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



반응형

뜨거운 기억의 단편

<남영동 1985>(정지영, 드라마, 2102, 15세)

 

세상은 하나님의 드라마가 이뤄지는 곳이다. 다양한 내용과 여러 형식의 연출로 가득해서 하루하루가 흥미진진하다. 하나님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이면서 드라마의 주된 역할을 담당하신다. 인간은 조연이다. 조연으로서 역할이 작지 않음에도 종종 만족하지 못해 자주 주연을 탐낸다. 그 탓에 연출 의도는 흐트러지고 뜻하지 않은 해프닝이 일어난다. 스스로를 망치는 일인데, 여기에는 이유가 없지는 않다. 수많은 역할 가운데 하나를 살아갈 뿐인 인간은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기는 하나, 그것이 어떠했는지 또 장차 어떻게 될 지, 그 전모를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연기자가 자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필름을 모니터링 할 때다. 카메라에 담겨진 내용을 볼 때 비로소 자신의 연기가 시나리오와 감독의 연출에 부합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역사를 성찰하는 일은 마치 필름을 모니터링 하는 것과 같다. 현재를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말과 행위를 단지 의식할 뿐 그 진상을 보지 못한다. 그나마 돌아볼 수 있고 때때로 의미를 예감할 수 있는 길은 역사를 통해서다. 역사를 성찰할 때 비로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되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사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를 잊는 것은 곧 하나님을 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역사를 보는 방식이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면서 기억에 대한 감도가 많이 달라졌다. 문자를 읽음으로써 머릿속 기억으로만 머물러 있던 일들이 영상을 통해 재현됨으로써 가슴의 기억으로 바뀌고 있다. 정지영 감독은 <남부군>, <하얀 전쟁>과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이후에 주목받지 못한 세월을 보내고 난 후 <부러진 화살>로 충분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남영동 1985>으로 또 한 차례 사회의 이슈가 되었다. 고 김근태 의원의 수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종종 영화상의 한 장면으로 사용된 ‘고문’의 사실, 그리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차가운 기억을 생생하게 느끼고 또 뜨거운 가슴의 기억으로 되새기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는데,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에서 자행된 인권 유린의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사실 정부의 정책은 국민들의 수많은 이해관계 때문에 언제나 찬반의 갈등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정책 수행의 효율성을 위해 상황에 따라 종종 부당한 방법들이 사용된다. 이 방법으로 유신정권을 포함한 군사독재 시절에는 폭력과 고문이 사용되었다. 영화는 바로 이 사실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고 김근태의 고문 사건을 소재로 영상으로 폭로한다. 제작 의도는 듣고 읽기만 했던 것을 보고 느끼도록 하는 데에 있다. 고문의 현장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마성을 알게 된다. 인권 유린의 현장은 역겹고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고문에 의한 자백이 진급을 위한 수단이 되고, 인간이 상실감에 빠진 직원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극도로 고통당하며 신음을 터뜨리는 순간에 휘파람을 불어대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능숙하게 고문하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사악함 그 자체였다. 그가 감옥에서 회개했다고 해서 출옥 후에 목사로 활동하도록 하면서 고문의 사실을 미화할 기회를 준 기독교는, 비록 나중에 면직 처분을 했다 할지라도, 분명 비난받아 마땅할 일이다. 충격적인 영화 내용 탓에 관객은 유신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가능하게 한 폭력성과 마성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에서 각종 형태의 폭력과 고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짓밟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드라마를 망치고 그분의 연출 행위를 방해하는 일이다. 비단 종교의 모양을 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적그리스도적인 속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어떤 모양의 폭력이라도 허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팎에서 정책의 효율성을 이유로 정당화되는 강압적인 행위를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크다 할 것이다.

한편, 영화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영화의 속성상 영화를 통해 부당한 권력행사를 통해 일어난 사건을 뜨겁게 기억하도록 고통의 재현에 집중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다큐가 아닌 대중영화라는 입장에서 이야기가 없는 고문의 사실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적합한 방법이었을까? 만일 새디스트적인(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정권을 보고 즐기도록 할 목적이었다면, 경우에 따라 이것은 관객의 마조히즘적인(고통을 받으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성향을 자극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부지중에 관객을 변태성욕자로 만드는 일은 아닐까? 다큐가 아닌 대중영화에서 고문의 사실 그 자체에 그토록 집착한 것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하더라도 감독의 오판이라고 생각한다. 고문과 인권유린의 관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결핍을 비난할 수 없다 해도 분명 비판은 면치 못할 것이다.

끝으로, 역사라는 것도 결국은 현재, 특히 갖가지 힘으로 스스로를 무장한 인간에 의해 해석되기 때문에 역사 해석에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기에 세상은 언제나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해석에 전권을 부여하시지 않는 이유와 우리가 하나님을 종말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미래의 주님으로서 역사를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며 평가하는 관객이시기도 하다. 여하튼 역사를 기억하되 일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며 그분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다.

반응형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