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 오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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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삶

<트리 오브 라이프>(테렌스 멜릭, 2011, 드라마, 15세)



 

<트리 오브 라이프>는 2011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테렌스 멜릭은 서울기독교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제작자로 참여해 그렇게 낯선 감독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사유가 녹아들었기 때문일까? 그의 작품에는 깊이가 있다. 특별히 이번 작품 <트리 오브 라이프>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이 작품에 최고작품상을 안겨 준 칸 영화제의 성격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영화의 내용은 욥기 38장4절의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영화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주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이는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를 마친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일이 태초의 우주의 탄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환기시키는 말씀이며, 또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의 일이 사람의 말과 이성으로 결코 파악될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한다.

영화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미국의 한 가족의 일상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행복한 삶의 모습에 이어서 곧 이어 한 장의 전보와 함께 가족 모두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19살 둘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그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영화는 끝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아들의 죽음과 더불어 가족, 특히 엄마와 아버지가 겪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제기하는 끊임없는 질문들을 혼란으로 가득한 영상 이미지와 함께 내레이션으로 보여줄 뿐이다. 특히 동생의 부고를 접하는 잭(숀 펜)의 모습과 함께 영화는 과거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후 계속되는 뜻 모를 이미지들,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태고의 지구의 모습, 생명이 진화하는 모습, 그리고 두 남녀의 만남과 아이들의 출생이 이어진다. 감독은 이로써 하나의 생명이 갖고 있는 우주적인 맥락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욥기의 구절에서 암시되었듯이, 이 땅에서의 생명은 우주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깊고 오묘한 면이 있음을 영상으로 말한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 동생의 부고를 충격적으로 접한 잭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어린 잭은 장남으로서 아버지(브래드 피트)와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장남인 잭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는 오히려 뜻하지 않게 잭의 분노의 대상이 된다. 언제나 권위적인 아버지를 미워하고 심지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도 언제나 아버지의 시선을 두려워했던 잭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이것은 사춘기 시기의 잭으로 하여금 일탈 행동을 거듭하게 만든다. 이로써 영화는 모든 가족들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과 또한 아이들의 성장통을 보여준다. 매우 평범하여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으로 쉽게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스토리텔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와 스토리의 절묘한 조합을 통해 영화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감독은 철학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질문들을 포함하는 영화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겉보기에는 모든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의 단면들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영화를 이해하는 단서는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트리 오브 라이프”를 번역하면 “생명나무”다. 이것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와 동일하다. 따라서 영화 제목은 창세기 본문에서 따온 것이라 생각한다. 감독은 창세기의 “생명나무”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을 갖는 것인지를 내러티브로 해석하고 또 이미지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필자의 이해에 따르면 이렇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지으셨다. 당신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아담과 하와가 살도록 특별히 조성하신 공간이다. 하나님은 이 동산 중앙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 놓으셨는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다. 창조된 세계와 에덴동산, 그리고 동산 중앙의 두 나무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먼저 창조된 세상과 에덴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 세상과 교회를 지시하며 또한 각각 은혜의 삶과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삶을 함의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의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삶을 의미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사는 삶을 지시한다. 인간과 하나님 앞의 삶의 본질을 히브리인들은 이렇게 이해하고 또 내러티브를 통해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이해의 관건은 두 나무가 지시하는 삶과 인간의 반응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생명나무로 말하려는 은혜의 삶은 무엇을 말할까? 대개의 경우 은혜의 삶은 염려와 근심이 없고, 만사형통한 삶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갑자기 사고와 불행한 일을 겪거나 원치 않는 질병을 얻거나 혹은 간절히 바라는 일들이 이뤄지지 않으면 은혜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은혜 아래 사는 삶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바로 이런 질문을 성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한편으로는 행복하게 보이는 한 가족의 갑작스런 불행을 보여주고, 또 그 일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극도의 상실의 슬픔 속에서 하나님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묻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모두가 뜻밖의 사건 때문에 상처에서 치유되고, 또 관계가 회복되는 모습으로 끝낸다. 이로써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삶은 오해일 뿐임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은 결코 아니며 또한 안락하고 평안하고 무사태평한 삶도 아닌 것이다. 이에 비해 은혜의 삶은 우리와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의 삶임을 말한다. 더욱 자세하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준 삶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며 사는 삶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 있지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영생의 조건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이 질문은 결코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의 일을 실천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지시하며, 우리는 오히려 강도를 만나 상해를 입은 자이거나 아니면 레위인과 제사장들 같이 다양한 이유 때문에 쓰러져 신음하는 자를 돕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이 비유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삶은 돕는 자로서의 삶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사는 삶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며, 무엇보다 그런 가운데 아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자로서 사는 삶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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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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