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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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교회에 대한 알레고리적 성찰

<신의 소녀들>(크리스티안 문쥬, 드라마, 15세, 2012)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낙태가 금지된 시기에 젊은 여성의 겪는 부조리를 그리면서 과거 챠우체스쿠 독재 정권이 지배하던 루마니아의 불법적인 정치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폭력적인 정황을 드러낸 수작이었다. <신의 소녀들>(원제는 Beyond The Hills “언덕을 넘어”)은 2012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에 초청작으로 상영된 바 있다. 한창호 영화평론가는 전편은 루마니아의 과거를 그렸다면, 이번 영화는 루마니아의 현실을 그렸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영화적인 내러티브로 보여주는 데에 천재성을 보이고 있다. 좋은 영화는 다양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는데, 그의 작품은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이지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어 미학적으로 매우 돋보인다. 특별히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 전체를 통해 특정한 사실을 은유하는 알레고리라는 비유법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영화의 이야기를 공감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관건이다.

 

영화 이야기

영화의 지역적인 배경은 동유럽 국가로 EU에 가입한 나라이며 우리에게는 집시의 나라로 잘 알려진 루마니아다. 두 명의 여주인공은 칸 영화제에서 공동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그러니 원이 아니라 타원형을 연상하면 되고, 그만큼 내용전개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 영화라고 보면 되겠다. 영화는 2005년에 한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에서 퇴마의식을 행하다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었던 사실을 담은 논픽션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고아원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두 젊은 여성 보이치타와 알리나가 가는 길은 달랐다. 감독은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여러 장면을 통해 두 사람이 과거 단순한 친구 이상의 관계를 유지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헤어진 후 보이치타는 도시에서 떨어져 언덕 너머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전통의 수도원에서 수녀로 살아가고, 알리나는 입양된 후에 루마니아를 떠나 독일로 가서 생활했다. 알리나가 독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루마니아 출신의 여성이 홀로 독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분명 이주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다양하면서도 험난한 경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알리나가 다시 고향으로 온 표면적인 이유는 취직을 위해 필요한 졸업증명서를 떼고자 한 것이었지만, 내심은 보이치타를 데려가기 위한 목적이 컸다. 고아원 출신의 여성들이 늘 그렇듯이 생계 문제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보이치타 역시 그렇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알리나는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면 어렵지 않게 보이치타와 함께 떠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보이치타는 이미 수도원에서의 삶에 익숙해졌고, 그것을 하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이치타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알리나의 수도원 생활은 정상적이 아니었다. 먼저는 자살 소동을 벌이다 발작을 하여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게 된다. 환자에 대해 분명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의사는 병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알리나가 수도원에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의 방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은 매우 대조적인데, 하나는 성상이고 다른 하나는 모나리자다. 의사의 삶이 두 개의 세계 속에 있음을 암시한다고 본다. 두 개의 세계를 오가다 결국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회복될 때까지 머물도록 허락을 받은 알리나는 수도원에 머물며 보이치타와 함께 보내는 기쁨을 잠시동안 갖는다. 그러나 신부에 의해 입양 가족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받고 가지만 자신이 있을 곳을 이미 빼앗긴 상태다. 불편한 상황을 파악한 알리나는 신부의 말대로 자신의 물건과 돈을 모두 기부하고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고집한다. 수도원 사람들은 당황하지만 보이치타의 간곡한 부탁으로 허락을 받는다.

알리나의 본심은 수도원 생활에 있지 않았다. 보이치타의 마음을 돌려 함께 떠날 것을 종용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보이치타의 신념에 부딪혀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알리나는 보이치타가 믿는 신에게 기도함으로써 응답을 받고자 했는데, 신부에게만 허락된 공간을 침범함으로써 수도원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결국 수녀들은 그녀가 악마에 사로잡혔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부에게 퇴마의식을 행할 것을 요청한다. 신부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책임 수녀와 보이치타의 간청에 못 이겨 먼저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오빠의 허락을 받은 후에 퇴마의식을 행한다. 결국 며칠 동안의 감금과 구금 그리고 금식을 이기지 못하고 알리나는 퇴마의식의 과정에서 의식을 잃는다.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간 알리나는 이미 죽어 있는 상태다. 손과 발에 줄에 묶였던 흔적을 확인한 의사는 문제를 삼고 경찰에 신고하였고, 이어서 경찰이 출동하였다.

 

영화 내용 분석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사건의 전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친구를 찾아 온 젊은 여성이 자신의 뜻이 좌절되자 발작 증세를 보였고, 이것을 악마의 소행으로 판단한 수도원 사람들은 신부에게 퇴마의식을 간청했으며, 순전히 종교의식인 퇴마의식 도중에 그녀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감독은 루마니아에서 일어났던 이 사실로부터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그리고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독의 생각을 읽어내기 위해선 먼저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을 그가 어떻게 재현했는지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성과 속을 철저하게 구별하는 신부의 폐쇄적인 태도이다. 수도원 밖은 죄와 이교도적인 것으로 가득한 곳이어서 한번 나서게 되면 고해성사 없인 다시 수도원으로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생각했다. 둘째는 신부의 권위적인 태도이다.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수녀들 사이에서 회자하는 그에 대한 소문을 보면, 신부는 실제와 매우 다른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었다. 퇴마의식을 간청한 이유도 수녀들이 그의 치유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수도원 밖에 대한 편견은 신도들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는 신부가 수도원 운영에 신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는 태도는 수도원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넷째, 종교적인 세뇌가 이루어진다. 보이치타는 사실 알리나와 함께 수도원을 떠나보고 싶었다. 석 달이 못되는 기간 동안 알리나와 함께 살아보기 위해 비자를 신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부의 말과 태도는 보이치타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종교적으로 이미 의미가 부여된 삶이기 때문에 보이치타는 알리나의 생각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다섯째, 알리나의 양부모의 태도다. 알리나가 그들의 집을 떠나면서 보여준 태도는 그녀가 양부모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암시한다. 게다가 유일한 혈연으로서 오빠는 정신지체다.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산다. 여섯째, 비록 수도원에서 사망 사건이 일어나긴 했어도 수도원 사람들은 그렇게 사악하지 않았다. 수도원 생활도 알리나 본인이 원한 것이었고, 알리나의 완고한 거부가 있었기 때문에 묶어둔 것일 뿐, 그들은 사실 퇴마의식이라는 순수한 종교의식을 거행했을 뿐이었다. 일곱째, 인물들의 캐릭터다. 알리나는 외부에서 온 인물이고 세속적인 삶에서 만족을 느끼며 산다.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보이치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마지못해 고해성사를 할 뿐이다. 신부는 성과 속의 구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수도원 사람들 사이에서 권위를 대표한다. 보이치타는 신부와 알리나 사이를 오가며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혀 있다. 여덟째, 차에서 기다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경찰들이 나눈 대화에서 엿볼 수 있고 또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에 흙탕물이 튀기는 장면에서 볼 수 있지만, 이 모든 일들이 지난한 겨울로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어느 정도 희망을 보지만 그 기다림과 희망을 무색케 하는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는 말이다. 속은 놔두고 겉만 고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

앞서 던졌던 질문을 이곳에서 반복해보자.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은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성과 속을 구별하는 폐쇄적인 태도가 빚어내는 비극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제도의 중심은 그대로 놔두고 겉만 포장하는 모습을 감독은 지적한다. 수도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 언덕이라는 것은 그곳이 넘어서야 할 곳을 환기한다. <위대한 침묵>이나 <사랑의 침묵>에서 볼 수 있듯이 수도원의 삶이 단지 구태의연한 삶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곳의 영성과 삶은 세상의 삶을 밝혀주며 또한 새로운 회복을 가져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물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옛 제도에 매여 변화를 거부하며 사는 모습이다.

감독의 이러한 관찰은 그의 현실의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 보여주었듯이, 이번에도 역시 감독은 루마니아 현실을 영화로 빗대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1990년대 이후로 동유럽에는 민주화라는 새로운 물결이 유입되었다. 민주화와 더불어 나아질 것으로 믿었지만, 양부모와의 삶이 말해주고 있듯이, 루마니아 국민들은 믿을 수 없는 일만을 겪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는 정신지체를 가진 오빠와 같은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루마니아는 2004년에 EU에도 가입했고 그것으로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 변한 것은 겉모양일 뿐이다. 다른 EU 국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비 EU국가와 다를 바 없는 3등 국가 취급을 받고 있다. 독일에서 온 알리나는 EU라는 거대 국가의 모습을 상징한다. 유럽에 소재하면서 EU를 외면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에서 루마니아에 대한 EU의 태도는 수도원에서 원하지 않았지만, 친구 때문에 억지로 받아들인 알리나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본 것이다. 또한 알리나에 대한 수도원의 태도는 내부의 변화는 거부하면서 외양만 바꾸었을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함의한다. 암울한 시대가 연속이고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도 금방 암울해지는 일이 반복될 뿐이다.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그냥 놔두라는 말처럼 들린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

영화의 알레고리는 비단 루마니아 현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다양한 현실도 볼 수 있게 해준다. 첫째,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고 국격의 향상과 함께 번지르르한 외양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을 발견한다. 국제적으로 요구되는 각종 외교 관계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잘 적응해 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 주택문제, 교육문제 등. 특히 대선이나 총선 같은 선거와 관련해서 각종 복지 제도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또 그것을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지만,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정치가 바뀌지 않고 정치인의 생각과 행위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리고 국민의 성숙한 의식이 발휘되지 않는다면 의식과 삶의 불균형으로부터 오는 불행은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뿐이다. 민주화의 봄은 이미 오래 전에 왔지만 안철수 신드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에 대한 불신만 커진 상태가 되었다.

둘째, 영화에서 한국 교회 현실이 보인다. 요즘은 그런 일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죄악이 관영했다는 말을 통해 상대적으로 교회는 선하다는 편견을 갖도록 유발하는 설교와 교육이 계속되고 있다. 성과 속의 소통이 불가능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세상에서의 삶을 회피하고 오직 교회생활과 교인들과의 관계로 만족하려는 기행이 일어난다.

게다가 교회에서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차이를 소위 영적인 면에서 이해한다는 핑계로 중세의 마귀사냥을 연상케 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실이 떠올려진다. 목회자와 생각이 다르면 교회를 옮겨야 할 정도이다. 현실적으로 이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회자의 생각에 맞춰 살아가는 교인들이 있을 정도다. 교회는 그것을 은혜와 덕으로 포장한다. 누가 옳은지를 판단하는 일이 쉽진 않지만,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지 않을까?

특히 목회자의 영성과 영력에 대한 비정상적인 신뢰 곧, 소위 목회자에 대한 신성화는 목회와 개인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부조리한 행위를 신적인 권위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오도한다. 목회자의 요구를 신의 요구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무리한 헌신이나 성추행 등에 대해 성도들이 아무런 거부의사를 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를 개혁하려는 목소리는 늘 이런 문제들을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을 뿐 실제로 중심으로까지 진입해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속은 놔두고 겉만 고치려는 태도 때문이다. 교회 문제의 중심에는 먼저 신학이 있다. 교회의 잘못은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한다. 설령 개인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결국 그의 생각, 그의 신학의 오류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학은 알고 있다고 해도 일어나는 일은 현실과 겪는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며, 이것은 잘못된 신학적 판단행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종교개혁은 루터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루터와 다른 점은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딛고 있는 신학 곧 의화론을 문제 삼았던 것이고, 다른 개혁가들은 주로 가톨릭의 비행을 문제 삼았다는 데에 있다. 루터의 성공은 신학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교회의 중심 문제는 개인과 교회에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은 물러나야 하고 교회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은 평생직으로 위임받았고, 교회는 어떻게 해서든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빚을 얻어 수십억 수백억의 돈으로 세워진 교회는 상생보다는 경쟁구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주님은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하셨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거나 공중부양의 상태에서 착지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은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교인들을 힘들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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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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