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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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완득이>(이완, 2011, 드라마)

 


이런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인 관객이라면 분명히 난처하게 생각할 교회임이 분명하다. 십자가가 중앙에 있고, 믿음 소망 사랑이 그 주위를 장식한다. 교회에 가면 언제나 낯선 나라 외국인 부부가 먼저 반겨준다. 불법 노동자들이 주로 다니는 것 같다.

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 이동주, 학생들에게는 똥주로 통한다. 완득이 앞집 옥탑방에서 산다. 요즘 같은 입시위주의 수업에서 결코 유익하거나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없는 개똥철학이며 인생론으로 각설하고, 야자 땡땡이쳤다고 폭력, 학생들의 폰카에 찍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문제 선생이다. 게다가 불우학생으로서 숨기고 싶은 신상을 학생들 앞에서 서슴지 않고 공개한다. 이웃하는 사람들과 싸움질도 곧잘 하는 것 같고 또 학생에게 술도 권한다. 이런 사람이 성경책을 손에 들고 다니는 교회다. 게다가 나중엔 전도사란다. 그리고 불법 외국인 노동자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경찰 유치장 신세까지...

주인공 완득이는 또 어떤가. 공부는 말등에다 쌈질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척추 장애를 갖고 카바레에서 사람들에게 춤으로써 웃음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는 아버지와 근원도 모르고 떠돌다 어떻게 삼촌이 된 남자와 함께 옥탑방에서 살고 있다. 엄마는 필리핀 사람으로 어릴 때 집을 나가 주민등록등본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문제 학생이 될 조건이 충분하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쌈질 충동을 쉽게 억제하지 못한다. 세상을 향한 분노의 표현일 것이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또 있다. 똥주 때문이다. 학교에서든 길에서든 이웃하는 옥탑방에서든 얌마 완득아!”를 부르며 학생 인격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승의 인격도 포기하며 처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기도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똥주를 죽여 달라고 애원한다.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신다며 거금 만원을 헌금했으니 제발 자기 소원을 이뤄달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다.

어디 그뿐인가 남녀 고딩들이 예배당 안에서 뽀뽀도 한다. 감히 십자가 앞에서! 문화센터를 개원하는 곳엔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막걸리와 음식을 대접한다.

이런 교회가 김려령 소설 완득이를 원작으로 영화화한 <완득이>의 배경이다. 아마도 그리스도인 관객이나 혹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런 교회를 긍정적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사이비 집단과 같은 곳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이곳 사랑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든다.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을 떼먹은 악덕 기업주를 고소하는 사회정의를 위한 실천이 있다. 부자 아들이면서도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를 위해 싸우다 오히려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고 기꺼이 집을 나와 옥탑방에 거주할 정도로 의리와 용기가 있다. 이웃집 장애인을 배려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마다치 않고 오히려 그들의 처절하게 세상과 싸우며 살아가는 삶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갈등과 오해로 점철된 가족이 화해한다. 그리고 특히 불량하게 빠지기 쉬운 환경에 있는 완득이를 향한 열정은 잠시도 식지 않는다.

이런 교회다. 전통적인 교회 이미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이런 교회는 기독교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다. <도가니> 이후에 독교로 비난받는 요즘 같은 시기에 또다시 이런 교회의 모습이 등장하니 맘이 불편하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감동을 오히려 그곳에서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영화라서 그럴까? 그렇다고 해도 어쩌면 이런 교회, 그리고 이런 교회를 담고 있는 영화, 그리고 수많은 독자와 관객을 감동으로 이끄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 이 모든 것은 오늘 우리 교회의 자화상을 역설적으로 패러디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외면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와 우리 교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임을 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곳은 어두운 밤에 동네에서 유일하게 밝은 십자가 불이 켜져 있는 곳이었다. <완득이>는 단순히 성장영화 같지만, 환경과 외모 그리고 출신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름을 부르고 싶다, 그 이름을

키에슬로프스키는 <데칼로그>에서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다루면서 살인자 야첵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하면서 변호사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자신이 비로소 한 인간임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얌마 완득아!”는 그를 새로운 세상 밖으로 부르는 소리이며 또한 선생님의 사랑 고백으로 들린다. 마치 옆집 여성 무협 소설가에게 뜬금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했듯이, 완득이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고백한 것으로 생각한다. 완득이 역시 나중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비록 척추 장애 때문에 남들에게 꼽추라고 불리며 카바레에서 춤을 추며 사는 인생일지라도 아버지는 엄마를 보호하고 싶었단다. 필리핀 출신의 아내가 취객들의 노리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보냈다고 한다. 그것이 엄마의 부재에 대한 아버지의 유일한 설명이다. 못사는 곳에서 왔지만 배운 만큼 배운 사람, 그런 엄마를 필리핀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문제이지 엄마로서 문제가 될 리는 없다. 오히려 밀레의 명작 이삭줍기에 대한 기발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마침내 똥주 샘의 폭로로 그녀는 아들을 찾아왔다. 그런데 둘 사이는 엄마가 아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할 정도로 낯설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가 된 것이다. 그런 엄마가 완득이 앞에 나타났다. 보고 싶었단다. 잘 커 주어 고맙단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보고 싶단다.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고 싶단다.

그녀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굳세게 버텨온 엄마의 존재감을 그렇게 표현하고 또 그렇게 용서를 구한다. 완득이는 남들이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며 혐오의 대상이다. 그의 곁에 다가가는 것은 물론이고 그를 안아본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완득이를 보고 싶었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고 또 안아보고 싶었던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실제로 완득아라는 이름을 그녀의 음성으로 듣게 되었을 때, 완득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감동이 지금까지도 내 눈물샘을 자극한다.

우리 사회에 왜 이런 슬픈 감동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교회는 왜 이런 곳에 가까이 있지 못한 것일까? 똥주라 불리는 샘이 외치는 얌마 완득아!”는 자신의 존재감을 폭력으로 드러내려는 완득이를 또 다른 공간으로 불러내는 호명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환경으로부터 불러내시며 아브람아라고 부르신 것과 같다. 완득이를 환경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 부르는 의식이다. 똥주 샘이 그렇게 자신을 불렀을 때, 완득이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을 불렀다. 대단히 희극적으로 표현되었고 어떻게 보면 신성모독처럼 들리는 반응이지만, 적어도 그가 부르는 하나님은 늘 그의 곁에 계셨음을 확신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큰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선생과 학생

완득이에게는 기댈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에는 자신이 보호해주어야 할 사람들로 가득하다. 꼽추 아버지, 필리핀 사람 어머니, 그리고 삼촌. 보호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지만, 실제는 보호해야 할 사람으로 살아간다. 거리의 불량배들로부터 아버지를 보호하며, 술에 취해 거동이 힘들어지는 아버지를 등에 업는다. 자신을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던 엄마를 자신이 안아주고, 아버지와 소원해진 관계를 중재해준다. 완득이가 얼마나 큰 중압감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이웃 옥탑방에 사는 똥주 샘은 다르다. 선생으로서 그의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오히려 완득이를 다방면으로 괴롭힌다. 학교에서 저소득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햇반을 갈취한다. 둘의 소통 방식만을 본다면 선생과 학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결국 완득이가 제 길을 찾아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똥주 샘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떻게 그런 관계로 발전된 것일까?

이렇게 생각해보라. 만일 똥주 샘이 잘 사는 동네에 산다. 그리고 가정방문이랍시고 완득이를 방문하고 완득이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물론 그들의 삶과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리고 완득이를 염려하며 상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우환경의 학생으로 등록시켜서 학교가 베푸는 특혜들을 빠짐없이 받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완득이는 어떠했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먼저 영화에서 두 사람이 차지하는 공간을 보면 학교에서는 강단이 없다. 동네에서 똥주 샘은 완득이 아래에 있다. 완득이는 내려다보고 똥주 샘은 올려다본다. 집 위치 탓에 설정된 것이지만, 영화는 이런 공간적인 배열을 통해 학생을 대하는 똥주 샘의 자세를 드러낸다. 똥주 샘은 완득이보다 더 지독하고 악랄한, 때로는 저질인 모습으로 완득이에게 다가갔고, 그래서 청소년기에 자신보다 더 나은 자들을 봄으로 말미암아 느낄 수 있는 완득이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도록 했다. 앞서 말했지만 똥주 샘의 거칠고 또 반복적인 호명 행위는 완득이가 자신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도록 열망하게 하였다. 그래서 완득이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완득이게게 똥주 샘은 좋은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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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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