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피해자의 용서와 고통
<오늘>(이정향 감독, 2011, 15, 드라마)

 

2011년 부산영화제 칼라프레젠테이션 초청작이며 제작발표회와 더불어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오늘>용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영화에는 상반되는 캐릭터가 이끄는 두 개의 이야기가 섞여 있는데, 하나는 다혜(송혜교 분)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민(남지원 분)의 이야기다. 다혜는 평소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캐릭터로서 가해자를 용서했고, 지민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캐릭터로서 가정 폭력의 가해자인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항거한다. 영화를 이해하는 관건은 공통적이면서도 대조적인 피해자인 두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상관관계가 구체적인 의미로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뛰어난 연기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러티브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화 안에 있는 두 이야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양자를 대조적으로 살펴본다면, 매우 중요한 화두를 성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혜의 생일이던 이른 새벽, 약혼자 상우는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게다가 가해자는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쓰러져 신음하는 상호를 한 번 더 치는 잔인함을 보였다. 가해자는 미성년이고, 부모의 간절한 애원과 교회의 권고가 있던 터라 다혜는 탄원서를 제출해 가해자를 용서했다. 당시 상우의 가족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약혼녀인 다혜가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오토바이 사고가 미성년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수로 평생 범죄자의 꼬리표를 달고 사는 것은 사회적인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고 후에 가해자가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건과 관련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유족 사이에서 용서를 중재하는 수녀의 노력으로 미루어 볼 때, 다혜의 용서에는 아마도 위로와 함께 다가온 교회의 권고가 작용했던 것 같다.

일 년 후, 다혜는 교회로부터 용서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받는다. 용서에 대한 사례들을 접하면서 본인 스스로가 치유되는 것은 물론이고 또한 용서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었다. 주로 피해자 유족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고통과 용서하게 된 이유들과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이나 진행 중인 고통들, 혹은 용서할 수 없는 피해자 유족들의 이야기들을 녹화하는 중에 다혜는 용서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의 사망으로 인해 유족들은 아픈 기억들을 떨쳐버리지 못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을 잃은 피해자 유족들은 생활고로 인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데 비해, 가해자와 가족은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도 듣는다. 게다가 피해자를 탐문하는 과정에서 나눈 형사와의 만남에서 다혜는 용서받은 가해자들의 재범율이 70%나 되고, 자신이 용서했던 그 아이는 같은 반 아이를 매우 단순한 이유로 살해한 혐의로 현재 복역 중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 아이는 과거에 자신의 엄마를 칼로 찌른 경력이 있음도 알게 된다. 비록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가족이 은폐하고 넘어가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용서받은 자에게서 전혀 다른 삶을 기대했던 다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용서가 또 다른 범죄를 유발하게 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 카피가 말해주고 있듯이, 다혜는 자신이 너무 쉽게 용서해준 까닭에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되고 깊은 죄책감을 갖게 된다.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공황상태에 빠진 그녀가 절규하며 번뇌하며 극도의 고통에 사로잡히게 된 까닭은 만일 당시에 자신이 용서하지 않고 가해자가 처벌받도록 했다면 죄 없는 학생이 살해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학생의 죽음은 자신의 섣부른 용서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수녀와 신부를 찾아가 과거 자신에게 용서를 권고했던 이유를 따지지만 다혜는, 용서 행위는 용서받은 자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일임을 듣는다.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일 뿐이기 때문에, 비록 그 이후에 또다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주님에게 속한 일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용서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장면이다.

기독교의 핵심 개념인 용서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지칭한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고백행위이다. 용서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행위다.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로 인해 십자가에서 당해야만 했던 예수님의 고난을 알리는 일이다. 용서는 이 일을 위한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용서는 기독교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행위가 된다.

성경에서 이런 용서를 말하는 본문은 세 개다.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묻는 제자의 질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18:15-35). 반복되는 죄라도 용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에 대한 이야기다(18:21-35).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적은 빚을 진 자를 용서하지 못했을 때 주인이 분노하며 자신의 결정을 철회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형제자매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결정이 무효화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마지막 하나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 나타난다(6:12).

교회의 권고와 다혜의 용서의 결정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왜 용서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듯이 보일까? 문제는 무엇일까? 먼저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다뤄진 용서와 <오늘>의 주제인 용서를 비교하면서 생각해 보자. <밀양>은 자발적인 용서를 감행하는 피해자가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가해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월자의 용서를 받은 가해자의 평안으로 인해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로써 감독은 고통의 문제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혹은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해결하기보다는 초월자에게 귀의해서 해결하려고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한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섣불리 초월자에게 귀의하는 것은 단지 지연시키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 머리를 깎는 곳에 햇빛이 비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감독은 고통의 문제를 초월자가 아닌 인간 혹은 자기 자신을 통해 해결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좀더 긍정적으로 본다면 초월자의 역사가 있다면 바로 이런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오늘>이 다루는 내용은 교회의 권고를 받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주었지만 용서받은 자가 변화되지 않은 삶을 살고 오히려 또 다른 죄를 짓는 아이러니다. 게다가 피해자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교적인 이유로 용서를 말하는 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이유에 근거한 용서는 지연된 것일 뿐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꼬집는다. 비록 용서를 다루는 방식은 다르지만 두 영화가 말하는 결론은 동일하다.

한편 <밀양><오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조적인 장면은 용서의 자발성과 비자발성이다. <밀양>에서 교회는 용서하려는 신애를 제지하려는 입장에 서 있었다면, <오늘>에서는 오히려 교회가 다혜를 포함한 피해자들을 설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이중의 고통과 충격을 말하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기독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용서를 강조하기 때문에 두 영화는 기독교적인 배경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기독교인들에게 당연시되는 용서를 말함에 있어서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용서를 말하는 방식에 있다. 그것이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주변의 권고와 종교적인 믿음을 빙자해서 강요된 것이든 문제는 용서를 말함에 있어서 피해자 혹은 유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초월자에게 귀의한다거나 혹은 그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용서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 결과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함의하고 있는 질문은, 하나님의 용서는 무엇과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것(빚 탕감)을 촉구하면서 동시에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용서의 고통을 아는 자만이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용서는 법적, 종교적, 경제적,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이 서로 얽혀 있는 복합적인 행위이다. 쉽게 일어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의 그릇된 행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3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용서를 설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용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기다릴 수도 있어야 한다. 용서를 신앙의 척도로 여기는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용서하는 자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고통을 보고 또 느끼기를 요구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은 우리의 용서 이면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폭력과 그분의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었다. 용서받은 자는 날마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용서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용서한 것은 용서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가해자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고통의 근원을 자기 안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용서함으로 고통에서 벗어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용서와 더불어 겪게되는 더욱 큰 고통을 참아내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고 또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시는 것과 같은 행위다. 손목사님의 예를 들어 섣불리 용서를 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밀양>과 함께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공동체 혹은 가해자의 평안을 위해 설득되거나, 혹은 용서가 믿음의 표현이라는 미명하에 당연하게 여기는 잘못된 관행을 폭로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용서 받은 자가 적어도 용서의 주체인 피해자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늘 염두에 두고 살면서, 용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포함한다. 우리가 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앞서 말한 <오늘>에 담겨 있는 또 다른 이야기 구조에 주목해보자.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민이다. 그녀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총명한 아이다. 지민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판사인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아마도 자신의 감정을 결코 숨기고 살지 않은 탓에 권위적인 아버지의 폭력을 더욱 자극했다고 생각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가족 누구도 폭력을 제지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스스로 매를 초래했다며 지민에게 책임을 돌린다. 지민의 마음에 가족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가득 차 있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아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참을 뿐이지 죽이고 싶을 정도라고 말할 정도다. 지민은 이런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몸에다 쏟아 붓다 보니 결국 신장에 이상이 생겼다. 이식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정도다. 그런 지민은 다혜에게서 유일한 위로와 안식처를 얻는다. 자신과 가족의 관계를 상투적으로 이해하며 자신을 대하는 다혜가 불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출 중엔 언제나 다혜를 찾는다. 이유는 그녀에게서 아버지와 가족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병치되고 있는 이유에 대한 불만들이 많은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두 이야기가 상호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작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이야기는 영화에서 적지 않은 요소로서 의미작용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이야기를 서로 교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는 말이다.

먼저 폭력에 항거하면서 계속적인 폭력을 유발하는 지민의 행위와 폭력으로 인해 유발된 복잡하고 시끄러운 상황보다 평온한 삶을 원했던 다혜가 대조적이다. 폭력의 피해자로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고 또 다른 삶을 살았지만, 서로는 서로에게서 배울 것들이 있었다. 곧 자신의 폭력행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기 위해 살인자를 용서했던 다혜에게서 용서를 배우고 싶었다는 지민의 생각과는 달리 다혜는 피해자 유족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지민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자신의 용서에 깊은 회의를 품는다.

또한 두 이야기는 두 사람의 상반된 반응이 가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다혜는 어릴 때 경험했던 부모의 잦은 불화와 가족 해체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기보단 가능한 한 조용히 지낼 수 있는 평안할 수 있는 삶을 택하며 살아왔다. 용서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으로 설명된다. 평안한 삶을 위해 마음의 갈등은 가능한 한 빨리 털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결국 자살이라는 자신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에 비해 지민은 가정 폭력과 부당한 권위에 대해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평안한 삶보다는 자신의 존재감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러나 부당한 힘과 권위에 대해 항거함으로 폭력은 끊이지 않는다. 지민의 경우 역시 폭력은 자신의 몸에게 가해진다.

지민의 이야기는 결코 다혜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 피해자의 고통을 깊이 느끼며 용서의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오히려 평안한 삶과 용서의 중요성을 앞세워 용서를 서둘렀던 다혜로 하여금 자신의 용서가 섣부른 행위였음을 깨닫게 한다. 또한 다혜에게 피해자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환기시켜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지민의 가족이 아버지와 지민에게 보여준 태도를 통해 힘과 권위에 근거한 폭력에 대한 그릇된 반응을 폭로한다. 그리고 다혜는 지민과 그녀의 가족의 관계를 접하면서 다시 한 번 가족의 불화에 대한 경험 때문에 언제나 평안한 삶을 갈구했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영화는 용서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용서는 평안한 삶을 위해서(다혜) 혹은 가족이기 때문에(지민) 혹은 용서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교회) 혹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영화 속 한 피해자) 이뤄진다. 다양한 계기들 가운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진정한 용서는 무엇일까? <오늘>은 바로 이 질문을 제기하게 하면서 참된 용서에 대해 성찰하기를 촉구하는 영화다.

영화를 성찰하면서 필자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행한 각종 만행에 대한 유신 정권의 섣부른 타협, 미래를 미명으로 과거사 청산을 촉구하며 용서를 말하는 MB정권, 권력과 법적인 권위에 의한 폭력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전 대통령(다혜가 들고 있던 노란 색 우산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군사 독재 정권들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인 망각들을 용서로 착각하는 사람들.... 언젠가 용서는 이뤄져야 하겠지만 먼저 피해자 혹은 유족들의 고통을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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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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