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세속사회에서 교회의 새로운 역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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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기-세속(Post-Secular) 시대의 도래

호세 카사노바(Jose Casanova)는 Public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에서 세속화 현상이 보편적이라기보다 서유럽(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일부 국가에서 나타나는 예외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스페인 가톨릭의 국가 교회로서의 강압적인 행위들, 폴란드 가톨릭의 국가 통합과 민족 정체성 형성의 사례, 브라질 가톨릭의 제국주의적 행위와 시민사회 지지운동, 미국의 개신교와 가톨릭이 보여준 시민종교로서의 역할 등에서 나타나는 종교의 부흥과 정치적 영향력은 종교의 쇠퇴가 아닌 재부흥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각주:1]  특히 유럽사회에서 기독교가 '탈사사화'(de-privatization)되고 있으며, 종교와 정치의 역사안에서 ‘탈사사화’의 일방향으로 흘러온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최근의 공적 종교들은 세속화 시대를 거치며 합리성으로 무장했고 신앙과 이성, 초월과 내재,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균형감을 요청받고 있다. 

서구사회에 비교해서 아시아는 다른 궤적을 보여왔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경험하기보다 정치 이념에서부터 사회 문화와 개인의 생활관습까지 깊숙이 종교의 그늘 아래 놓여왔었다. 종교의 가르침과 실천은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뿐 아니라, 물질적인 번영과 건강, 공동체의 길흉화복, 국가의 통합에도 적용된다. [각주:2]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인도네시아의 ‘판카실라’(Pancasila)처럼 국가 운영철학의 근간을 제공하기도하고, 중국 공산당의 종교 정책처럼 사회 통합의 장애요소로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종교의 지형이 변모하면서 종교와 비종교, 성/속, 이성/신앙으로 구분했던 세속시대의 경계선이 흐릿해지고 종교가 공적인 영역으로 재등장하는 시대, ‘재주술화’(re-enchanted) 또는 ‘재거룩화’(re-sacralization)를 이뤄가는 '후기-세속'(post-secular)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각주:3]

  

2. 종교의 세 가지 역할

후기 세속 시대의 종교의 복귀를 근대 이전처럼 사회전반을 통제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탈-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시대의 기독교는 더 이상 국가의 중심이 아닌 사회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그동안 중심에 섰던 위치에서 변두리로, 다수자에서 소수자로, 거주자에서 나그네로, 지배자에서 증언자로서의 위치 전환을 요구 받고 있다. 이제 기독교는 사회를 구성하는 한 일원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다른 구성원들과 대화하며 건강한 사회와 인류의 번영, 공적 선의 증진을 위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에 종교를 향한 사회의 요구는 무엇일까? 


1) 의미와 가치의 추구

2004년 여름, 독일 뮌헨에서 철학과 종교의 두 거장, 위르겐 하버마스와 요제프 라칭거의 만남이 있었다. 그들은 ‘자유 국가의 정치 이전이 도덕적 토대들’이란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국가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토대가 무엇인지를 논의하면서 그 핵심을 도덕에서 찾으려 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이론의 후예인 하버마스는 법질서의 핵심인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형이상학적 언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의미와 가치, 통찰들을 종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각주:4]  종교를 향한 하버마스의 요청은 민주주의 사회의 건전한 토론과 합의를 위한 공적 이성(public reason)의 토대가 되는 종교의 복귀로 공론장안에서 이성의 한계에 대한 보완으로서 역할을 당부한다.

세속화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잃어버렸고, 개인의 참된 자유가 박탈당해왔다. 이를 통해 찰스 테일러는 종교를 통한 ‘진정성’, ‘진실한 것’의 회복을 제안한다. 그는 현시대를 ‘진정성의 시대’(The age of Authenticity)로 규정하면서 도덕적 느슨함(laxity)을 경계하고 자아 성찰적이면서도 관계 중심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촉구한다. [각주:5]  제프리 스타우트(Jeffrey Stout)도 종교 윤리가 어떻게 시민사회의 도덕적 담론을 형성시켜왔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사회의 법체계와 가치질서를 논의할 수 없다면서, 신학적인 주장들에 설득당할 필요는 없지만 도덕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종교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각주:6]  아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는 좋은 사회의 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꼽으면서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질서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강조하는 개인성과 공동체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사회성의 적절한 조화를 위해 기독교의 황금율(golden rule), 즉 타자를 향한 도덕적 책임을 다하려는 사회적 가치의 회복을 요청한다. [각주:7]


2) 공동체성 형성과 소속감 제공

로버트 푸트남(Robert Putnam)은 그의 유명한 저서 Bowling Alone에서 시민의 참여가 민주주의에 필수 요소인데 미국 사회에서 최근 수십년 동안 시민사회의 영역이 쇠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각주:8]  그는 시민사회의 재건에 있어서 종교의 중요성을 간파했으며 일종의 사회 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 바라보았다. 지역 교회들은 다른 시민 사회의 조직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관계적 기술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지역의 필요한 정보들을 획득하고 인적 연결망이 구축되면서 주민들간 신뢰를 배우는 중요한 장이라 여겼다. [각주:9]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 공동체성 형성은 종교가 가지는 가장 큰 자원 중의 하나이다. 종교가 가지는 자본을 크게 ‘종교적 자본’(Religious Capital)과 신앙적 자본(Faithful Capital)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교적 자본은 가시적 자본으로 교회의 건물, 예산, 사람들과 같은 실제적으로 사용가능한 자본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신앙적 자본은 비전, 가치, 신념, 신뢰 등과 같은 비가시적인 특징을 지닌다. [각주:10]  2006년 영국 성공회 산하에 있는 Urban Life and Faith위원회에서 발간한 Faithful Cities에서도 로버트 푸트남의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이를 종교적 자본과 신앙적 자본으로 확장하여 관계적인 지역 공동체의 구성과 상호 신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좋은 도시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밝힌다. [각주:11]


3) 공적 이성의 회복과 공공선 기여

종교는 그 자체로 공적 이성의 한 축을 형성해왔다. 하버마스가 지적한 거처럼 공적 이성은 전통과 분리되지 않으며 공적 이성과 종교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정치적 정의와 공적 담론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종교는 필수적이다. [각주:12] 하버마스는 공적 이성의 계보 형성에 영향을 미친 신앙에서 적절한 통찰을 찾길 원했고, 특히 과학의 편협한 합리주의를 극복하는 희망의 자원으로서 신앙을 주목했다. 이성은 자기 충족적일 수 없으며, 선함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각주:13]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유럽의 계몽주의가 하나의 지적인 현상이라기보다 넓게 퍼진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했으며, 기독교 전통과 교회 권위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인간 중심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각주:14]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세상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예언자적 역할은 세상을 고치기 위해, 인간의 번영을 위해 그리고 공공선을 위해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며, 기독교 정체성과 말과 행동을 통해 세상 속으로 투사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여기에는 두가지 방식이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전 존재를 통해 세상에 참여하는 것으로, 단순히 지적인 감동과 비전의 대안적 제시가 아니라,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 전체가 인간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공익을 위해 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둘째는 문화적인 차원과 관련이 있는데,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사람들의 권리나 의무와 관련되며, 모든 영역에서 선을 추구하고 찾아내고 그것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것이라 말한다.[각주:15]


3. 후기세속도시의 새로운 교회 개념

크리스 베이커(Chris Baker)와 저스틴 보우몽(Justin Beaumont)은 도시안의 종교의 새로운 가시성에 주목하면서 이를 후기세속도시(postsecular city)라 명명했다. 종교와 과학, 신앙과 이성, 전통과 혁신이 더 이상 급격히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협력과 동반자의 관계로 등장하고 있으며 [각주:16] 이러한 후기세속도시는 세속주의와 세속화로 형성된 사회적 공간에 초월적이면서도 영적인 종교적 상징과 표현들로 재등장하면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보우멍은 이러한 도시는 잡종 도시(Mongrel City), 또는 차이의 도시(City of Difference)라 인식하면서 도시의 정체성이 다원적, 혼종적 흐름으로 흘러가면서 단일 문화의 이데올로기, 인종,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 또는 전체주의, 근대주의의 내러티브를 붕괴시켜나갔다고 보았다. [각주:17]  도시의 환경이 변모하면서 지역교회들도 다른 개념과 특징을 가진 교회로의 전환이 요청된다. 특별히 두가지 개념이다. 


1) 유동적인 교회, 리퀴드 처치

교회는 건물의 외관처럼 고정적이고 단단한 형태로 고착된 조직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왔다. 낯선이들의 출현으로 도시의 정체성과 공동체성이 약화될 때 교회는 완충지로서의 사귐과 만남, 소통과 토론의 대안적 공간이 될 수 있다. 대안 공간으로서 교회는 낯선이들에게 집과 같은 안정성과 소속감을 제공할 뿐 아니라, 타자들간의 만남으로 흐려진 경계들 사이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도시 공동체의 새로운 보편성(new catholicity)과 다양성의 공존을 향한 환대의 장소가 된다. 

오늘날 도시를 네트워크의 관계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도시의 각 지역 공동체에 관심을 집중해야 함을 의미한다. 도시를 단일체로 파악하기보다는 각각의 지역이나 기관, 이웃들의 독특성과 관계성을 인정하면서 함께 어울려져 있는 공동체들의 공동체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도시에서는 협력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좋은 시민 단체나 조직들이 많이 있으니 이들과 함께 공동 프로젝트를 개발하거나 혹은 교회가 기존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오늘과 같은 ‘모바일 2.0’시대에 더 적합한 전략이다. 이러한 유연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지원, 그리고 함께 상생하는 공의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창조적이고 신선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18]

피트 워드(Pete Ward)는 이들 교회를 액체 교회(Liquid Church)라 명하면서 네트워크가 중심이 되어 참여들의 영적인 욕구와 선호들(preferences)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모티브삼아 정량화, 상품화, 집단화된 근대의 조류를 탈피하고, 자아의 성찰을 기반으로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의 관계성, 유동성, 상호성이 중심이 되는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교회 역시 의사소통과 공동체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한다.[각주:19]  Pete Ward는 교회의 액체성을 삼위일체의 관계성에서 출발하며 페리코레시스의 상호침투, 상호내주의 모델이 교회 모델의 초석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2) 관계적인 교회, 디너 처치 

우드워드(Jr Woodward)는 The church as Movement에서 운동으로서의 교회를 주장하면서 3가지 사역의 핵심을 제안한다. 첫째는 제자도의 핵심, 둘째는 공동체와 지역사회의 보존, 셋째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의 연대이다. 타자와의 연대를 위해 교회는 사랑, 경청, 환대, 우정을 나눌 것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식탁교제(shared table)이다. [각주:20]  식탁교제는 현대인들의 고립되고 단절된 파편화된 삶, 소속감없는 존재의 불완전함을 깨뜨리는 강력한 환대의 행위이자 공동체적 사랑의 표현이다. 최근 영미권을 중심으로 디너처치가 등장하고 있다. 식탁을 함께 준비하고 음식을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크리스 베이커는 후기세속도시의 도시의 실천 중에 성서에 등장하는 잔치(feast)의 모티브를 인용하면서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의 잔치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며, 육적인 갈급함 뿐 아니라 영적인 갈급함을 동시에 채워주시는 사랑임을 언급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조건없이 개방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까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 관습과 문화 결정해놓은 경계를 없애고 하나가 되는 자리이다. [각주:21]  존 지지울라스(John D. Zizioulas)는 교회를 하나의 성찬 공동체(eucharistic community)로서 이해했다. 성찬의 공동체는 삼위일체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친교하는 생명이자 구성원들 속에서 현실화되는 친교 그 자체이다. [각주:22]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인 인류를 죄로 인해 나뉘었던 것에서, 계약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서 다시 모은다. 국가는 형식적인 상호연결성을 제정했으나 진실한 공동체는 제거했고 교환의 법에 따라 타자와 관계 맺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성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은혜로 받게하며 그 선물과 연합함으로 그 몸의 일부로서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정치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고 각자의 독립성이 해체되는 전체주의적 연합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각주:23]  성만찬을 통하여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인간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고 만나며, 낯선자들과 이방인들까지 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간다. 더 나아가 우주적 보편성을 띄면서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간의 단절과 갈등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얻게 될 것이다. 


4. 나아가면서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가죽부대를 요청한다. 후기세속사회라는 새로운 도시환경은 새로운 신앙 공동체로의 변화를 제안한다. 건물 중심의 고정적인 교회의 틀이 아닌,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면서도 그 본질의 놓치 않은 다양한 모습의 교회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에는 예배장소 중심의 모임이 아닌 관계중심의 모임으로 교회가 구성되어감을 알 수 있다. 영미권에서 디너처치 연합회 [각주:24] 를 구성해서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식탁교제를 하나의 식사가 아닌 성만찬적인 공동체로 이해하면서 예배와 교제를 함께하는 것은 1인 가구가 증가하는 혼밥/혼술 사회에서 새롭게 시작해볼만한 모델이기도 하다. 후기세속사회에서 종교를 향한 사회의 기대는 공적이면서도 영적인 면들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글쓴이 김승환 목사는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문화 박사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 존 하워드 요더로 석사논문을 썼고, 박사과정에서는 공공신학과 급진정통주의 관점에서 도시문제를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청주 청북교회 부목사로 있다.  


  1. Jose Casanova, Public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71-74. [본문으로]
  2. Richard Madsen, "Secularism, Religious Change, and Social Conflict in Asia", 252. [본문으로]
  3. Elaine Graham,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 Public Theology in a Post-Secular Age, (London: SCM Press, 2013), 38. [본문으로]
  4. 위르겐 하버마스, 라칭거 추기경, 윤종석 역, 『대화, 하버미스 대 라칭거 추기경』 (새물결출판사, 2009), 51. [본문으로]
  5. Charles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22-36. [본문으로]
  6. Jeffrey Stout, Ethics after Babel: The Languages of Morals and Their Discontents, (Cambrige: James Clarke & Co Ltd, 1988), 187-188. [본문으로]
  7. Amitai Etzioni, The Golden Rule: Community and Morality in a Democratic Society, (BasicBooks, 1996), 4-12. [본문으로]
  8. 유권자 투표가 1960년대 이후 약 4분의 1로 감소하였고, 마을이나 학교 문제로 공공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1973년 이후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일간 신문 구독은 1970년 이후 4분의 1로 떨어졌고 노동조합 참여는 1975년 이후 반 이상 급감했다. 학부모 교사 협회는 1964년의 절반 수준이고, 보이스카웃 회원은 1970년대 이후 26퍼센트나 감소했다. 자원봉사 활동은 1974년의 6분의 1 이하이다. 현재의 논의에서 가장 관심 있는 문제에 대해 푸트남은 종교 봉사와 교회 관련 집단에 이TSms 미국인들의 망조직 참여는 1960년대 이후 5분의 1로 완만하게 감소했다. 그는 볼링의 전체 참여는 증가했는데도 불구하고 단체 볼링의 참여는 1980년 이후 40퍼센트 감소하면서 많은 미국인들이 혼자서 볼링을 치고 있다는 우울한 결론에 이르고 잇다. Rovert D. Putnam, Bowling Alone: Democracy in America at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Robert Wuthnow, Christianity and Civil Society: The Contemporary Debate, 정재영·이승훈 역, 『기독교와 시민사회』(CLC, 2014), 39-40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9. Robert Wuthnow,『기독교와 시민사회』, 15. [본문으로]
  10. Elaine Graham and Stephen Lowe, What makes a good city?, (Darton, Longman and Todd Ltd, 2009), 40-41. [본문으로]
  11. The Commission on Urban Life and Faith, Faithful Cities: A Call for celebration, vision and justice, (Church House Publishing, 2016), 59. [본문으로]
  12. Craig Calhoun, "Secularism, Citizenship, and the Public Sphere", Rethinking Secularism, 80-81. [본문으로]
  13. Craig Calhoun, "Secularism, Citizenship, and the Public Sphere", 84. [본문으로]
  14. Nicholas Wolterstorff, Faith and Rationality: Reason and Belief in God, (University of Notre Dame, 2015), 5. [본문으로]
  15. Miroslav Volf, Public Faith, 김명윤 역, 『광장에 선 기독교』(IVP, 2014), 142-143. [본문으로]
  16. Justin Beaumont, Christopher Baker eds, Postsecular Cities: Space, Theology and Practice,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2011), 1-2. [본문으로]
  17. Postsecular Cities, 33. [본문으로]
  18. 성석환, 『지역 공동체를 세우는 문화선교』 (두란노아카데미, 2011), 86-87. [본문으로]
  19. Pete Ward, Liquid Church, (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 2002), 46-48. [본문으로]
  20. Jr Woodward, Dan White Jr, The Church as Movement, (IVP, 2016), 171-176. [본문으로]
  21. Chris Baker, The Hybrid Church in the City, 139-140. [본문으로]
  22. John D.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이세형, 정애성 역, 『친교로서의 존재』(삼원서원, 2012), 85. [본문으로]
  23. Graham Ward, 'The City', Radical Orthodoxy, 195-197. 지역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아닌 온전한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지역 성찬 공동체들 간의 어떠한 차이와 배제가 전제되지 않는 보편적 교회안의 일치와 연합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성찬에는 땅의 평화와 화해의 실천적 의미가 있으며 어떠한 법의 계약적 의미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존재들의 직접적인 만남 안에서 이루어진다. [본문으로]
  24. https://dinnerchurch.co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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