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와 교회 연재순서
#2.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예배에 대해 고민하는 목사님들께 드리는 서신(김명실)
#3.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인터넷 실시간 방송 예배 매뉴얼(이길주)
#4. 주일성수 예배자에서 사회 지킴이로: 재난에 대한 교회의 응전(안교성)
#5. '코로나19'와 함께 번지는 '가짜 뉴스' 바이러스(권혁률)
#6. '코로나19'와 교회, 공적 교회됨의 의미를 묻다(백광훈)
#7. 코로나19와 신천지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최삼경)
#8. 포스트 코로나: 함께 하는 날이 다시 찾아오면(송용원) - 현재글
한국교회는 어디서 났을까
한국 교회는 주일 예배에 모이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세계화로 모든 지역과 분야가 온통 연동되어 있는 지구촌이 지속적 온난화와 원시림 파괴로 인해 드디어 예상치 못하던 ‘포스트 코로나 시대’ 속으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인해 허물어지던 콘택트(contact, 대면접촉) 시대가 마침내 급격히 저물고, 주기적으로 찾아올 각종 바이러스에 대비하고 적응하며 형성되어갈 언택트(untact, 비대면) 시대가 ‘새로운 표준’(New Normal)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흩어지는 교회’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주장이 터져나오면서 기존의 ‘모이는 교회’가 급속히 쇠락하면 어떡하나 하고 기독교계는 어깨가 천근 만근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본래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관점이 다소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전염병이 퍼진 장안 길거리 한복판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쓴 『한국의 부름』(The Call of Korea)에 보면, 구한말 한양 도성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초기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병원을 설치하며 수많은 감염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고치다가 순직하기까지 그 헌신이 지극하여 정부 각료들조차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전염병이 지나가자,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를 서양 귀신이라 조롱하며 교회 근처에도 오지 않던 “나라 안의 빈부 귀천 모든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한국 교회에 계층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전염병 전이 아니라 후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전염병과 함께 본격적으로 모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는 전염병과 함께 흩어져 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모인다는 것
누가 뭐래도 모여야 교회입니다. 신약성서에는 교회란 에클레시아, 즉 가시적 모임 혹은 회중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만 내 이름으로 모여도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신체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지금도 감옥에 갇힌 자들,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 가난한 노인들, 집이 없는 노숙인들, 신앙의 자유가 없는 억압된 지역에 사는 이들, 전쟁으로 난민이 된 이들, 휴일도 없는 일터에 묶인 이들, 멀리 오지에서 봉사하는 이들은 사랑하는 형제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반면에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편안하게 드리는 그리스도인이나 여행과 레저를 즐기느라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코로나 19 사태에서도 확인했듯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선물이 되어 준다는 것
본래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함께’라는 ‘com’과 ‘선물’이라는 ‘munus’가 모인 말입니다. 공동체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모임이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서로 선물이 되어주는 모임일까요?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공동 선물을 받아 서로 공유하는 유기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선물은 그의 소유 일부를 떼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 그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선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선물이 되고자 그리스도는 친히 몸으로 직접 이 땅에 오셨고, 친히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친히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빵과 떡도 친히 떼어 주셨습니다. 선물을 건네 주는 분이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실재 현장에 오셔서 악수를 청하고 있다면, 선물을 받는 자는 마땅히 가상 공간이 아니라, 내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현장에 직접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육신의 교회는 언택트 공간이 될 수 없고 컨택트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컨택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커넥트(connect)하는 공동체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교회란 너와 내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만나는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접촉하고 만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직접적으로 정신적 사랑을 꽃피우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 사랑이 맺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다른 곳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서 계시기 때문에, 나와 너는 반드시 그분을 사이에 두고 물리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영국의 변증가 C.S. 루이스는 성부는 우리 앞에 계시고 성자는 우리 옆에 계시다면 성령은 우리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실재가 이러기에, 어떤 분이 우리 한국 교회는 앞으로는 주로 가상 공간에서 만나도 충분한 것 아닌가요? 아니면 아예 이렇게 된 것 그냥 가나안 교인으로 지내도 괜찮은 것 아닌가요? 물으신다면 되묻고 싶은 것이, 그렇다면 굳이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이유가 있을까요? 굳이 그대가 오늘도 가족이 있는 집으로 퇴근할 필요가 꼭 있을까요? 아니 굳이 그 먼 나라까지 비싼 돈 들여가며 여행 갈 필요가 꼭 있을까요? 그냥 가상 공간으로 충분할 텐데. 이렇게 되면 결국 솔직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결국 문제는 ‘모이느냐, 흩어지느냐’가 아니라 ‘갈망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사랑하고 있는가’ 입니다. 갈망하고 사랑해야만 몸소 찾아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형제들끼리 선물이 되어주고자 반드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다름 아닌 자신을 다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현존하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서 우리는 서로를 인간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먼저 신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서로를 형제로 만나는 것이지요. 본회퍼가 솔직하게 고백했듯이, 서로가 없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길은 요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혼자 막연히 사색하는 것보다, 내 앞에 있는 형제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로 고백하는 것이 훨씬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서로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온전한 하늘 사랑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말씀과 공동 기도, 공동 찬송과 공동 성찬, 공동 고백과 공동 섬김을 통해, 이 땅에 그대로 비추는 신적 거울이 되는 사건을 가리켜 성경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갈수록 세상은 갈망과 무정, 소외와 불안, 단절과 배제로 치닫는 인간의 언택트 도성에서 힘든 씨름을 해야 한다면, 교회 공동체야말로 삼위일체적인 감사와 온유, 우애와 평안, 연대와 포용이 가득한 하나님의 컨택트 도성으로서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껴안는 날이 찾아오면
신학자 틸리히의 말처럼,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시고, 우리가 바라지 않음에도 우리를 붙들고 있는 고독 속으로 밀어 넣으시는 분”입니다. 고독이 없이는 제기할 수 없는 진리와 자유와 창조의 문제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홀로 서 있는 날이 적지 않았습니다. 함께 하는 날이 그립기만 합니다. 얼마나 더 이러한 기간을 보내야 하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가 그분의 삼위일체적 사랑에 참여하고 그것을 반영할 수 있는 공동체로 탈바꿈될 수 있을 것인지 ‘검증’하는 시간으로 이렇게 ‘홀로 있어야 하는 날들’을 일부러 두시는 지도 모릅니다.
코로나19 이전에 한국 교회는 어찌 보면 소비주의, 개인주의, 기복주의, 번영 신앙에 물들어 꽃 길만 걷고 싶어하던 교회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에 한국 교회는 약함, 착함, 주변성을 선택하며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코로나19 방학을 마치고 다시 등교하는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영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외적인 교세가 혹시 다소 꺾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누룩으로서 갖는 권세는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코로나19는 (하나님과 교회와의 올바른 관계인) 영적 공동선의 철이 무뎌지지 않도록 (교회와 세상과의 올바른 관계인) 사회적 공동선의 철과 맞부딪히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한국 교회는 더 이상 눈으로 사랑을 그리는 예배나, 입술로 사랑을 말하는 교제를 멈추어야 합니다. 가난함도 부요함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참 사랑의 교제,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만남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난 날 우리가 정겹게 부르던 노래처럼) 가난함도 부요함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참 사랑의 교제,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만남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 송용원 목사(은혜와선물교회)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였습니다.
1.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정지련, 손규태 옮김. 『신도들의 공동생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2. C.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장경철 옮김. 『순전한 기독교』. 서울: 홍성사. 2001.
3. Paul Tillich. 『The Eternal Now』. SMC Press. 1963.
4. 다니엘 밀리오리 지음. 신옥수. 백충현 옮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5. 김인수 지음.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6. T. S. 엘리엇 지음. 『텅 빈 사람들(The Hollow Men)』. 1925.
7.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톨스토이 단편선』. 서울: 인디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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