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소통/영화] (리뷰) 요한이 본 예수, 영화 <선 오브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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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본 예수

<선 오브 갓>(크리스토퍼 스펜서, 드라마, 12, 2014)



 최성수 박사

 

<선 오브 갓>은 기독 영화이며 또한 성경 재현 영화이면서 특히 예수 생애를 표현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영화로 불린다. 이번 영화 상영은 <신이 보낸 사람>, <노아>, <시선>등의 개봉과 함께 최근에 한국에서 일고 있는 기독 영화의 르네상스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과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예수의 고난에만 집중해서 표현함으로써 비록 고난의 탈신화화에는 성공했어도 오히려 가학적인 장면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노아>가 비성경적인 장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격한 혹은 냉혹한 반응을 일으켰다면, <선 오브 갓>은 큰 무리 없이 감상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비교적 성경에 충실한 표현을 위해 고심한 흔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일부는 이 작품이 영지주의와 뉴에이지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적인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때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받아야 한다면 요한복음 자체가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영지주의적이다 혹은 뉴에이지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성경 재현 영화로서 기존의 예수 생애를 다룬 영화와 비교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는 기존의 다른 영화들이 공관복음으로 알려진 세 복음서를 기반으로 하되 요한복음을 참조하면서 예수 생애를 종합적으로 전해주려고 했던 것에 비해, <선 오브 갓>은 사도 요한이 전해주는 예수의 모습에만 집중한 것이다. 곧 사도 요한의 기록에 근거하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참고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의 탄생 장면과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 그리고 가상칠언 가운데 일부이다. 따라서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복음서 전체가 그려내고 있는 예수 혹은 성경의 예수가 아니라 요한복음의 예수, 특히 다른 복음서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기록된 요한복음의 의도가 잘 표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의 예수를 오롯이 표현할 수는 없었다.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의 예수 영화들이 예수의 생애 가운데 수난사에 집중하고 있는 것과 달리 스펜서 감독은 예수의 고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과 재림에 대한 메시지를 부각시켰다. 영화가 고난만이 아니라 재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요한의 계시록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한복음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감상자로서 요한복음의 특징이 영화에서 나타나길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록 내용의 차이를 제외하고 요한복음의 특징은 그다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에고 에이미(나는~이다)” 표현이 주는 강력한 임팩트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고,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생명과 죽음이라는 이원론적인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장면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몇 가지 사건들도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사실 요한복음의 예수를 영화로 표현하려고 했다는 시도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한의 관점은 다른 복음서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의 생애와 관련해서 역사적인 관점을 특별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적인 모습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서 예수를 겨냥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영성복음이라 불리는 까닭도 예수에 대한 이야기기를 역사가 아닌 영적인 관점으로 조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역사적으로 이해될 성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예수를 생애를 그려내는 영화로 재현하려고 했다면, 감상하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궁금해지는 것은 복음서와 서신서 그리고 계시록의 기록을 가능하게 해준 요한의 신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점을 전혀 부각시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이 제기된다. 감독은 요한복음의 예수를 말하면서도 요한복음의 사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든 것일까?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세 개의 장면을 함께 묶어보면 어느 정도 감독의 의도가 파악될 것이라 생각한다. 첫 번째는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무엇 때문에 내가 당신을 따라야 하는가를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change the world)’라는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이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보다 감독은 두 개의 상반된 장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하는 장면과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대조적인 장면이다. 빌라도는 정복자로서 군림하는 자로서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그가 가는 길은 백성들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물론하고 폭력적으로 청소되어야 했다. 이에 비해 예수는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였고, 사람들의 자발적인 복종과 환호를 받았다. 그가 가는 길엔 해방과 자유와 치료가 현실이 되어 일어났다. 이것은 감독이 의도하고 있는 상반된 두 세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복과 군림 그리고 억압의 세계는 평화와 자유와 진리의 세계로, 곧 하나님의 통치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영화를 통해 표현된 장면 하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종교행위를 보장받기 위해 정치와 야합하는 태도이다. 그들이 정치와 야합하게 된 이유는 유월절이 빌라도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수라는 고민거리를 유월절 이전에 해결하려고 한 까닭도 그의 등장으로 일어날 수 있는 소요 때문에 빌라도가 유월절을 방해할 것이라는 위협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유월절이라는 유대교 최대 절기가 방해받지 않기 위해 예수를 서둘러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종교라는 틀이나 형식이 아니라 진리와 영 안에서 참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강조했던 예수의 정신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현상이다.

 

결국 예수가 바꾸어야 할 세상과 관련해서 감독은 정치와 종교의 측면에서 고려된 세 개의 장면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혁명가로 그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은 영화에서 충분히 읽어볼 수 있다.

 

한편으로 아쉬운 점은 요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시록의 내용 일부를 삽입했던 것처럼, 요한 서신서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 삽입되었으면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만일 서신서의 내용에 근거한 장면을 반영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오신 예수의 모습과 메시지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요한복음에 근거해서 예수를 재현하려는 시도는 매우 참신한 시도이지만, 신학적인 성찰의 부족과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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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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