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최성수] 영화 속 사회 그리고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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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사회 그리고 기독교

미디어의 힘

분업화된 삶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관심이 분산되고 관심의 영역마저도 파편적이라 자신과 직접 관계되지 않으면 대체로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보고 듣기는 하나 그렇다고 지각하는 것은 아니며,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까지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스 미디어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자처하고,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제도로 여겨질 정도로 큰 의미를 갖는다.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 의도적으로 은폐되어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며 진실을 밝힌다. 인터넷 방송 “나꼼수”나 “뉴스타파”에 대한 여론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신문과 방송 기자들의 노력으로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기를 사람들은 기대한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매스미디어는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공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공적이어야 할 미디어가 시청률이나 구독률이라는 상업적인 가치나 개인의 이념과 이해관계와 맞물릴 때, 미디어에 대한 신뢰는 급격하게 추락한다. 소위 ‘편집’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보들은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가 취해지며, 이 때문에 미디어는 변질된다. 즉, 미디어라는 거대한 힘을 통해 정보는 왜곡(축소나 확대 혹은 대체)되고 심지어 조작될 수 있다. 또한 미디어는 사회적인 이슈를 정해주는 의제설정 기능이 있어서, 진정으로 관심을 보여야 할 사안들을 은폐하고 왜곡하며, 오히려 전혀 다른 문제에 사회적인 관심을 갖도록 해서 여론의 심판을 모면하기도 한다.

미디어의 부당한 권력 행사를 막기 위해 방송사는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네트워크>, <트루먼 쇼>, <모비딕>, <트루맛 쇼> 등과 같이 미디어의 기능과 역할을 하나의 문제로 다룬 영화들도 제작되었다. 오늘날은 전문 미디어 업체가 각종 미디어를 감시하고 고발하지 않으면, 미디어에 대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영화의 힘

영상문화의 한 장르로서 미디어인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라 불릴 정도로 다른 어떤 장르보다 현실을 더욱 실감나게 반영한다. 긴장과 스릴, 때로는 감동이 넘치는 플롯의 내러티브와 향상된 영상기술력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적 상상력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를 구현한다. 영화의 힘은 영화적인 경험이 다른 어떤 장르와 달리 몰입의 상태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의 이미지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소위 ‘이미지 폭격’을 당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서 현실을 정의하기도 한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현실로 다시 돌아오지만, 영화적인 잔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개그콘서트의 한 프로그램인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애정남)가 사회적으로 위임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힘을 발휘하고 있듯이, 공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화는 현실을 정의하는 힘이 있다. 영화가 말하는 것이 곧 현실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장면들에 대한 표현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갖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표현에 신중을 기하지 않은 영화들은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다.

영화의 사회성

영화를 통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갖고 있는 사회성 때문이다. 영화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는다. 영화는 당대의 기술력이나 사회적인 배경 등 역사적인 한 계기와 관련해서 생산되며, 현대인에게 다가가고 또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실의 단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가 사회를 재현하지 않고 사회를 복원할 수도 없지만, 영화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의 단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속 장면들은 사회와 현실을 이해하는 한 단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영상미학적으로 구성된 장면들의 상호관계 혹은 충돌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의미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각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기독교 신학도 예기치 않은 현상으로부터 적지 않은 의미를 건져낸다. 영화의 사회성이 단지 배경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공공의 성격을 가지려면 공공의 관심사를 소재나 주제로 다뤄야 한다.

영화의 신학적인 의미

영화의 신학적인 의미는 크게 문화신학적이고 공공신학적인 성격으로 구분한다. 문화신학적인 의미란 영화가 하나의 영상문화로서 의미를 생산하고 유통하기 때문에 보는 자들로 하여금 계시적인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제된다면 문화를 통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재인식할 수 있다. 때로는 일상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공공 영역(환경, 인권, 생명, 정치, 경제, 사회 문제 등)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중의 관심을 환기해서, 보는 자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공공신학적인 의미이다. 곧,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상미학을 통해 지시된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에서 생산되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며,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를 통해 뜻하지 않은 경험을 하고 또 책임감 있는 참여를 하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보는 시대의 속성

근 몇 년 사이에 상영된 한국 영화에서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과거에 비해 공권력(경찰, 검찰, 정치가, 사법기관 등)의 부패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야수>, <공공의 적 2>, <박수칠 때 떠나라>, <부당거래>, <특수본>, <범죄와의 전쟁> 등과 같이 문학적인 상상력에 기반을 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홀리데이>와 <도가니> 그리고 <부러진 화살>과 같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영화적인 상상력을 가미한 영화들도 있다. 영화 속 공권력의 부패, 정의의 상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물론 영화가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편향된 시각 때문에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고 정치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레닌과 히틀러는 대중을 선동하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영화를 사용하였다. 영화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을 오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 단적인 예이다.

영화 속에 나타난 공권력이 타락하는 이유들을 보면 대체로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 가장 흔한 것은 가족의 생계와 연결되어 있다. 가족을 핑계로 불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승진을 위한 실적을 올리기 위함이다. 세 번째는 조직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네 번째는 권력 자체의 부패한 속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영화를 통해 공권력의 타락과 사회정의가 상실된 현실을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유신정권이나 5, 6 공 시절에는 제작 자체가 쉽지 않았을 표현이 가능해진 사실에 대해 한편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절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권력에 대한 그동안의 불신을 확인하는 일 같아서 맘이 편치 못하다. 영화적인 표현을 단지 수사학적인 기호로 이해해야 할 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사실로 받아들일 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회 현실의 한 단면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고, 심지어 사실에 근거해서 제작된 영화들조차도 공권력의 부패를 침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냐 표현이냐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지만, 초점은 양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영화 속 공권력의 부패와 심판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영화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현실이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독재와 군사정권을 경험한 까닭에 공권력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지만, 안타까운 현실은 공권력의 타락에 대한 보도가 오늘날에도 여전하며, 심지어는 더욱 많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단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고 또 이뤄지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그렇게 새롭지 않다.

문제는 부당한 공권력 때문에 사회적인 범죄가 끊이지 않는 현실이며, 일련의 영화들이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이유는 희생되는 사람들이 바로 사회적인 약자인 대중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가난한 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어린이, 여성(이주여성) 등 그야말로 힘없는 약자들이 대부분이다.

힘과 부를 추구하는 사회와 교회

영화를 통해 보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정리해서 말한다면, 강력한 힘과 막대한 부를 추구하는 모습이며, 이것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일그러진 모습을 찾는다면, 아마도 교회의 변질과 타락일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 그리고 정의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그야말로 영화 속 교회 혹은 기독교는 언제나 부정적이다. 교회는 로비의 장소가 되거나, 교인이 범죄자로 등장하며, 사회적인 불의와 억압당하는 사회적인 약자와 타자에 대해 공감적으로 대하지 않는 모습 등이다. 교회 자체의 타락도 소재로 심심찮게 등장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 곧 선악을 분별함에 있어서 편향됨이 없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사회공동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가치 혹은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정의를 밝혀야 할 과제 때문에 존재한다. 성령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강한 자 가운데, 부유함 가운데, 유명한 자 중에 계시기보다 오히려 약한 자, 가난한 자, 아무 이름을 내지 못한 자 중에 계시기를 선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타락한 공권력과 일그러진 교회의 이미지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며,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암5:24)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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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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