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와 선교는 함께 갈 수 있을까?






다원주의와 선교는 함께 갈 수 있을까?

-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바람직한 선교 방향 -



ⓒ flick/Byoung Wook - Toughkid Kim 김병욱


ⓒ 오마이뉴스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한 그리스도인이 타종교인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한다. 질문을 던진 청년은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가 불편하고, 심지어 혐오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타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자문을 구한다.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적 태도로 불편해하는 감정은 이제 비단 비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상당히 공유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다만 이러한 고민과 질문을 담아내기에 한국교회의 소화기관은 여전히 퍽퍽하다. 부산의 한 대형교회 집회 플래카드에 달린 기도 제목은 인근 사찰들이 무너지게해달라는 것이었고, 아주 최근에는 인도의 불교 성지에서 땅 밟기를 하고 찬송을 부른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큰 사회적 논란이 일어났다. 이처럼 무례하고 극단적이진 않지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에도 온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원주의 사회와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타종교에 대한 무례한 행위가 논란이 되면, 배타적 유일신 신앙이 원흉으로 자주 지목된다. 그러나 모든 진리 주장은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유일신 신앙을 다원주의와 조화시키지 못하는 다원주의적 지능의 빈곤이 더욱 더 근원적인 문제의 지점일 수 있다.

 

다원주의 지능의 빈곤

글로벌 시대가 다원주의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삶의 기본 조건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 풍습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규범이 되어가고 있다. 나와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이기까지 하다. 그런 면에서 다원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해독은 삶의 필수적 역량이다. 그런데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복잡해진다. 사회, 문화적 다원주의는 이해하겠는데, 적어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신실한 제자라면 종교적 영역에서는 다원주의를 단호하게 차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맞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타협하는 것은 신앙의 토대를 뒤흔드는 불손한 주장일 뿐 아니라, 사실상 다원주의의 겸손한 활용과도 어긋난다. 그러나 사회,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가 무 잘리듯 딱 나누어지진 않는다. 종교는 문화의 옷을 입고 드러나며, 공동체라는 사회적 양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에 접근할 때는, 비록 그 종교적 진리의 유일성을 믿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당대에 용납되는 사회, 문화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 불교의 사찰에 가서 땅 밟기를 하는 행위는 단순히 타종교의 진리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모독하는 행위다. 성경은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혹독하게 경고하지만, 이는 타종교를 혐오하고 공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 백성의 순결을 위한 자기 검열을 위해서였다. 우선적으로,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의 차별성을 위해서 우상숭배는 배격되었다. 사람들은 형식으로는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 실상은 풍요와 번식을 보장하는 땅의 종교를 따르고픈 유혹을 늘 받아왔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거룩하고 공의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젊은 여성들을 신전 창녀로 전락시키고, 아이들을 산 제물로 바치며,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가나안의 악한 풍습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우상숭배는 철저히 금기시되었다.

 

성경은 외인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언행으로 대하라고 명료하게 권한다(4;3-5; 벧전3;15-16). 고대 사회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지배적인 다종교 사회였다. 유대-기독교권 밖의 외인들은 모두 이교도들이었다. 그럼에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이 가득했던 그리스-로마 사회의 만신전을 훼손하거나 이교도들을 공격하진 않았다. 이러한 행위들은 오히려 기독교가 로마제국과 결탁한 이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단호하게 증언했으나, 그 표현은 정중했고 다원주의적이었다. 사도 바울의 아테네 설교가 이를 방증한다. 사도행전 17:16 이하를 보면 바울은 아테네에 가득한 우상들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다. 그러나 그는 뒤이어 아레오바고에서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할 때 격분을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심을 인정하며, 접촉점을 찾아가며 설득력 있는 언어와 논리로 그들의 종교적 노력을 재해석하였고 선교적 열매도 거뒀다. (일부에서는 바울의 아테네 설교가 실패한 종교철학적 방법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대부분의 현대 성서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바울의 전략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선교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국 칼빈대학교에서 기독교 철학을 가르치는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는 그의 저서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Who's Afraid of Postmodernism: Baker, 2006)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해석적 다원주의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또한 다른 종교들의 주장들도) 모두에게 객관적 진리라고 입증될 수 없는 해석적 상태로 제시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공공사회에서 기독교의 진리 됨을 주장할 때 겸손하고 고백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자신감은 객관성이 아니라, 성령의 확신케 하는 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진리가 개인 취향에 맴도는 사적인 가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다원주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오해를 극복해야 하지만, 동시에 현 시대의 이념적 다원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복음, 공공의 진리

다원주의가 각자의 종교가 지니는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종교를 균질화시킬 때 이는 강요된 이념이 되어 버린다.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하나의 산 정상과 여러 갈래의 등산로혹은 코끼리의 다른 부위를 만진 맹인들과 같은 비유를 들며 모든 종교를 근원적으로 동일한 열망이라고 해석하는 다원주의자들의 시도를 완전한 실재를 알고 있다는교만한 주장이라고 예리하게 비판한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IVP, 1998: 30). 그러한 이념적 다원주의자들은 이미 산에 오르는 자들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산 주위를 돌며 모든 것을 조망하며, 맹인이 아니라 눈을 뜨고 환히 볼 수 있는 우월한 화자의 위치를 점한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 그 자체가 종교가 되어 버린 셈이다.

 

무슨 종교를 믿어도 다 같은 길이라는 주장은 사실은 다원주의가 아닌 보편주의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타종교들이 과연 동의할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와 세계관들은 저마다의 체계를 갖고 세계와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계관과 구원의 길들이 제시된 선택의 문화에서 기독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역사의 완성을 증언할 뿐이다. 인간은 함께 경험한 역사를 공유하며, 같은 패턴의 인생을 산다. 인간의 처음과 끝을 해석하는 어떠한 종교도 혼자에게만 적용되는 신념일 수는 없다. 기독교는 공공의 진리를 선포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공공의 진리는 다원주의적 경쟁의 장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누가 더 일관된 진리의 체계를 제시하며, 진리 주장에 부합되는 신실한 삶을 사는가가 실질적인 게임의 룰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성령께서 그 모든 과정을 주관하신다고 믿는다. 성령의 역사를 믿는다면 우리는 더더욱 겸손하고 정중할 수밖에 없다. 선교의 열매는 인간의 힘과 계산에 달린 것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가 분별해야 할 다원주의의 위험은 기독교를 공적 사실이 아닌 개인적 문제 해결의 종교로 국한시키려는 시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와 너 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구원의 메시지다. 또한 기독교는 죽은 다음에나 효력을 발휘하는 종교일 뿐, 지금 여기서는 현세에 도움이 되는 온갖 처세술과 이데올로기들을 활용하며 살아도 된다는 식의 가치 혼합적 다원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 진리를 사적이며 내세적인 차원에 묶어둔다면 우리 자신이 이미 현대 다원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기독교가 역사적, 공공적 진리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 여기서 우리 살아가는 현장(교육, 정치, 소비, 관계, 가정 등)에서 진리 됨을 선포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불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제도권 종교들과의 외양적 경쟁을 넘어선다. 이미 소비주의, 개인주의, 염세주의, 불가지론 등이 사실상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삶과 내면을 점령하려고 침입해 오고 있다. 이처럼 고도로 다원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유일신 신앙은 우리의 세계관과 차별화된 생활양식을 통해서만 효력이 입증된다. 복음이 성품과 공동체를 통해 공공의 진리로 증언될 때, 진정한 다원주의 사회라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지 않을까





김선일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실천신학) 이 글을 쓴 김선일 교수는 현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실천신학 주임교수로, 전도학을 중심으로 가르치며 저서로 『전도의 유산: 오래된 복음의 미래』(SFC, 2014), 『(교회를 위한) 전도 가이드』(새세대, 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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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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