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읽기-교회가 '부도' 처리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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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역사의 단면을 재현하는 건 영화 본래의 기능 중 하나를 실천하는 일이다. 

영화의 탄생은 기록을 위한 촬영과 그것을 재생하는 기술의 개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곧 영화는 역사를 다큐나 극영화 형태의 영상으로 기록하여 보게 함으로써 비록 역사의 현장에는 없었다 해도 역사에 대한 뜨거운 기억(hot memory)을 가능하게 한다. 고대부터 근현대사까지 오늘의 상황에서 재고할 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대부분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사건이나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건 사건이나 사람이 그만큼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며, 또한 현대적으로 다시금 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환기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의 기억에서 결코 잊을 수 없으며 또한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사건인 1997년 외환위기가 20년이 지나서야 영화로 제작된 것은 다소 유감이다. 좀 더 일찍 나왔다면 2008년 금융위기를 보다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겠지 싶다. 사실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빅쇼트>(아담 매케이)가 8년 후인 2016년에 제작된 것과 비교하면 많이 늦은 건 분명하다. 물론 텔레비전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심층적인 분석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었다. 

지금에서야 금융관련 영화로서 제작된 건 대한민국의 외환위기가 뉴욕 발 금융위기보다 복잡해서 분석과 해석을 위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인 걸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제작되었어도 영화는 당시의 경제 상황과 외환위기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당시 상황과 경제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빅쇼트>와 비교할 때 그렇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화는 처음부터 외환위기 자체를 분석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금 과거를 소환하여 오늘 우리들로 경제위기를 직면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미중 무역 전쟁이나 혹은 북핵문제 관련해서 전개되는 북미관계에 따른 국내 경제 상황에서 미국의 통화정책에 따라 1997년과 유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음이 감지되었기 때문일까? 위기는 반복된다는 마지막 장면의 대사가 매우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데, 마치 경종을 울리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들린다. 외환위기로부터 우리가 하나의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 

사실 <빅쇼트>가 중심 소재로 삼고 있는 미국의 금융위기의 진원지는 분명했다. 그곳은 은행과 투자자들이 몰려 있는 뉴욕의 월 스트리트였다. 곧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은행과 개인의 지나친 욕심에 따른 과도한 부채와 미국행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맞물려서 초래한 결과였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 외환위기는 경우가 달랐다. 현상적으로는 금융자유화 정책에 따른 외국 자본(단기 외채)에 대한 의존도가 커짐으로써 금융기관들의 부실, 경제지표의 부진, 원화의 평가절하가 나타났다. 이로 인해 외국 투자자들은 달러를 사들이고 원화를 공매도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외환을 투입해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외환 보유고는 순식간에 20억 달러 규모로 줄어들었다. 

이런 현상이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수년 간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룬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고려돼야 한다. 태국으로부터 시작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홍콩,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간 금융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고 단기외채 상환날짜는 가까워지지만 국가신용저평가로 지불 연장이 거부됨으로써 대기업에 이어 중소기업의 부도가 연이어져 다수의 피해는 불가피했다. 결국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IMF에 구제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었지만, 정부는 정치적인 셈법에 따라 대대적으로 언론정치를 펼쳤다. 경제의 기초가 튼튼해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국민을 기만했다. 

이렇듯 고리가 연이어져 있어서 대한민국의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피해를 유발한 가해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주요 원인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살해당한 시신은 있는데 살인자가 없는 격이다. 단지 당시 거품 경제가 빚어낸 결과로 알려졌을 뿐이다. 다만 문제는 정부가 사태를 대하는 방식과 태도였다. 정직하지 못했고 또 진실하지 못했다.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민을 속이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정부의 발표를 믿고 살아온 국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줄도산의 피해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96년 OECD 가입으로 오랜 개발도상국의 신분에서 벗어나 마침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며 자축의 분위기로 가득했다. 허구적인 시나리오와 허상의 현실이었으나 지표상으로는 경제성장의 고공행진으로 국민들의 기대는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 그런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인한 국가부도 사태(모라토리움)를 막기 위해 IMF에 구제를 신청하였고, 1997년 12월 3일 IMF가 한국에 550억 달러 긴급지원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대한민국 경제는 IMF 관리체제로 들어갔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했던 미행정부의 배후를 충분히 의심할 만큼 IMF는 국제기구로서 자격보다는 미국 정부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인상을 자아냈다. 소위 경제주권을 IMF에 넘기는 것이라 일부는 IMF 구제요청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가주권을 빼앗긴 때와 다를 바 없다며 국치일로 여기기도 한다. 영화는 이 날을 “국가부도의 날”이라 명했다. 영화는 이런 사태를 감지하여 한국은행 안에서 비공개로 대책팀이 꾸려져 활동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국가가 부도를 맞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IMF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현한다. 

영화는 외환위기에 대한 원인이나 진행상황을 분석하여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기보다는 예고된 위기에 대해 정치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에 초점을 두었다. 특히 국가 차원에서 필요한 혁신 곧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염두에 두며 사태를 거시적으로 보려는 관점과 연쇄적인 부도사태로 인한 피해를 입고 고통을 겪는 국민들을 염려하며 대책을 마련하려는 관점의 대립을 첨예하게 부각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빅쇼트>가 취했던 방식과 매우 다르다. <빅쇼트>가 금융위기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원인과 진행과정 및 결과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바탕으로 금융위기가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과 전문가 집단의 무책임한 행위의 결과였음을 폭로하였다면, <국가부도의 날>은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여러 차이를 선악의 구도를 갖고 전개한다. 

이런 점에서 감독은 외환위기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위기를 대처하는 방식에서 정치하는 자와 전문가, 국가와 개인, IMF(미국)와 대한민국,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관점의 차이 및 양자의 갈등에 집중한다. 이것은 다분히 영화적인 효과를 높이려는 전략에 따른 연출 곧 제작자의 상업적인 속내를 드러내는 연출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삶을 간과하고 특정 정치적인 신념만을 우선시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고 권위적인 남성 이미지를 가진 국가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여성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였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곧 가진 자를 위한 정책으로 전환되는 분수령을 이루는 IMF 관리체제가 어떤 계산 하에 대한민국에 도입되었는지를 폭로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과연 IMF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단지 그 결과 경제주권이 강탈당하고 가진 자들의 천국이 되는 시대가 되며 많은 국민들이 파산했다는 점만을 부각하여 강압적이고 적대적인 이미지를 덧입힌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악의 화신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만일 IMF 구제 금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를 납득할 만한 이유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IMF와 그것을 수용하는 입장을 적대시한 것은 경제주권을 상실한 국민이 가질 수밖에 없는 상실의 감정을 자극하려는 의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양자 대결 구도에서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이 질문과 관련해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인물은 윤정학(유아인)이다. 영화에서 윤정학의 역할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아도 양자의 갈등관계에서 진실을 아는 자로서 외환위기를 오히려 호기로 삼는 캐릭터다. 그러니까 외환위기의 징후를 알아차리고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흐름(정부가 IMF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을 간파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윤정학은 갭 투기와 환 투기 등 다양한 형태의 투기를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은다. 당시 실존했던 사람들을 대리하는 윤정학 캐릭터는 위기의 징후를 알고 제대로 대처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런 자에게 밝은 미래가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만일 국가가 위기의 징후를 제대로 파악하고 또 위기에 적합하게 대처했다면 수많은 피해자의 수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되었을 것을 암시한다. 

영화는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외환위기 사태를 분석하려기보다는 한편으로는 IMF 협상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에 대한 징후를 파악하고 바르게 대처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실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위기들을 보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지만 막지 못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부 전문가들이 볼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징후는 분명히 현존했으나, 정부는 무능하고 무책임했으며 오히려 전문적인 지식을 이용해 위기를 축재의 기회로 삼기에 급급했다. 비록 그 징후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방식에서 여러 이해관계들의 충돌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위기는 현실로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또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위기 자체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빅쇼트>에서 시도한 바와 같이 대중적인 이해가 가능한 방식으로 위기를 철저하게 분석하는 일은 필요하다. 한 번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으나 만일 동일한 실수를 반복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임에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기에 대한 징후를 어떻게 이해했고 또 어떤 방식으로 대처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위기의 원인을 바르게 파악할 뿐 아니라 또한 위기에 대처했던 방식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오류와 잘못을 또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입식이 아닌 비판적인 역사 교육은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가 오늘 우리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자.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더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을 다양한 방식으로 예고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말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하나님 신앙에서 떠나고 타락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했다.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다.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위기에 대한 징후로 인식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결과였다. 본질에서는 불신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종말의 징조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일어날 일들을 경고로 말씀하시면서 회개하고 깨어있을 것을 촉구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자들에게 장차 행하실 일을 알리시지 않고 행하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말씀을 통해서든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든 아니면 자연 현상을 통해서든 예고 혹은 징조가 있다는 말이다. 다양한 형태의 징조를 바르게 이해하고 또 그것에 바르게 대처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일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깨닫고 또한 그것에 적합하게 반응할 수 있기 위해 믿는 자에게 갖추어져야 할 것은 영성이다.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간에게 갖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인식하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가 깨닫고 반응해야 할 징조는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위기를 말하기 시작한 때는 한참 되었다. 각종 부조리와 스캔들로 종교 신뢰도 조사에서 기독교는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교회의 대형화, 기복주의 신앙, 세습을 통한 교회의 사유화, 복음적인 설교의 고갈, 교회를 자신의 출세와 권력 기반으로 삼는 목회자,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 등 세속화 과정에서 거침없는 행보를 하는 교회에 대한 비판은 봇물을 이루고 있고, 결과적으로 교회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교회와 복음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다. 사실 외환의 고갈로 국가의 대외적인 신용이 추락한 결과가 국가부도의 사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교회와 복음에 대한 신뢰도가 추락한 것 이외에 교회부도의 위기에 대한 또 다른 징후가 있을지 싶다. 교회가 망하지 않고 운영된다고 해서 그것으로 안심할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지를 생각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고통스럽게 감당해야 했던 사역 곧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했던 비극적인 일이 오늘날 다시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의 사역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부도로 처리되는 날이 오기 전에 속히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게서 기대되는 신용이 더는 작용하지 않을 때 곧 교회부도의 날은 갑작스럽게 오지 않는 법이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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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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