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소년>



기다림의 미학

<늑대소년>(조성희, 판타지, 드라마, 15세, 2012)

 

(스포일러 있슴)

인간은 이야기 동물이다.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이야기를 만들고 또 말하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보고 이해하며, 때로는 하나의 이야기로 살아간다. 대개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전형으로 삼으나 요즘같이 다문화시대에는 이질적인 것들이 혼합된 이야기로 가득하다. 현대사회에서 이야기는 소통의 방식으로써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보사회 이후의 시대를 지칭하며 롤프 옌센이 말한 ‘드림 소사이어티’는 감성을 자극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소통 방식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를 말한다. 이성시대는 가고 감성시대가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소재가 다양화되고 또 다변화되었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이것은 소재와 주제 그리고 이야기의 구성에서 발견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인류가 공감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상호 소통할 수 있는 토대이다. 달리 말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내 안에서 울림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미학적인 측면에서 좋게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흔히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는 말로 공감했음을 표현한다. 좋은 이야기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동일한 주제라도 소재가 참신하고, 캐릭터가 새롭다거나 독특하고, 혹은 비슷한 이야기라도 어떤 얼개에 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늑대소년>은,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회자하고 있는, 뱀파이어와 늑대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 <트와일라잇>에서도 볼 수 있지만, 유럽과 북미의 전통에서 호러와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늑대’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철수와 순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늑대아이>(2012)는 서구적인 이미지에 일본 전통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영화는 서구에서 이미지를 차용했으면서도 서구에서 사용되는 호러나 공포 이미지와는 다른 맥락에서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 특히 <늑대소년>은 늑대라는 동물의 본성(암컷에 대한 충실,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결코 잊지 않고 끝까지 유지되는 혈연관계 등)을 충실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늦가을의 정서에 맞는 감성을 자극하는 판타지 이야기와 그 얼개는 사실 그렇게 신선하진 않다. 그러나 ‘감동’을 제대로 걸러내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사랑의 모습인 ‘기다림’을 공감적으로 재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늑대소년로 분한 송중기의 표정 연기는 압도적이다.

영화는 늑대소년이 시골 한적한 곳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공포 분위기의 상황을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미국에 사는 순이 할머니가 한국의 시골을 방문하고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하면서 전개된다. 어린 순이(박보영 분)의 가족이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로 이사 온 까닭은 순이의 폐병 때문이다. 조금만 뛰어도 호흡이 가쁜 병약하여 학교도 갈 수 없을 정도인 순이는 자신을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언제나 절망적이다. 그러나 헛간에 버려져 있던 늑대소년을 만난 이후부터 순이의 마음과 생각은 바뀌기 시작한다. 야성 가운데 순수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소년에게 철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철수가 인간으로서 살도록 가르치면서(사실은 애견 길들이기 교본에 따라) 그녀에게는 할 일이 생겼고, 함께 보내는 기쁨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순이와 철수는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존재가 된다. 정상인과 같지 않은 체온과 철골 구조물에 부딪히고도 멀쩡한 강인한 골격은 주위 사람들 모두를 놀라게 하지만, 철수의 숨겨진 본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철수는 늑대의 야성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지만, 부잣집 아들 지태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순이를 본 순간 분노가 폭발하여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위기에 빠진다. 게다가 철수의 출생에 군사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밝혀지면서 철수는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순이는 철수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기다리라는 쪽지 하나를 남기고 집을 떠난다.

그 후 47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가족과 함께 미국에 살면서 한국을 방문한 순이 할머니는 어린 시절의 시골집에서 그때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철수를 만난다. 자신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았는데, 오랜 세월을 자신을 기다리며 홀로 그곳에서 살았던 철수, 그 변하지 않는 사랑을 보고 순이 할머니는 흐느낀다. 기다림의 미학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다.

어린 시절의 동화 같은 추억으로만 여겨진 평범한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감동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바로 47년의 세월을 탓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철수의 순진무구한 표정과 기다림 때문이었다. 그리고 늑대소년 철수의 기다림이 오늘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인 기다림을 상기해주기 때문이다.

대체로 기다림을 공감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은 아름답다거나 혹은 좋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1975), 장-피에르 쥬네의 <인게이지먼트>(2004), 라세 할스트롬의 <하치 이야기>(2009), 장진 감독의 <된장>(2010)등을 포함해서 많은 영화에서 기다림은 영상적인 표현의 주제로서 사용되었다. 예로 든 네 영화는 기다림의 미학에 있어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기다림이 이토록 미학적 가치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성향에 거스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편한 것을 택하고 따르며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다림은 이것과 다른 것을 요구한다. 편한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때로는 거칠고 험한 길을 가야만 한다. 상황에 대처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변모개로 변하는 것은 안 된다.

기다림은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어린 예수님의 모습을 본 시므온 할아버지의 감동적인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기다림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출14:13-14). 그리스도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기다림은 믿음의 한 부분을 표현한다. 재림의 약속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여러 약속들이 성취될 것에 대한 기대는 기다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자가 초림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듯이, 기다리는 자가 재림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예술에서 기다림은 미적 가치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길 기다리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변절하고, 또 그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유를 나열하는가. <늑대소년>의 순이는 이런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 철수를 자신의 펫으로 길들이면서 자신을 기다리길 바라지만, 결국 그녀 자신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있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났지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은 변함없이 지속되는 기다림으로 표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기다리며 소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내맡기는 가운데,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이다.

잠시 후면 대강절이다. 대강절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이며 기다림을 묵상하고 훈련하는 절기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아이들의 대강절 달력(날짜마다 초콜릿이 들어 있는 달력)처럼 그렇게 기쁨을 주고 또 소망의 시간이지만, 실제의 삶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는 실망과 고통과 상실 그리고 때로는 좌절로 점철된 시간이며, 또 누구에게는 그 가운데 꿋꿋하게 일어서며 새날을 희망하기를 배우는 시간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또 삶의 깊이를 위해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대강절은 기다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무엇보다 내가 진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반성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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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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