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테이트 테일러, 2011, 드라마, 전체)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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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돕는 자

<헬프>(테이트 테일러, 2011, 드라마, 전체)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스크루지 영감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공감할 수 없어서 자비를 베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소비를 즐기는 사람도 못되는 구두쇠다. 그가 하룻밤을 사이에 두고 갑작스럽게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 역시 감동의 탄성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사람다움의 회복에 있다. 우리는 왜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 것일까? 아니, 도대체 이런 이야기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우리에게 거듭 반복해서 들려지고 또 보여지는 일은 무엇일까?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거듭 반복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바로 인간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과 풍성한 삶을 도우시듯이, 인간 역시 이웃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실천하는 존재다. 인간은 원래 돕는 자로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인간다움은 돕는 자로서 삶을 실천할 때 형성된다. 이것은 도우시는 분으로서 자신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반영하는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돕는 일은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한 방법이다.

만일 인간이 타인을 돕는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지 않고, 방해하고 또 간섭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삶을 제한하고 억압해, 결국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그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인간답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비록 인간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해도 부름을 받은 자에 합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의 모습이 아니다. 시대의 사조가 어떠하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성경이 인간을 보는 기준은 이렇다. 그러므로 인류사에서 인간 의식의 혁명은 언제나 성경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아쉽게도 교회가 방해하는 자와 억압하는 자의 중심이 된 때도 없지 않다. 초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지만, 개혁의 일 순위가 되는 대상은 세상이나 교회가 아니라 언제나 ‘나’다.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작품인 <헬프>는 바로 이런 감동을 담고 있다. ‘헬프’라는 말은 ‘돕는다’를 의미하지만, 영화의 원제인 명사형 ‘더 헬프’에는 ‘가사 일을 돕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미시시피 주의 어느 마을이다. 60년대의 미국은 쿠바사태로 위기가 고조되고, 베트남 전쟁 참전과 관련해서 여론이 들끓었으며, 마침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마디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또한 1955년 12월 몽고메리에서 로자 팍스라는 흑인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격동의 시기다. 이 사건에서 촉발된 법정 소송은 1956년에 미국 연방최고재판소에서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이 위헌이라는 판결로 끝났지만, 인종 차별은 계속되었고, 그 양상은 각 주마다 달리 나타났다. 미시시피 주는 인종 차별에 있어서 미국에서 가장 극심한 모습을 보여준 곳이라고 한다.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당시의 흑인과 백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는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영화는 정치적인 격동의 시기에 미시시피 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인종차별에 주목한다다. 내용은 흑인 여성이 백인의 가정에서 가사 일을 도우면서 겪었던 삶의 이야기가 책으로 집필되는 과정이며, 또한 그 삶의 단면들이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흑인의 이야기가 책으로 집필된다는 것은 관련자들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긴장감이 넘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겪는 차별과 편견으로 인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임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코믹하면서도 따뜻하고 또 힘과 용기를 안겨준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마음의 치유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해 보이는 다양한 태도를 통해 왜곡된 인간의 모습과 진정한 인간다움을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에서 필자의 흥미를 끄는 부분을 언급한다면, 인종의 차이에 따라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백인과 흑인이 화장실을 분리해서 사용하는 일과 관련된 일화이긴 하지만, 인종차별을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분할로 설명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백인 여성들의 공간은 주로 거실과 음식점과 파티장인데 비해, 흑인 여성들은 부엌과 교회다. 사회적 약자로서 흑인 여성들이 가정부로서 그리고 한 시민으로서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셈이다. 그들에게는 버스도 음식점도 심지어 화장실도 자유롭지 못하고 또 편하지 못하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 역시 흑인들만의 공간이었지만, 교회라는 공간이 흑인들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것, 그리고 백인 여성들의 삶이 주로 파티와 모임에서 이뤄지는 데 비해 흑인 여성의 삶은 좁은 거실과 부엌이라는 사실은 영화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기여하는 매우 대조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공간 분할은 유대인들이 게토에서 살아가야 했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감독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을 유대인에 대한 나찌의 태도에 비유한 것일까?

영화를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려는 의도는 없다. 필자의 의도는 영화의 제목과 내용에서 얻은 통찰을 기독교 내러티브 안에서 재조명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비유는 끊임없는 연상 작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실 혹은 현실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사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것은 편한 일이다. 우리의 일들이 하나둘씩 생활 가전들의 몫이 되면서, 우리에게는 언제부턴가 귀찮은 일은 언제나 직접 하기보다는 기계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습관이 생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영역을 좀 더 고상한 일로 옮겨주었고, 그렇지 않은 일들은 기계로 처리하게 하거나, 혹은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오늘날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일은 일종의 재력이나 권력을 향유하는 한 방식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사는 사람들은 곧 힘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누리는 공공 서비스가 아니라(사실 많은 경우 공공 서비스도 재력과 권력에 따라 차별적이다), 힘이 있는 사람들만이 특별하게 향유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말한다. 그러니 모두가 힘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을 안락하게 만들어주는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많은 부분에서 그들에게 철저하게 의존되어 있어서, 그들이 없으면 자신의 안락한 삶이 금방 무너질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며 폄하한다. 이에 비해 전문지식을 갖고 그들의 삶과 교양을 돕는 전문인들은 또 다른 힘, 곧 고액의 연봉을 향유한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3D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 그리고 비정규직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이다. 안락한 삶을 위해 혹은 시스템이 운영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위생과 안전을 위해, 그들의 기득권을 위해 그들을 차별하는 태도는 지극히 아이러니하다.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원하면 언제든지 대체 인력을 구할 수 있다. 영화에서 흑인 가정부들을 대하는 백인 여성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공공신학을 지향하는 한국 교회가 이 영화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평등한 사회로서 누구도 인종과 종교 그리고 성과 나이로 인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외국인과 가난한 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도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평등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보이는 교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 고무적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리 안의 타자로서 우리와는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탈북자들이나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을 목적으로 온 여성들에 대한 영화들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헬프>는 인간됨의 본질과 우리 안에 숨겨진 폭력성을 성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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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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