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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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대가: 노예계약

<파가니니: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버나드 로스, 음악영화, 15, 2013)

 

과거 괴테는 파우스트 박사에 대한 전설을 소설로 만들면서 가공적인 존재인 메피스토텔레스를 등장시켰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으면서도 여전히 목마름을 느끼던 파우스트에게 회춘을 제시하며 은밀한 거래를 제안한다. 내가 당신의 종으로 살고, 저승에서는 그대가 내 종으로 산다는 것이다. 메피스토텔레스는 젊어지고 싶단 파우스트에게 마녀의 영약을 주어서, 그를 다시 젊어지게 만든다. 파우스트는 그 대가로 영혼을 판 것이다. 일종의 노예계약의 원조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파가니니>는 파가니니의 실제 연주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뛰어난 연주가를 캐스팅하긴 했지만 부족한 연기력이 아쉬운 영화였다. 내용적으로는 파가니니가 수많은 여성들 틈에 살면서도 유일하게 진정한 마음으로 사랑을 하였던 샬롯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 파가니니는 빼어난 외모와 로맨틱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겨 수많은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다. 특히 바이올린 연주 기교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기 때문에 여론의 취재 열기는 항상 뜨거웠다. 결국 여성 팬들과 엮인 각종 스캔들로 숱한 괴소문을 달고 살아야 했고, 죽어서는 교회 무덤에 묻히지 못하다가 오랜 시간 후에 아들의 거듭되는 탄원으로 겨우 묻히게 된다. 그 이유는 마지막까지 고해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악마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사망할 때까지 파가니니의 생애를 조명하는데, 감독은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파가니니를 따라다녔던 괴소문, 곧 악마의 출현이 실제로 그에게 어떻게 작용했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괴소문을 영화로 만들면서 감독은 파우스트 박사와 메피스토텔레스의 계약을 참조하였다.

무명 바이올리니스트인 파가니니가 갑자기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사로잡게 된 데에는 악마와의 협상이 있었다는 전제인데, 파가니니 당시에 떠돌던 괴소문을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악마의 계략으로 사용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아무도 파가니니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았던 때에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것이다. 다른 하나는 파가니니가 도박과 여자 그리고 약물 복용에 있어서 아무런 제한 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고, 마지막 하나는 파가니니를 유럽 전체로 순회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세계적인 스타로 만드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파가니니의 천재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이 일을 위해 파가니니는 악마와 일종의 노예 계약을 체결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파가니니를 주인으로 섬기겠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는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라는 조건이었다. 현실의 쾌락에 탐닉하며 살면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파가니니는 그와의 계약을 서슴지 않고 체결한다. 그 후 전개되는 파가니니의 삶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일약 세계적인 대스타가 되었다. 영국 왕실의 요구조차도 거부할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 그는 수많은 돈을 벌었고 숱한 여성들에 둘러싸여 많은 스캔들을 일으키며 살아갔다.

역사라는 것이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독해되는 것이지만, 로스 감독이 파가니니를 보는 관점은 특히 그런 것 같다. 왜냐하면 파가니니를 둘러싸고 있는 괴소문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현하면서 감독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소위 기획사의 횡포 혹은 노예계약이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유진 박이었다. 그는 미국 줄리아드스쿨 출신의 뛰어난 전기바이올리니스트이다. 한창 잘 나가던 때에 소속사와 잘못 엮인 까닭에 그는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했고, 우울증에 시달리면서까지 연주를 해야 했으며, 그의 음악은 싸구려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인권단체와 팬들의 도움으로 악덕 기획사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다.

유진 박 사례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들과 기획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가까운 일들은 이미 매스컴을 통해 잘 알려진 바 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세상에 알리길 원하고, 그들의 예술성과 욕망을 잘 알고 있는 기획사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면서 동시에 소위 노예 계약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무엇일까? 왜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부조리는 근절되지 않고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인간의 욕망에 있다. 우리 사회에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하고, 그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대가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들이 가득하다. 대중문화시대에 악마가 출현한다면,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아닐까? 또한 욕망의 소비를 부추기는 것은 물론이고,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소비자본주의 사회도 문제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 신앙을 위협하는 강력한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은 인정욕구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여기는 것은 욕망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추구하는 자에게 찾아와 은밀한 제안을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인 것이다. 우리를 죄의 종이 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됨을 침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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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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