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한 연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오싹한 연애>(황인호, 2011, 로맨스, 코미디, 공포, 12세)

세상의 반만을 보며 사는 사람과 나머지 반쪽도 보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든다면, 아마도 <디 아더스>나 <식스 센스>, 한국 영화 <4인용 식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세 영화 모두 귀신이 나오는 공포 스릴러 영화이고 삶의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말하지만, 앞의 둘은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후자는 인생에서 숨겨진 비밀을 탐색하고 성찰하는 영화다. <오싹한 연애>는 여기에다 로맨스와 코미디를 더 했다.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결코 쉽지 않았을 작업임이 분명하다. 서로 잘 조화된다면 시너지 효과를 주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관객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적지 않은 실망을 유발할 뿐이다. 관객들도 어느 한 가지 장르에 고정하지 말고 장르의 혼합이 주는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복합장르는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의 조합으로 무엇이 생산될 수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정도 장르의 혼합으로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거의 새로운 경지를 펼쳐 보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가 보기에 <달콤 살벌한 여인>이 보여준 복합장르의 재미를 기대하며 보아도 크게 실망하진 않을 것이다.

사실 삶의 또 다른 차원인 보이지 않는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깊은 통찰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일이고, 그래서 자고이래로 영매는 어디나 존재해 왔다. 그들 나름대로 죽은 자로부터 부름을 받아 하는 일이니만큼, 단순히 미신으로 치부하기보다는 하나의 유사 종교로 보아야 할 것이며, 영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실제로 그렇다.

그런데 귀신의 부름에 따르지 않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그 사람은 병으로 인해 험한 나날들을 보낸다. <영매>라는 제목의 다큐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을 흔히 “무병”이라고 한다. 무병을 앓는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의 또 다른 반쪽을 보며 일상을 산다는 것,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오가면서 산다는 것, 그것 자체가 사실 두려움과 공포의 연속이다. 본인에게는 병으로 나타나지만,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겪는 두려움은 담력 훈련에서 경험하는 그런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혼자이며, 그 삶은 외로울 수밖에 없고, 그 인생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런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유지해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능하기 위해선 포기하고 또 극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랑을 즐기고 누리는 것만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실존의 경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가능한 일일까? 영화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한다. 영매를 중심 소재로 삼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종교성을 띠지는 않는다. 로맨틱 코미디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실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는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영화적인 소재와 표현에 매이지 않고, 그 내용을 곱씹어 본다면 예상외로 성경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여리(손예진)와 주희는 학창시절의 단짝이다. 둘은 교통사고로 잠시 숨을 멎게 된다.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누가 먼저 구조대의 도움을 받느냐에 따라 생과 사가 결정되는 순간이다. 여리는 극적으로 다시 살아나지만, 주희는 시간을 놓쳐 살리지 못하게 된다. 구조대의 손길이 먼저 여리에게 간 것은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목걸이는 부적과 같이 몸에 지니고 다녔던 주희의 것이었고,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빌린 순간에 타고 있던 버스가 추락했던 것이다. 이런 탓에 주희는 원혼이 되어 여리 곁을 맴돌고, 다른 귀신들도 덩달아서 출몰하여 그녀를 괴롭힌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귀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진 그녀와는 달리, 친구는 물론이고 그녀의 가족조차도 두려움으로 함께 살 수 없게 된다. 이런 까닭에 그녀는 단지 전화를 통해서만 가족이나 친구와 소통할 뿐, 누구와도 직접 만나면서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키기를 꺼린다. 그녀를 만나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녀의 미모 때문에 쉽게 다가서다가도, 그녀와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끔찍한 일 때문에 적지 않은 두려움을 갖고 떠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원히 혼자가 될 것인가?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녀에게 다가오는 마술사 조구(이민기)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과연 성공할 것인가? 먼저 영화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흥미롭다. 하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대한민국 상위 1%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맘이 뜨거워지는 사랑’이라고 지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의 사랑을 위해 보험이 필요로 하다는 대사다. 후자는 사랑 때문에 겪게 될 두려움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유머이겠지만, 전자는 사랑의 진정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대한민국 상위 1%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조구의 여친이 보기에, 여리와 조구 사이에서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는 말이다.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말에서도 암시되어 있지만, 사실 두려움은 미래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온다. 불행한 일이 닥쳐올 것 같은 예감이 두려움을 일으킨다. 엄밀히 말해서 두려움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뇌에는 두 개의 편도체라는 것이 있다. 아몬드 모양으로 뇌의 양쪽 안에 붙어 있다. 외부의 자극에 대한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인데, 편도체는 앞으로 일어날 위험에 대해 빠르게 대처하게 만든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발달된 기관이다. 예컨대,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생각할 여지도 없이 무조건 달리게 만드는 것은 바로 편도체에서 반응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잘못된 두려움이 있다. 불안이다. 불안은 알 수도 없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생각으로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이런 두려움은 인간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줄 수 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미래적인 것, 곧 미지의 변수를 해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심리적인 충격을 받을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공포 영화를 감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공포 영화는 다음 장면에서 나타날 것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것이 관건이다. 음향 효과를 통해 갑자기 어디선가 불현듯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관객은 무엇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두 눈을 뜨고 보지 못하게 된다. 단지 눈속임에 불과하고 실제로 놀랄 일은 아니지만 두려움은 뇌의 작용으로 실제로 나타난다. 매체가 가진 각종 특성들을 활용해서 효과를 증폭한다. 그런데 한 번 보고 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계속해서 놀라움을 안겨주지만, 더 이상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이 또 언제 어디서 나타날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조구 역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와의 관계를 불안했고, 그 관계 때문에 위협을 받았고 또 생명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가 자신의 두려움을 보험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진정한 사랑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성경은 진정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요일4:18). 두려움의 원인을 생각해볼 때, 아마도 사랑은 미래에 대한 확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 일어나든, 또 어떻게 진전되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실만을 보려는 태도일 수 있다. 이런 사랑은 관계의 위기나 생활환경의 위기 등, 살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역경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보험으로 결코 유지할 수 없는 일이다.

한편,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전제한다. 곧,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어떤 형태의 곤고함을 만나고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진정한 사랑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때 담대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두려움은 미래를 위한 각종 보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므로 나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사랑을 할 때, 두려움이 설 자리는 사라지는 것이다. 설령 미래에 뜻하지 않은 일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자들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은 엄습해오는 삶의 두려운 기운들 때문에 관계를 청산한다.

귀신이 출현하는 이런 영화는 사실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영화적인 소재와 표현에 매이지 않고, 그 내용을 곱씹어 본다면 예상외로 성경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에서 출현하는 귀신을 실재가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삶의 예기지 않은 상황으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요소를 표현하는 기호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임재하는 한 방식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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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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