간제 직업을 가지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과 함께 목회자 이중직에 대한 인식도 급변하고 있다.목회와 신학2014년도 5월호 특집 <목회자의 이중직>에서 이러한 변화를 알 수 있다. 이 기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각주:1] 경제적인 이유로 목회자 이중직에 찬성한다는 비율이 52.4%로 반대한다는 22.9%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전반적으로는 73.9%가 생계를 위한 이중직에 찬성하였다.[각주:2]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전임 목회자의 이중직에 대해서는 53.4%무방하다’, 41.2%안된다, 파트 타임 목회자의 이중직에 대해서는 91.4%무방하다’, 6.4%안된다, 목회자의 사모가 경제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88.8%가 경제활동을 해도 무방하다7.9%만이 경제활동을 해서는 안된다로 응답하였다.

 출처 크로스로


이중직의 문제는 앞으로 더욱 큰 논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많다. 2000년대 초까지도 논의되지 않던 이중직의 문제는 이제 차세대 목회자의 50%가 생계를 위해 이중직을 가져야 하는 상황 가운데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예측된다. 목회자의 이중직 허용 요청이 상당 부분 개척교회 혹은 미자립 교회의 목회자들로부터 청원되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로부터의 요청도 상당히 많아질 것으로 예측된다. 교회의 신뢰도 하락에 따른 교세의 지속적 하락, 수요를 훨씬 초과하는 목회자의 배출은 목회자의 임지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교회들을 양산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 이중직을 소속 교단이 금지할 경우 다수의 신학생들이 이중직을 허용하고 있는 독립교단으로 옮겨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 목회자 이중직(bivocational ministry)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목회자로의 부르심은 목회로 일컬어지는 기독교 관련 전임사역으로의 부르심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중직은 기독교 관련 전임사역에 더해 이른바 세상의 일을 겸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목회자의 이중직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먼저 생계형이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로만 생활하기 어렵기에 불가피하게 또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경제문제와는 별도로 전도나 선교를 위해, 기존의 전문직 종사자가 신학교육을 받아 자비량으로 목회하는 경우 또한 기독교 관련 기관에서 근무하는 등 다양한 유형의 이중직 유형도 있다




  

3. 만인제사장설과 직업소명설

 

목회자의 이중직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만인제사장론과 이에 따른 직업소명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유일무이한 대제사장으로 유일회적 희생제물이 되셨으며 성전의 휘장은 찢어졌고 이로서 계층질서적 성직체계는 무너졌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설의 핵심이다.

 

만인제사장론의 성경적 근거는 베드로전서에 기반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여기서 너희는 그 서신을 받는 모든 교인들을 의미한다. 이어서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고 베드로는 말한다. 또한 요한 역시 자신의 서신을 받는 일곱 교회의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한다(1:6;5:10).

 

만일제사장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주장한 이는 루터이다. 그는 가톨릭의 계층질서적인 성직체계에 반대하여 만인제사장설(the priesthood of all people)을 주장했다. 이 만인 제사장론의 요점은 소극적으로는 기존 가톨릭의 성직체제를 부정하면서 적극적으로는 복음을 통해 성령으로 은혜와 신앙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사랑의 차원, 곧 성화의 차원까지 그 실천의 지경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인의 이웃사랑 내지는 성화의 차원을 강조함이 만인제사장론의 주요한 요지이다.[각주:3] 그러나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이 기존 성직우선주의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강조함에만 초점을 맞추어 오히려 소극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현실이다.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은 그의 주요 논문들에서 나타난다.

먼저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루터는 교회 주교들, 사제들 및 수도사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들, 영주들, 직공들 및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크리스챤은 모두 영적 계급에 속하며 직무상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각주:4] 루터는 모두 세례를 통해서 제사장으로 성별을 받으며,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세속적인 것사이에는 실제로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 우리는 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강조한다. , 그리스도께서 현세적인 것”, “영적인 것을 따로 따로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머리와 한 몸이 있을 뿐이다.[각주:5] 그러므로 사제나 주교처럼 영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일과 직무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 집행을 맡고 있는 것 외에는 다른 기독교인들과 아무런 차이도 어떠한 우위도 있지 않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기들의 일과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 동시에 성별 받은 사제와 주교와 같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일이나 직무에 의해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각주:6]

루터는 크리스찬의 자유에서 크리스찬 만인사제직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연합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 속에 있으며, 이는 각 사람이 다른 이들을 위해 제사장직을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동참하며 다른 기독교인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a little Christ)로서 이웃을 향해 사랑으로 서로 복음을 설교할 수 있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위로할 수 있다고 본다.[각주:7]

그러면서 루터는 크리스찬의 만인제사장직에 대해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


만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제사장이라면 우리가 지금 제사장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일반 교인과 어떻게 다른가?”라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사제”, “승려”, “영적인 것성직자란 말들이 그릇된 용법에 따라 현재 성직자들이란 불리고 있는 소수 사람들에게 잘못 적용되고 있다. 성서는 현재 교황, 주교 및 군주라고 당당하게 불리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에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믿음과 크리스챤의 자유를 가르쳐야 할 사람들에게 섬기는 자들”, “종들”, “청지기들이란 명칭이 붙기는 하나, 이런 칭호들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는다.[각주:8]


루터는 시종일관 사제들에게만 주어진 영적인 특권의식은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것임을 설파한다. 하지만 동시에 루터는 이러한 비판적 관점이 자칫 교회의 사제 무용론을 가져올 수 있기에 그 역할에 대해서 분명히 강조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다 같이 제사장들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우리가 다 공적으로 봉사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다. 아무리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고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41)라고 말하고 있다.[각주:9]


이런 점에서 보면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에서 이른바 사제계급의 불필요성을 단정했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루터는 사제계급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한다. 문제는 사제직만이 성스러운 것이기에 수도원에 들어가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 성직자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만인제사장들은 직업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만인제사장설은 지금까지 하등하게 여겼던 직업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모두가 제사장이라면, 그리고 특별한 성직이 없다면, 모든 이는 자신들의 직업을 통해서 도덕적 자기 증명을 가능하게 한다.

 

즉 일상적 노동이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이 발생했고 그런 의미에서 직업개념이 최초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직업개념이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중심 교리로 등장함을 의미한다. 이 교리는 신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도승적 금욕주의를 통해 현세적 도덕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세적 의무를 완수하는데서 온다. 이 현세적 의무는 사회적 지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곧 그의 직업이 되는 것이다.[각주:10]


이에 대해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루터에 있어 이러한 사상은 그의 종교개혁 활동의 첫 십년 동안에 발전되었다. 처음에 그는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했듯이, 현저히 중세적인 전통적 생각에서, 세속적 노동은 아무리 신에 의해 의욕된 것이라 해도 피조물에 속하는 것이라 보았고 마치 먹고 마시는 것처럼 도덕적으로는 무관한 신앙생활의 불가결한 자연적 토대라고 보았다. 그러나 오직 신앙뿐이라는 사상이 보다 분명하게 철저화되고 그럼으로써...직업의 종요성은 점증해 갔다. 수도승적인 생활방식은 이제 신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데는 전적으로 무가치할 뿐 아니라 세속적 의무를 회피한 이기적인 냉혹함의 산물로 여겨졌다.[각주:11]

직업소명설은 사제만이 성직이 아니라 농부나 어부, 그리스도인이 종사하는 다양한 직업들이 하나님이 개인에게 주신 소명으로서 성직에 해당한다고 본다. 직업소명설에 따르면 목회자만이 성직자가 아닌 셈이다. 이러한 직업소명설은 성직과 세속직을 나누는 이원론적 구분을 무력화시킨다. 이러한 직업소명설은 루터의 만인제사장설로 이어진다. 전통적으로 사제들만이 구약의 제사장의 역할을 계승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설에 따르면 목회자만 레위지파 혹은 제사장이 아니다 

평신도 신학을 주장하면서 목회자의 이중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폴 스티븐스는 이러한 루터의 견해를 그의 주요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폴 스티븐스는 오늘날 제사장의 사역을 성도들이 이어가고 있으며 그것은 첫째 예배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 둘째, 세상에서의 섬김을 통한 제사장 사역, 셋째, 일상생활에서 하는 제사장 사역 이렇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각주:12] 제사장이 목회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으며 평신도들이 그들의 전체 삶(예배, 직장, 일상)을 통해서 제사장직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될 때 목회자의 이중직문제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깔뱅과 목회직

루터보다 선택교리와 성화를 더 강조하고 일반소명(Beruf)보다 특수소명을 더 강조했던 깔뱅은 교역자의 특수성과 탁월성을 루터보다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사도, 예언자, 전도자라고 하는 일시적인 직분과 목사, 교사, 장로, 집사라는 영구적인 직분(항존직)을 구분하고 목사는 복음설교, 죄의 용서, 세례, 성만찬, 권면, 훈령, 치리라고 하는 사도적 직책기능의 계승자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깔뱅은 이 모든 일들이 교회의 질서를 위해 제정된 것이며, 이러한 질서를 위해 목사의 직책과 책임이 매우 중요함을 기독교 강요에서 강조하였다. 그는 목사의 자질을 강조하고, 그 내적인 소명과 외적인 소명을 언급하고 있으며 교역자의 자질에 대해 신앙, 경건, 학문, 도덕적 탁월성을 강조하고 여러 성경적 이유들을 통해 목회자를 선택하고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각주:13] 깔뱅은 이곳에서 교역자에 대한 교회의 경제적 지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교역자의 위치를 두드러지게 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역자의 대한 깔뱅의 관점이 목회자 이중직의 금지나 허용여부를 판단케 할 만한 결정적인 논거를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부 찬반 논변과 대안 제시에서 계속)


[관련기사]

- [임성빈의 문화칼럼]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부 찬반 논변과 책임윤리적 관점에서의 대안 

- 이중직 목회자에게 필요한 생각의 전환 3가지

- 2015년 문화선교트렌드


  1. 이 조사의 대상은 예장통합과 합동을 포함하여 65개의 교단소속 목회자들이다. [본문으로]
  2. 목회와 신학(서울: 두란노, 2014년 5월호), 62쪽. [본문으로]
  3. 이형기, “교회사를 통해서 본 교직자와 평신도,” 『장신논단』 제3집(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1987.12,), 119-20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33쪽. [본문으로]
  5. 위의 책, 33쪽. [본문으로]
  6. 위의 책, 33-34쪽. [본문으로]
  7. 위의 책, 120-21쪽. [본문으로]
  8. 루터, 위의 책, 314쪽. [본문으로]
  9. 같은 책, 같은 쪽. [본문으로]
  10. 막스 베버, 박성구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서울: 문예출판사, 2000), 59-61쪽. [본문으로]
  11. 위의 책, 60-61쪽. [본문으로]
  12. 폴 스티븐스, 홍병룡 옮김,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서울:IVP, 2012), 213-15쪽. [본문으로]
  13. 깔뱅, 『기독교 강요』,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10), 60-7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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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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