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토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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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과 종교 그리고 정의

<더 스토닝>(사이러스 노라스테,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2)





종교가 본질에서 벗어나 어딘가에 빌붙을 땐 언제든지 괴물 같은 형상을 갖는다. 괴물이라는 것이 변형되어 괴상한 형태를 가진 생명체를 일컫는다면, 종교가 변질될 때는 결코 정상적인 모습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기형적이어서 충격을 주지만, 기세가 등등한 것이 대단히 위협적이다. 종교가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제 역할을 수행한다면 인간에게 소망을 주고 구원의 매개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종교는 언제든지 마성을 드러낸다. 다문화 사회가 반드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어떤 종교든 그것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다종교 사회에서 불가피한 종교 간의 대화에서 목적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종교적인 정체성과 특수성을 희석시키는 일은 가당치 않다. 만일 대화가 가능하다면 각자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도록 고무하고 환기하고 더 나아가서는 변질될 위험을 상호 예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종교 사회일수록 이런 의미에서 대화는 꼭 필요하며, 선의의 경쟁을 통한 긴장 관계는 건강한 다종교 사회를 위해 필수적이다.

본질이 왜곡된 종교가 어떤 형태의 괴물로 모습을 드러내는가를 알기 위해 굳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 역사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본질에서 벗어나 정치에 빌붙을 땐 신정정치를 표방한다. 그러나 종교가 권력을 등에 업게 될 때 인간의 각종 권리와 자유는 말살된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사기와 인권 침해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종교가 경제에 빌붙을 땐 부흥과 성장과 번영을 호언장담하지만 결국 물신주의와 맘모니즘으로 퇴색할 뿐이다. 현대 종교의 가장 심각한 위기를 물신주의와 맘모니즘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큼 현대 종교가 경제에 빌붙어 있다는 증거다. 종교가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정작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 자체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러나 구원을 매개해주는 종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로부터 구원을 기대할 것인가? 종교의 무의미성을 성토하는 단계를 넘어서 마침내는 종교의 소멸로 이어질 것이다.

한편, 종교가 본질에서 벗어날 때 이질적인 것과 결합하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인간의 욕망이다. 일방적인 소통의 주범으로서 사회 계층 간의 갈등을 촉발하는 주요 원인인 권위주의의 출발은 인간의 욕망이 종교의 힘을 빌었을 때이며, 인간의 욕망과 종교의 조합은 타락의 가장 초기 단계이다. 인간의 욕망은 생존을 위한 의지의 형태로 시작하다가 더 나아가서는 풍요로움을 추구하고, 나중에는 지배하려는 의지, 곧 권력에의 의지로 발전한다. 종교는 최상위 심급기관으로서 최고의 가치체계를 형성하고 윤리와 도덕과 계율 그리고 제도로써 인간과 인간사회를 규정하고 선도하지만, 인간의 욕망에 휘둘리게 되면 종교는 여지없이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불의의 노예로 전락한다.

2008년도에 제작되어 2011년에 한국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고 2012년에 국내에서 개봉된 <더 스토닝>은 사회영화로서 근본적으로는 이란 여성의 인권침해를 문제로 제기하고 있고, 또 이슬람 세계의 곳곳에서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는 투석형(돌을 던져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세계 여론을 깨우면서 이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지만, 필자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었다. 즉, 앞서 언급한 대로 종교가 인간의 욕망과 결합될 때 어떤 괴물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본다.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또 다른 맥락에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결합된 종교의 횡포는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스토닝>은 이란계 프랑스 저널리스트 프리든 사혜브잠의 소설 “더 스토닝 오브 소라야 M”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이란의 어느 마을에서 소라야라 이름하는 한 여인에게 일어났던 비극을 폭로하고 있다. 교도관으로 일하는 남자는 아내와 2남 2녀의 자녀들을 두고 있으면서도 14살의 소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종교적인 계율과 종교적인 배경에서 제정된 법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직자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그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얼마나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고 있는지에 대해 영화는 여러 가지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고급 승용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어가는 환자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새로 아내로 맞이할 소녀와 마냥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나, 아내 소라야에게 폭력적으로 이혼을 요구하고, 성직자의 약점을 잡고 그를 통해 이혼을 설득하는 태도, 그리고 결국에는 위자료를 지불하지 않기 위해 아내를 간통죄로 고발하기까지, 남편의 태도는 탐욕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의 탐욕에 힘을 실어주는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법과 성직자 그리고 시장이었다. 남성에게만 우호적인 이슬람 법에 따르면, “남편이 아내를 고발하면 아내는 반드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여야 한다. 아내가 남편을 고발하는 경우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유죄를 입증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아내 소라야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미 소라야와 간통 혐의를 받고 있는 남자는 성직자와 남편에게 매수당한 상태이니 그녀의 무죄 입증은 결국 불가능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은 사태가 정의롭지 않게 진행되는 것을 느꼈지만, 간통으로 고소되는 것에 대한 반대 증거를 확보하지 않는 한 법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협박을 통해 거짓 증인을 내세운 남편과 성직자에 의해 설득 당한 시장은 결국 마지못해 소라야를 투석형에 처하게 된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끔찍한 장면은 바로 친정아버지와 아들들이 돌을 던지는 일에 가담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소라야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도 하며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을 저렇게 미치게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알라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투석형을 집행하는 모습에서 간접적으로 찾을 수 있다. 바로 종교의 힘이다. 정의가 왜곡된 종교에 의해 규정되고 또 인간의 욕망에 휘둘렸을 때의 모습과 그 결과들을 영화로부터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경우에 정의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정의되고 또 실행되는가! 또 종교가 그것에 힘을 실어주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정의를 규정하고 불의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던 사례를 염두에 두신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에 휘둘려 종교가 바로 서지 못할 때 사회는 극도의 혼돈 속에 빠지게 된다. 정의가 실종되고 인권침해 사례가 속출한다.

성경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금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여호와 신앙이 인간의 욕망과 결합되는 것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함에 있다.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계명에서 잘 표현되고 있는데, 이 세 계명은 누구의 이상이나 신념도 하나님 앞에서는 차선일 수밖에 없으며,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이미지로 대체할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떤 권력을 쥐고 있든 하나님 앞에서 인간 곧 피조물에 불과하며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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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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