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박성관] 미학 속의 불편함과 예수 영화(Jesus Film): 영화 <노아>와 <선오브갓>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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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속의 불편함과 예수 영화(Jesus Film)

“영화 <노아>와 <선 오브 갓>을 보고 나서”

                                                                                                 


     박성관 목사(문선연 객원연구원)


오늘날 영화는 단순히 오락물이 아니라 우리를 해석하고 우리에 의해 해석되는 삶의 내러티브들이다. 감독은 영화 내러티브의 작가다. 감독은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관객의 눈높이에서 영화적 도구를 매개로 메시지를 재현한다.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의 눈 역시 감독의 눈이 아니다.

최근의 영화 시장의 경향은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팔리는 성경과 대중문화의 상호 영향이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감동적인 한편의 좋은 영화를 볼 때, 교회예배에 참석한 시간과 똑같은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는 영화가 영혼의 필요와 매개시켜주는가? 신학적 영화비평은 영화를 보는 경험과 알고 반응하기이다. 일단은 보아야 반응을 할 수 있다. 경험한 다음에야 어떤 영화인지 평가할 수 있기에.

기독교인으로 영화를 볼 때, 종종 미학 속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 영화 <노아>와 크리스토퍼 스펜서 영화 <선오브갓>은 ‘미학 속 불편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노아(2014)                                                                  선오브갓(2014)



우선 <노아>는 아름다움 속에서 불편함을, <선오브갓>은 예수의 일생을 재현했다는 평을 듣지만 그리스도 인물(Christ-figure)을 재현했는지 다소 아쉬움이 있다. 다시 말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기독교영화가 아니라, 성경을 소재로 하였지만, 성경 주제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기독교적 영화(종교영화)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재현하느냐에 따라 기독교영화와 기독교적 영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이 영화를 볼 때 두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성경 이야기 사이에 행간을 살펴 읽듯이, 영화도 작품 내용이나 영상 장면들을 살펴서 보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의심의 눈을 가지고 작가나 감독의 의도를 읽어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의 이야기를 재현하려고 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맬 깁슨)는 감독 자신의 종교성을 강제적으로 표방하여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선오브갓>은 그 보다는 좀 순화된 영화란 평을 받지만 조금 다른 예수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성경을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에게 확실한 것은 관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만들지, 신앙인들의 성경 이해를 도와주려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사용되는 음악이나 미술 또한 관객과 감동의 일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지 신앙 진술에 도움을 주려고 삽입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노아> 속에서 뱀 허물이 등장하는 장면들



그런 의미에서, 기호학과 영화 언어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영화를 그 자체로 보는 것을 ‘외연 기호학’이라고 이해하는데 그것이 바로 내용이 되어 표현이 드러날 때 그 표현은 기호의 최소한 기능만을 보여주는 기호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노아>에서 노아가 팔에 황금색 뱀 허물을 감고 어떤 행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메타 기호학만으로는 영화의 오묘한 기호학적 특성을 설명할 수 없기에 메타 내포 기호학이란 해석 틀이 필요하다. 이런 기호학은 내포 기호학이 영화 속에서 다양하게 드러난 여러 가지 상황적이고 가변적인 요소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 <노아>에서 뱀의 껍질이 갖는 함의는 단순한 물질적 속성을 통해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뱀의 껍질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성경 창세기의 내러티브와 크게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볼 때, 뱀의 껍질이 축복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범죄에 대한 내용을 실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메타언어로 분석이 되는 심층구조와 표층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 전체의 주제로부터 인물의 비유, 화면의 미장센에 이르기까지 그 분석 주체와 해석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특징이 ‘기독교영화’냐 ‘기독교적 영화’냐 판단할 때 어려운 점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노아와 달리 영화의 노아는 방주 안에서 아들들과 갈등하는 평범한 한 인간이다. 둘째 아들 ‘함’의 사춘기 반항으로 아버지와의 내적갈등은 오히려 영화 노아의 작품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 불화가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속의 환상을 드러내는 갈등과 폭력으로 느껴져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의미를 만들어내어 영화 읽기의 깊이를 더한다.


거칠게 정리해서 두 편의 영화는 기독론과 구원론의 내용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영화가 아니라 성경에서 소재만 빌려온 기독교적 영화(종교영화)이다. 오늘날 영화가 종교가 되고, 영화관(극장)이 곧 교회가 되는 시대다.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종교영화는 교회 예배에 참석한 시간과 똑같은 심리적 위안을 주지만, 이 지점에서 “종교와 예술은 영원에서만 교차하며 하나님 안에서 만나는 평행선이다”(게라두스 반 데어 레우)고 한 이 레우의 단순한 유비에 주목하면, 영화는 종교의 대체물이 아니며 종교와 혼합될 수 없다. 로버트 브라운이 재인용한 ‘영화는 사람을 형상화하기 때문에 영화와 종교의 평행선은 사색과 대화를 요청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요컨대 영화와 교회는 대화가 가능하지만 구별되어야 한다.


영화 <노아>는 감독이 상상력으로 버무린 환타지(fantasy) 블록버스터(blockbuster) 영화라면, <선오브갓>은 예수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영상(imagery)으로 전형적인 예수영화(Jesus Film)와 다르다. 두 영화의 특징을 몇 가지로 비교 분석하여 정리해 보자.

첫째로 영화 <노아>는 성경인물을 소재로 한 성인용 프랜차이즈 할리우드 무비라면, <선오브갓>은 내레이터 요한의 에피소드 모음집 같은 청소년용 리터러시 영화다. 즉 성경 원작을 다양하게 변작(變作)시킨 프랜차이즈로서 교육용 영화다. 예를 들어, 모세의 기적을 그린 <엑소더스>을 비롯하여, <더 리뎀션 오브 카인>, <본디오 빌라도> 등 할리우드에서 성경 원작을 작가 나름대로 해석하여 영화를 만드는 붐이 일고 있다. 이제 성경도 기독교인만의 구원드라마에서 일반인 누구나 예술의 소재거리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 히스토리 채널 드라마 ‘더 바이블’의 일부를 영화로 옮긴 탓에 <선오브갓>은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 <노아>보다 훨씬 못하다.



미드 "The Bible"(10부작 히스토리채널 제작)




         왕중왕(1961)                       나사렛 예수(1977)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6)



다음으로 <선오브갓>의 장점은 그런 대로 영화의 매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없지 않다. <나사렛 예수>, <패션오브크라이스트>, <왕중왕> 등과 같은 과거 예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예수 이미지에서 벗어나 비주얼한 예수의 이미지를 재미있게 보여주었다. 비주얼 위주의 이미지는 중풍병자를 일으킨 기적, 물위를 걷는 베드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고, 최후의 일 주일 간의 여정, 그리고 승천에 이르기까지 인류 구원의 슈퍼스타로서 모습을 밝고 명쾌하게 그렸다. 과거 18세기 유대교 부흥에 공을 세운 하시디즘(Hasidism)운동의 시조 바알 셈 톱(Baal Shem Tob)은 교회에서 어려운 설교만 하니까 유대교도 활력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설교보다 쉽고 재치 있는 이야기나 조크로부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사람들 틈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의 모습은 유머있게 묘사했다. <선오브갓>은 감각적인 미디어 문화에 젖은 젊은 크리스천들을 위한 풍부한 감수성과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는 성경 리터러시용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오브갓>의 아쉬움은 셋째로 이미지 과잉이 성경 내러티브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비기독교인들이 <선오브갓>을 볼 때, 내용면에서 다소 불친절한 부분이 있다. 복음서 이야기에서 중요한 수태고지가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세례받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면서 메시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영화에서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물론 영화 감독은 요한의 시각에서 베드로의 고백에 의존하여 대화로 표현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메시아로서 예수가 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지? 이 질문에 이르면, 자칫 기존 종교(당시 유대교)에 저항한 선동가와 정치적 사건으로 오해를 받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첫 장면부터 ‘변화(개혁)하라’는 말 속에 감독의 의도가 들어 있어 보인다. 우리는 성경을 읽기만 해도 자신을 개혁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유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한편 넷째로 우리가 성경의 행간을 놓치고 유아기적 상상 속에 머문다면 신앙생활을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는 성숙함은 요원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화 속 장면과 장면 사이를 유아기적 상상에 머문다면 미학이 주는 메시지를 놓칠 수도 있다. 미학 속의 불편함을 준 영화 <노아>이지만, 영화 완성도 면에서는 <선오브갓>보다 더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노아>는 홍수 이전, 방주에서의 생활, 그리고 홍수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큰 논란은 홍수 이후다. 노아의 위대한 인간적인 모습은 외로운 싸움 끝에 살아남았지만 자기 가족만 살아남았다는데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발가벗은 몸으로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잠이 든다. 이것이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노아다움일까? 옷이 치부를 가리고 위엄을 세워주는 데 있다면, 분명 차남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지 못했다. 어린 아들에게 있어 벌거벗은 아버지는 권위가 없다.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필리프 쥘리앵)의 분석대로, 어린 아이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다.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은 그 아버지다움을 내던진 아버지, 상상계 밖의 실제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다(고명섭, ‘노아의 외투’ 칼럼中).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유아기를 벗어나 성인으로 성숙하는데, 기독교(복음)와 영화(문화)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어졌다. 다시 말해 그 관계는 영화와 관객 간의 관계이다. 성인식을 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한국의 기독교는 영화 의미의 층들을 다양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성인식을 치르는데 지렛대가 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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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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