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교회 - 신앙·신학적 반성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 세월호 비극에 대한 신앙·신학적 반성 -



 

임성빈 원장(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 신학대학원장)




애통하는 대한민국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우리 국민들은 애통함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애통함은 격분과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사회학적 통찰에 따르면 격분은 일시적 현상에 그칠 수 있다. 반면에 성찰을 동반하는 분노는 사건의 원인과 그 주체들에 대한 구체적 처벌을 요구하며 재발방지를 위한 근본적 대안을 요구하는 후속 행동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이들이 잊지 말자를 외치고 있다. 애통함이 격분으로 끝나서는 안 되지만, 지엽적인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는 분노로 끝나서도 안 된다는 염려와 각오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잊지 말자를 호소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기도회로, 다양한 형태의 집회로, 또 다른 이들은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사비를 들여 노란 리본을 스티커로 만들어 나누고 있다.


오늘의 비극과 죄로 그득한 현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애통한 사건을 절절하게 간직해야 한다. 애통한 기억이 이런 상황을 낳게 한 우리의 무력함을 잊지 않게 하고, 죄로 가득한 현실을 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능력이 많은 것 같지만, 무력하다. 사고 현장을 화면으로 보여줄 능력은 있으나, 그 안에서 스러져가는 생명들을 살려 낼 능력은 없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무력함이란 죄다. 그동안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계발하고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사의 원인을 파헤칠수록 이런 무력함을 낳게 한 원인 자체가 더 큰 죄악이다. 무책임한 기업윤리와 공무원의 유착관행, 선장과 선원들의 일천한 직업윤리가 다 인간이 만든 죄로 물든 문화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힘과 직위를 청지기답게 사용하지 못한 결과다. 이러한 인간의 무책임함이 생명을 살리는 데 무력했다.

우리를 더욱 좌절케 하는 것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대신해 책임을 맡은 관계 기관들과 정부가 더 무력하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강력한 리더십을 가졌다는 대통령의 약속이 단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생명도 구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의 총체적인 무능은 우리로 하여금 더 분노를 넘어 위기감을 가지게 했다.

 

비극 속에서의 하나님 침묵

신앙인들은 물론 전 국민이 침몰해 가는 세월호를 보며 마음을 모아 기도하였다. “하나님 제발 살려 주세요. 저 생명들을, 저 어린 생명들을!” 그러나 이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성경 안에도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적지 않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물었다. “하나님! 왜 악인이 이렇게 번성하고 의인이 핍박을 받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울부짖으셨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현장과 마주친다. 또한 그동안 간과했던 성경 속의 울부짖음과 다시 만난다. 어떤 이들은 비극적 현실과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신앙을 포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현실적인 경험에 맞추어 성경의 증언들을 가감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비극은 우리의 지식과 신앙을 동원해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하려 하거나, 이 사건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쉽게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이 슬픔당한 이들의 죄악 때문에 일어났다거나, 이들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일어났다는 식의 설명은 위로는커녕 사람들의 오해와 공분을 사고 만다.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단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러한 비극적 현실을 대할 때마다 솔직하게 고백하고 울부짖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애통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2:3)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1,2)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의 증언을 통해 거듭 깨닫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바로 비극의 현장에 계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들 곁에서 끝까지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또한 육신의 어버이가 자식을 잃고 나서 통절히 아파하듯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함께 아파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장에 계셨으며, 아파하셨다는 것이다.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나 그 자리에 계셨으며, 침묵하시는 것 같으나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슬픔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신묘한 모양과 방법으로, 또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주문으로 끝나지 않게 한다. 아버지의 아픔과 통분함을 가지고 악한 현실에 대해 일어서게 한다. 하나님의 뜻을 받은 사람으로서 청지기적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한다.

비극적 현실가운데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는 남은 사람들의 몫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다. 생명의 풍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다른 것보다 우선시한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간에 이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라는 물신 숭배에 맞선다. 사실 물신숭배가 이 비극적 사건의 중대한 원인이다. 생명보다는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기에 지금까지 원칙보다는 변칙을, 준법보다는 편법을 사용했다. 돈을 위해서 생명과 안전을 거래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얼마나 돈에 물들어 있는가를 밝혀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보다는 물질의 힘을 크게 여겼던 문화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즉 회개를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 생명 중심의 가치를 뿌리로 삼고, 하나님의 의로 올곧은 삶을 살아내어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열매 맺어야 한다. 그 일에 우리 신앙인들과 교회가 앞서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과연 구원파와 교회가 무엇이 다른가라고 묻는 처참한 현실 앞에서, 한국교회는 종교 개혁의 후예답게 지속적인 개혁을 통하여 거듭나야 한다. 우리의 무력함과 죄악이 낳은 결과를 기억하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예배당 중심의 신앙에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 개인주의적 영성에서 공공적 영성으로, 개교회주의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유기체적 교회로 변혁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비상한 각오로 순종하여야 한다. 어쩌면 오늘의 비극과 우리의 애통함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명을 주셨던 값비싼 은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즉 세상의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후 경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위의 칼럼은 2014년 6월 3일자 기독공보 [2949호] 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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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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