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큰 별이 지다] 돌아가신 방지일 목사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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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큰 별이 지다]돌아가신 방지일 목사님을 추모하며..





ⓒ 한국경제ⓒ 한국경제


지난 10일 한국 개신교회 최고령 목회자이자 방지일 원로목사(영등포교회)가 향년 10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입관 예배는 11일 오후 8시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장례 예식은 한국기독교회장으로 14일 오전 9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대강당에서 치러졌다.

 

방지일 목사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군부 독재시절을 넘어 민주화와 정보화시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한국사와 한국교회사를 온 몸으로 체험한 산 증인이었다. 1911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대학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당시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이미 은퇴한 길선주 목사를 곁에서 보필하기도 했다.

 

장대현 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길선주 목사님은 이미 은퇴하셨지요. 시력이 나빠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제가 손 잡고 다니기도 했지요. 그분은 원로 목사로 계실 때도 항상 사경회를 열며 경건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국민일보 2008713일자 “98세 선교 노익장 전하는 기도방법 -

방지일 목사, CBS출연 신앙 비결 전해)

 

이후 19374월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친 방효원 목사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지역인 중국 산둥성으로 파송을 받아 21년간 선교 사역을 했다.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최초의 중국 선교사였다.

 

2011년에는 21년간의 사역을 회고하는 중국선교 사진집 <중국선교를 회고하며>(홍성사)를 출간했다. 20세기 전반 중국에서의 고단했던 삶이 담겨 있는 사진집이다.

 

그 어려움이란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국민당 집권기, 일본 점령기, 미국 치하, 다시 국민당 정권, 공산 정권 등 다섯 정권 하에서 선교를 했어요. 일본 점령기에는 같이 선교하자는 일본 사람들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반일 · 항일로 몰려 가택수색에다 헌병대로 끌려 다니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죠. 그래도 같은 목회자인데 일본 목사들이 저를 고발했을 땐 너무 원망스러워 많이 울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를 탄압하니 더 말할 것도 없었고요.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그때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군요.

중국 공산당 정권이 종교를 탄압해 많은 교인이 떠나고 본국과는 연락이 두절돼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중국인들이 배급받은 천으로 옷과 신발을 만들어 밤에 몰래 던져놓고 갔어요. 홍콩으로 추방됐다가 1957년 귀국했을 때 부산 경찰이 제 짐을 조사하더니 성경책 사이에 인민폐 20원을 왜 끼워 갖고 왔느냐고 물었어요. 그만한 돈이면 당시 한 가족 생활비였는데, 어떤 분이 내 전송예배 때 몰래 성경에 끼워 넣었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그땐 정말 우리 모두가 한 몸이었습니다.“

(한국경제 20111113일자 방지일 목사 목사 공고내면 이력서 300장 몰려... 

그렇게 뽑으면 삯꾼이죠)

 


57년 중국에서 북한으로 추방될 위기에 처했으나 서방 언론에 최후까지 남은 개신교 선교사로 소개돼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58년부터 79년까지 20년 넘는 시간을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56(19719) 예장통합 총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한기총과 한국교회연합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헌신했다. 말씀과 기도의 균형 있는 신앙을 중시하는 목회자로서 교파를 초월해 모두가 존경하는 한국교회 원로로 작년 개신교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기존의 교단 순환이나 안배 원칙을 깨고 설교자로 서기도 하였다. 이는 그의 치우침 없는 신앙과 포용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제자들과 신학자들이 전한다.


 

ⓒ 뉴스1



믿음이란 투항인데, 아직도 우리는 내 주관과 경험으로 무장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보혜사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무장을 완전히 해제할 때 

비로소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어요,”

 (200794개 장로교 연합예배 설교 중)

 


육체가 닳아 없어질지언정 결코 녹슬게 하지는 않겠다는 좌우명과 목회자로 더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각오를 평생 실천하면서 살았다. 은퇴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일이면 강단에서 설교하고 평일에는 각종 행사와 강연, 결혼식, 최근까지 북한 선교를 위한 기도회 행사에 참석하고 등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오라는 곳에는 모두 갔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힘이 남아있는 한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목회지론에 따라 그곳이 국내이든 해외이든 주저 없이 가곤 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인터넷으로 설교 준비를 하고 해외 선교사들에게 하루 30통이 넘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격려하며 지냈다. 매주 가르치던 월요 성경공부는 1958년부터 55년 이상 이어지는 등 청년보다 더욱 청년 같은 열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았다.

 


58년부터 시작된 '목회자 월요 성경공부 모임'



"길다란 시험관과 같은 신앙은 깊이는 있으나 넓지 못합니다.

반면 대접과 같은 신앙은 폭넓게 수용하는 듯하지만 깊지 않아요

우리 모두 깊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넓어지도록 노력합시다

좁고 얕다고 불평하지 말고 깊어지도록 애씁시다.”

(국민일보 20141010“‘영원한 현역방지일 목사의 삶과 신앙)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떼와 소떼를 맡았으니 '그들에게 내 마음을 다한다' 하는 심정으로 지내는 것이 목회"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욥이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고 그들의 '명 수대로' 번제를 드렸는데, "목회란 명 수대로 하나하나 제단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성도님' 이렇게 '도매금'으로 하면 안 돼. 목회는 양 하나하나 돌보고 제단을 쌓는 거이야. 교인들 위해 하나하나 기도하면 교인들이 다 목회자의 장중에 있어 그 사람이 기분 좋은지 나쁜지 슬픈지 기쁜지 다 알게 되지. 그거이 목회야."라고 강조하셨죠. 목사님께서는 "마부가 마차를 끌 때 말고삐를 쥐면 말의 상태를 안다"고 하시며 "상태가 좋은 말과 아픈 말이 있으면 그 형편대로 말고삐를 조절해 마차를 끌고 가기에, 마차가 뒤집어지지 않고 잘 달릴 수 있다"며 목회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20141010일 기독공보 오래 사는 것이 뭐이 중요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거이 중요하디)

 

오래 사는 것보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며 평생을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한 평생을 달려오신 방지일 목사님, 이 시대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주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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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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