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지 오브 투모로우>



반응형


날마다 죽고 사는 경험

<엣지 오브 투모로우>(더그 라이만, SF, 12, 2014)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보면서 날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표현을 떠올렸다. 물론 바울의 말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 결과이며 흔히 욕망을 내려놓는다는 말로 이해한다. 바울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울 때 겪을 수밖에 없는 심정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토로했다. 그는 일상에서 죽음과 삶의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성령의 소욕에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죽음과 삶의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성령의 소욕에 따른 삶을 사는 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말한다. 성화는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의 결과이나,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죽음과 삶의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이뤄진다. 곧 성화 경험은 반복된 죽음과 삶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이것을 시간 경험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나타날까?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면서 갖게 된 질문이다.

영화 제목 엣지 오브 투모로우오늘과 내일의 경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원작은 사쿠라자카 히로시의 소설을 오바타 타케시가 만화로 만든 All You Need is Kill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더그 라이만 감독은 원작과 다르면서도 또한 이전과 차별화된 형태로 SF 전쟁 영화를 만들었다. 특히 반복되는 시간 개념을 첨가하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외계인의 침입으로 순식간에 유럽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보장교 케이지(톰 크루즈 분)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전장에 투입된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강제로 전장으로 내던져진 그는 투입되자마자 외계인의 공격으로 죽음을 당하지만 곧 깨어난다. 단지 데자뷰 현상이나 꿈으로만 볼 수 없을 정도로 현실과 너무 동일한 상황이 전개된다. 사실은 하루의 삶을 앞서 산 것이었고, 죽으면 언제나 투입 직전의 날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외계인과의 전투에서 하루를 리셋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 경험을 통해 케이지는 현재를 조금씩 수정해나가는데, 그 결과 모두가 원하는 미래를 얻는다.

하루를 리셋함으로써 얻는 미래 경험을 통해 현재의 한계를 극복해나간다는 설정은 일상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신학적으로는 미래를 앞서 경험하는 것을 두고 선취라고 하는데, 이런 내용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영화 내용에만 제한해서 말한다면, 미래경험이 갖는 의미이다. 필자가 성화와 시간경험의 관계를 궁금하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인간은 반복되는 죽음과 삶의 경험을 통해서만 올바른 미래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미래는 현재의 결과이면서 아직 존재하지 않은 시간이고 다만 상상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다. 상상력이 미래를 현재에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해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 성화의 과정에 들어갈 때, 죽음과 삶의 반복적인 경험이 일어나고, 약속된 미래를 경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현재를 새롭게 혹은 올바르게 사는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곧 올바른 미래를 사는 것으로 이어진다.

미래경험은 종말론에서 다뤄지는 주제인데, 영화 이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독일 신학자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이다. 물론 두 사람은 칼 바르트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현대 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칼 바르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종말론적이라고 했다. 그에게 종말은 하나님의 오심과 관련한 시간경험이다. 교회의 중심과제는 하나님의 오심에 합당한 존재가 되고 또 하나님의 오심을 경험케 하는 일이다. 미래를 올바르게 말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책임이 교회에 있다.

바르트 이후 신학에서 새로운 물꼬를 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시간 개념을 말하면서 역사성을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으로, 그러나 현재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여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미래를 아는 사람은 힘을 소유한다. 현재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현재를 수정할 수도 있다. 인간이 미래를 말할 수 있는 방식은 오직 선취이다. 그것은 가설의 형태로 주장될 뿐이며, 진실은 종말에 입증된다. 만일 가설의 형태로만 미래를 말할 수밖에 없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것인가?

판넨베르크는 이성의 힘에 의지해서 논증을 해나갔지만, 이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몰트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탕으로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면서 종말론적인 근거를 성찰했는데, 그는 미래를 현재의 수정 혹은 변혁으로 이해한다. 그가 말하는 미래란 약속이 제시하는 현실이며, 인간은 미래를 앎으로써 현재의 잘못된 부분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래란 현재의 끊임없는 수정을 통해 이르게 되는 공간이다.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기까지 결코 멈추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멈추어졌다고 여기는 순간에 직면할 때 부활은 그것 이후의 계속되는 약속의 성취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약속을 통해 미래를 알며 또한 부활을 근거로 그것의 성취를 희망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몰트만은 그리스도인에게 현재의 수정과 변혁을 촉구한다. 현실 변혁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진리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케이지의 미래 경험은 병사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자신의 경험을 믿지 못하는 병사들을 설득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현재의 한계를 극복해 원하는 미래를 얻는 데에 기여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런 스토리에서 필자가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조합을 본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두 신학자에게 미래를 안다는 것은 현재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는 일이며, 또한 현재를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는 근거를 얻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응형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