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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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미래를 위해 현재는 어떠해야 하는가

<루퍼>(라이언 존슨, SF, 액션, 청소년관람불가, 2012)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힘겹고 복잡한,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놀이는 시간과 공간을 갖고 노는 일이다. 기껏해야 공간을 줄이거나 확장하고, 혹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시간 역시 심리적으로 다소 연장하거나 빠르게 가게 할 순 있어도 거슬러 가거나 앞서 갈 수는 없다.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개념을 차용해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웠던 철학자 칸트가 말했듯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선천적인 조건으로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정의되는 존재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정의이기도 하다. 이것은 비록 아인쉬타인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뉴튼의 생각을 넘어 새로운 이해를 열었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사실 아인쉬타인은 뉴턴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수정했을 뿐이지 물질이, 인간이 시공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만일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인간이라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시간과 공간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기에, 그동안 지구상의 거의 모든 것들을 갖고 놀 수 있었고 또 앞으로 그 범위는 무한정으로 확장할 수 있다 해도 적어도 시간과 공간만큼은 인간의 놀이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완전한 불가능이란 없는 것 같다. 당대의 과학과 기술로는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극복할 단초를 제공해 왔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그것을 구현해 왔기 때문이다. 아직 실현되진 않았지만 상상력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우리의 이성을 흥분시키는 것이 타임머신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에 대한 상상은 과거에는 만화와 그림 그리고 소설 등을 통해 상상되었고, 과학 기술의 발달은 상상의 세계를 가상현실로 옮겨 놓았다. 상상과 현실의 중간단계에는 영화가 있다. 사실 상상된 것들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다 기술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컴퓨터 기반 영상기술의 발달은 그동안 상상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던 것들을 가시적인 혹은 감각적으로 지각이 가능한 것으로 재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는 ‘상상할 수 있다면, 존재할 수 있다’는 명제가 그렇게 낯설지 않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를 압도하는 현대에 와서는 특히 그렇다. 실제로 가능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예술의 영역에서 시뮬라크르(실제보다 가상현실이 더 강력한 경험을 주는 현상)는 경험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갖고 노는 일은 영화에서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터미네이터>(1984), <나비 효과>, <시간을 달리는 소녀>, <백 투더 퓨처>, <인셉션>, <소스코드>, <시간 여행자의 아내>, <미드나잇 인 파리>등이다.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거나 과거의 세계 혹은 미래의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을 파괴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뒤섞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워낙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이다 보니 이런 종류의 영화는 매우 복잡한 내러티브 구조를 갖는다.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도 놓치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이들 영화에서 또 다른 공통점은 지금 곧 현재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로의 여행이나 혹은 미래로의 여행을 말하고 있다 해도 결국 중심은 현재이다. 현재를 위해 과거를 수정하거나, 미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결국 현재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상상은 결국 현재의 삶에 수렴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루퍼> 역시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다. 소재가 신선하고 창의적인 부분이 있으며 스토리텔링에도 큰 무리가 없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화의 주제가 많은 성찰의 가능성을 갖고 있어서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시간 여행을 다룬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론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 대표적인 부분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서로 맞닥뜨리며 갈등 관계로 전개시키고 있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044년. 타임머신이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2044년부터는 가능해진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타임머신이 범죄조직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용됨으로 인해 2074년에는 금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인 메이커라 불리는 악당에 의해 타임머신은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미래 시대에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30년 전의 세계로 보낸다. 그리고 미래로부터 현재로 내려온 사람은 이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을 살인하는 자로 고용된 자는 루퍼로 불린다. 어려서 엄마에게서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조(조셉 고든-래빗)는 조직 내에서 실력있는 킬러로서 인정받는다. 루퍼의 임무는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가 매우 혼돈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루퍼는 책임을 지고 제거된다. 경우에 따라서 루퍼들은 30년 후의 자신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를 가리켜 ‘계약 해지’라고 말한다. 30년 후에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루퍼들은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흥청망청 살아간다. 결국 미래 없는 현재의 삶, 곧 절망과 포기를 이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실력 있는 루퍼로 살면서 프랑스로 이주할 꿈을 갖고 사는 조에게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자신이 죽일 대상으로 미래의 자기(브루스 윌리스)와 조우했고 또한 그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조가 오게 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는데, 레인 메이커에 의해 살해당한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장차 악당으로 성장할 어린 레인 메이커를 제거해 아내의 죽음을 막을 생각으로 30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말하자면 현재의 조가 장차 사랑하게 될 여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니 굳이 이의를 제기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조는 자신이 살기 위해 미래의 조를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에 안착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미래의 조와 그의 주장은 당연한 명분을 얻는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거쳐 미래의 조로 성장하게 되는지를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현재의 조는 정황을 듣고 난 후로 고민하며 갈등하게 된다. 자신의 미래이니 결국 미래의 조에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다. (복선적인 장면에서 미래의 조는 현재에 제거되었을 때 절망의 삶을 살아 간 결과로 표현된다. 그리고 중국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이후로 개과천선하여 행복하게 살아간다.)

한편, 두 명의 조는 서로 흩어져 레인 메이커를 찾으러 다니는데, 현재의 조는 시골 한적한 곳에 이르러 그곳에서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여인의 아들이 미래의 레인 메이커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래의 조는 그를 죽이려고 하지만, 현재의 조는 그것을 막으려고 한다. 양자의 갈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첨예하게 나타나고,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엄마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미래의 조를 보면서 현재의 조는 엄마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레인 메이커로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는 엄마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미래의 조를 제거하는 것인데, 가지고 있는 총이 적중률에서 떨어지기도 했겠지만 그를 제거함으로써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그 가능성을 희생에서 찾고자 한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상상과 선택은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얻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이 엄마로부터 버림받았고, 결과적으로 킬러로서 살아오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엄마의 보호와 양육아래 미래의 악당으로 자라지 않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는 매우 충격적인 전개이긴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엿볼 수 있다. 미래와 현재 사이에서 우리는 결국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만일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누구나 미래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두 개의 상황을 서로 대조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미래는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한 것이고, 현재는 장차 악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위기의 순간에 현재의 조가 보았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보호와 양육 아래 보통아이로 성장할 아이의 미래였다. 만일 아이가 제대로 양육된다면 비록 자신은 사라진다 해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악한 레인 메이커에 의한 희생은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담한 모험이었다. 미래의 조는 현재의 조에게 있어 필연이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결과를 거부하고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자살로 볼 수 있지만, 현재의 조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절망이다) 인류를 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한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 지는 결국 현재 어떤 보호와 양육 아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점은 결국 미래 자체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복선으로 제시해 준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미래의 조는 비록 개과천선하였지만 절망적인 삶의 결과였다. 현재의 조는 그 사정을 알 수 없었다 해도 영화가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미지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미래가 절망적인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은 아무리 미래라고 해도 결코 좋은 것일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밝은 미래를 위한 길이다.

현재는 소망의 기회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다. 미래를 포기하며 절망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교회는 바로 이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세상의 소망으로 구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점점 피폐해져가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현장과 삶의 자리에서 교회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로 각인되어야 한다. 교회가 이 시대의 소망이라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과제이다. 희생해야 할 일이 있다면 희생하고, 투자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결과야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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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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