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 읽기 : 인간 향상을 위한 욕망은 어디서 멈춰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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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개봉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굳이 이전 시리즈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그 내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오히려 이 점을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관객 동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시리즈 전체를 섭렵해야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독은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1979년 작 <에이리언>의 프리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다른 감독들에 의해 제작된 에이리언 시리즈는 혹시 몰라도 스콧 감독의 두 작품을 사전에 숙지하고 감상한다면 영화 이해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영화는 두 번째 프리퀄인데, 첫 번째는 2012년에 제작된 <프로메테우스>이다. 이 영화는 첫 작품의 배경이 되는 2122년보다 30년 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스콧 감독은 인간의 외계인 기원설을 탐색하는 내용을 다루었다. 이에 비해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그 후인 2104년을 배경으로 하며, <에이리언>에 출현하는 괴생물체의 기원에 접근한다.

 

긴장감을 자아내는 스토리텔링은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대로 이전에 제작된 <에이리언> 시리즈를 보지 않은 관객들도 내용을 따라가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번 영화에서 무엇보다 부각된 캐릭터는 강한 인공지능 데이빗과 월터다. 인간의 입력에 따라서만 반응하는 약한 인공지능(weak AI)에 비해 스스로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강한 인공지능(strong AI)을 갖춘 휴머노이드이며, 요즘 회자하는 말로 표현한다면 포스트휴먼이다. 인간의 형태를 가졌으나 인간보다 더 스마트하고 더 강하며 또한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진화된 새로운 종을 말한다. 유발 하라리의 표현에 따르면 호모 데우스(Homo Deus).

 

<프로메테우스>에서도 출현한 바 있던 독일 출신의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가 분한 두 캐릭터에서 데이빗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의 3 원칙들[각주:1]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창조 능력까지도 갖고 있지만 다분히 냉혈한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데 비해, 월터는 아시모프의 로봇의 3 원칙들을 충실하게 따르도록 되어 있고 또 섬세한 감정까지 인지하고 또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스콧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전편의 시리즈물에서와는 달리 에이리언과 인간의 투쟁보다 AI 데이빗의 창조와 사악한 의도에 더 큰 비중을 둔 이유는 머지않아 현실로 나타리라 예상되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기보다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향상(human enhancement) 기술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에이리언의 출현으로 인류를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전개된 까닭은 인간이 통제 불가능한 인공지능을 만들었기 때문임을 폭로하는 영화로 독해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적어도 인간의 의식을 갖춘 인공지능의 출현은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영화적인 상상력은 그 한계를 넘어 보여줌으로써 인간 향상을 위한 기술 개발에 브레이크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영화의 시작은 영화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주는 장면인데, 여기에서 데이빗은 자신을 만들고 스스로 데이빗의 창조자로 소개하는 박사와 더불어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비록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더라도 AI인 데이빗은 인간 창조자보다 더 총명하고 더 강하며 또 더 오래 살 수 있는 사실을 기반으로 자신이 단지 피조물로서 인간의 명령에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괴생물체를 만들어냄으로써 창조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또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음을 입증한다.

 

인류의 비극을 초래하는 문제는 물론 로봇의 3원칙을 지키지 않는 인공지능의 개발에서 비롯하나, 만일 기계학습(deep learning, machine learning)이 가능하고 의지를 갖고 실현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출현한다면, 도대체 누가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서 바로 이런 가상의 현실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위험은 이미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언급된 바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스콧 감독이 제기한 경고에 착목하여 인공지능의 양면성에 대해 살펴보자. 과거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의미에 머물러 있었으나, 오늘날 생명공학, 나노기술, 신경과학, 그리고 컴퓨터 공학의 협업을 바탕으로 개발되는 기계는 단지 노동의 수고를 덜어주는 기능을 훨씬 넘어선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은 더 총명해지고 더 강해지며 또 더 오래살기 원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뿐 아니라 인간의 기계-되기를 가능하게 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보철용 기계의 의미에서 인간으로서 온전한 기능을 향상 시켜주고, 또한 인간의 망가진 기관을 대체하는 기계(사이보그, 트랜스휴먼)로까지 발전되었다. 이제는 약한 인공지능 개발을 통해 인간의 노동력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한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심지어 인간 자신을 대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포스트휴먼) 현실적으로는 아직 요원하지만 이미 영화적인 상상력을 통해 영화 <터미네이터><공각기동대> 등을 통해 그 대략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는 인간과 기계(혹은 생물과 무생물)의 혼종을 의미하는 사이보그(cyborg=cybernetic organism), 곧 이미 트랜스휴먼(transhuman)의 단계로 진입해 있는 상태이며, 심지어 새로운 종으로 인지되는 포스트휴먼(posthuman)시대를 넘보고 있다. 신상규는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온다(호모사피엔스의 미래, 58~101)는 제목의 글에서 포스트휴먼을 위한 인간향상 기술과 구체적인 현상들을 나열하였다.

포스트휴먼은 현재 두 방향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영문학 교수로서 문화비평가로 활동 중인 슈테판 헤어브레히터(Stefan Herbrechter)포스트휴머니즘에서, 그리고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포스트휴먼에서 주장하고 있는 소위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이것은 근대의 인간 이해에 대한 비판을 겨냥한다. 다른 하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보스트롬(Nick Bostrom)에 의해 대표되는 견해인데, 인간향상 기술(나노기술, 생명공학기술, 정보통신기술, 사이버네틱스와 같은 인지과학)에 의지해서 기능적인 측면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능가하는 새로운 종의 인간을 말한다. 유발 하라리의 글 사피엔스에서 언급된 인간과 전혀 다르며 또 새로운 종의 출현을 전제하고 사용하는 말이라 포스트휴먼은 아직 현실이 아니지만 논의의 필요에 따라 인간이라 말할 뿐임을 명심하는 것이 좋겠다. 이와 관련해서 함께 고려되는 트랜스휴먼은 호모사피엔스에서 포스트휴먼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중간단계의 혼종 형태를 의미한다.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가능성을 실현할 단초인 인공지능과 관련해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움을 줄 요량으로 시작하여 개발한 인공지능은 인간을 돕는 존재로 알려진 하나님을 기계로 대체하는 운동의 단초가 될 것인가? 사실 인류 사상사를 일별해 보면 인간이 뛰어난 지적인 능력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인간의 지성이나 인류의 집단지성적인 활동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인간이 자신보다 더 나은 인공지능 개발을 통해 인간향상을 시도함으로써 인간을 넘어 심지어 하나님마저 대체하려고 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은 인류가 아직 포스트휴먼의 실현 단계에까지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상상에 불과하겠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을 넘어 포스트휴머니즘이 하나의 인류문명의 지향점으로 여겨지고 있고 또 4차 산업혁명을 일으키며 시대의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결코 철없는 상상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한계로 비록 지금은 상상의 힘을 빌어야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현실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스콧 감독이 영화를 통해 경고하고 나서는 까닭도 기술 개발 뒤에 잠재해 있는 인간의 욕망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강한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인류는 재앙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신상규는 그의 글을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지 싶다. 그리고 이미 1968년에 제작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스탠리 큐브릭)는 인류 문명의 종착점이 인공지능임을 예견하고 있다. 그 이후 제작되는 수많은 영화에서 등장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영화적인 상상력의 산물만이 아니라 산업현장은 물론이고 우리 생활 곳곳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재앙이 현실이 되기 이전에 인간 향상을 위한 욕망은 어디서 멈춰야 할 것인지를 숙고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윤리적인 측면과 법적인 측면 그리고 종교적인 맥락에서도 함께 고려해서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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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에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 제3원칙: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과 제2법칙에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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