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만나는 기적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고레에다 히로카즈, 2011, 드라마, 전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국 관객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감독이다. 한국인의 정서와 맞닿는 면을 잘 파악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도시의 한 아파트에 남겨진 채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그린 <아무도 모른다>(2004)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비장한 결심을 하는 한 얼짱 훈남이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로서 사무라이의 비장한 모습과 장면을 기대하게 하면서도 전혀 다른 인간의 모습을 코믹하게 그려낸 <하나>(2006), 가족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걸어도 걸어도>(2008),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허무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공기인형>(2009) 등이 있다. 이번에는 아이들의 꿈과 소원을 다룬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하 <기적>)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먼저 영화로 들어가기 전에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 ‘기적’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자. 그래야 영화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는 불트만(Ruldof Bultmann)이라는 독일 신학자가 성경의 기적들을 현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내세웠던 성서 해석 프로젝트이다. 성경 기록 당시의 세계관은 신화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어서, 성경 저자들은 당시에 일어난 일들을 신화적인 감각에 맞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인 사유물은 합리적인 사고에 길들여져 있는 현대인에게는 낯설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성경 해석자에게 요청되는 일은 본문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틀로 바꾸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불트만은 그 첫 번째 작업으로서 탈신화화, 곧 신화의 틀을 벗기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원래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실존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 이해를 위한 해석방법을 성경 이해에 적용하려고 하면서 얻었던 결과이다. 불트만은 자신의 해석을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existentialistisch) 해석과 구분해서 실존적(existential) 해석이라고 불렀다. 성경을 이해할 때, 성경 저자들의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본문을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이다. 소위 저자의 의도와 맥락을 중시하는 해석 작업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 목회자들이 성경 이해의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해석 방식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면서, 불트만은 소위 기적을 말하는 본문들을 합리적으로 해석, 아니 변형하거나 혹은 제거해, 성경이 인간의 해석 기준에 의해 마구 재단되고 편집되는 결과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병이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죽은 자를 살리신 일, 하늘로 승천,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부활까지... 겉으로는 그럴듯한 의미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뿌리를 잘라버리는 꼴이 되었다.
사실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이해와 해석을 통해 얻어지는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은 바로 이런 해석 방식에 기초한다. 이런 해석은 비록 불트만의 탈신화화 기획을 따르진 않는다 해도 그것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기적에 대한 이런 탈신화화 작업은 정당한 것일까? 성경의 내용을 사실이 아닌 의미로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진짜로 기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영화 제목의 원제는 “기적”이지만 한국에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으로 된 것은 바로 아마도 기적에 대한 현대인들의 이런 형태의 의문과 기대를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감독이 말하는 기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기적이라 함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에 위배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과학적인 설명이 기준이 된다. 그러나 단순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진 않는다. 시간과 함께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적이 아니라 탐구대상이 된다. 실제로 현대 과학은 ‘창발적’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연적인 사건을 과학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기적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기적은 좀 더 인간적이고 상황적이다. 다시 말해서 일어나는 일과 인간의 바람 그리고 일이 이뤄지는 시기가 서로 긴밀히 맞물려 있다. 예컨대, 단순히 불치의 병에서 낫게 되는 일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은 어떤 유기적인 현상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긍정적인 사고나 웃음, 그리고 그린 환경 등은 적절한 호르몬 생성을 촉진시켜 인간에게 종종 기적 같은 일들을 일으키기도 한다.
기적이라 함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당신의 방식대로 일을 행하신 것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있을 때, 그러나 그것이 감각적으로 지각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는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따른 기적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간접적인 의미에서 기적이 있다.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서 특별하게 경험하는 일들을 포함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에서 발견하는 일상이 곧 기적인 것이다. 예컨대, <르 아브르>(2011)에서는 구두닦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어려움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과정에서, 불치병에 걸린 아내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남을 보여준다. 비록 선한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진 않지만, 의사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개입인가? 물론 경우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살아갔을 때 선물로 주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렇듯 기적은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판가름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신학적인 개념인 것이다.
<기적>은 원래 철도공사가 공모하는 KTX 승차체험 수기처럼, 새로 개통되는 신칸센(일본고속전철)에 얽인 일화를 영화로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한다. 신칸센에 얽힌 일화이기 때문에 신칸센이 중심 소재가 되지만, 영화는 승차체험 수기라기보다는 신칸센에 얽힌 추억을 소재로 삼고, 일본의 여러 상황들을 느낄 수 있는 배경에서 펼쳐지는 아이들의 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요즘 아이들과는 다소 다른 환경과 분위기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꿈을 볼 수 있다.
화산재로 가득한 가고시마현에서 엄마와 함께 외가댁 얹혀사는 코이치 가족의 이야기다. 가족은 이미 해체된 상태, 동생은 아빠와 함께 후쿠오카현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규슈지방의 최남단과 북쪽에서 각각 따로 살고 있는 것이다. 아빠는 가족의 생계에는 일절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인디음악을 하며 산다. 아빠의 철없는 꿈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일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며 용납하지 못하는 엄마와 아빠의 잦은 말다툼은 결국 가족이 헤어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엄마와 함께 외가에서 사는 코이치는 초등학교 6학년이다. 언제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학교는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는지로부터 시작해서, 활화산 근처에서 살면서 매일같이 화산재를 뒤집어쓰면서도 사람들은 왜 가고시마를 떠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댄다. 사실 코이치가 불만으로 가득한 이런 의문을 품게 된 이유는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기를 내심 바라기 때문이다. 후쿠오카현에서 가족이 함께 살지 않고 떨어져서 가고시마현에 살고 있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화산이 더욱 크게 폭발해서 가고시마현의 모든 사람들이 떠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하게 가족 모두가 후쿠오카현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고시마현에 사는 사람들의 안전은? 안됐지만 도망가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코이치는 260km의 속도로 달리는 신칸센(한국의 KTX)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것을 믿는 또래 아이들과 함께 소원 성취를 위한 여행을 계획한다. 경비 마련을 위해 자판기 밑에 떨어진 돈을 줍고, 또 가지고 있는 장난감들이며 책들을 판다. 할아버지의 힘을 빌어 조퇴의 계획도 실행에 옮긴다. 동생 류노스케 역시 친구들과 함께 각자의 꿈을 가지고 만날 장소로 떠난다. 아이들의 소원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것, 나중에 커서 도서관 사서 선생님과 결혼하기, 그림 잘 그리기, 여배우가 되기, 죽은 강아지가 다시 살아나기 등. 결코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부모에 의해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부모에 의해 깨진 것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싶고, 자신의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일들이다. 약속된 역에서 서로 만난 아이들은 소개랄 것도 없이 금방 친구가 된다. 경찰 손에 이끌려 손녀딸이라고 하면서 찾아온 생전 처음 대하는 낯선 아이들의 갑작스런 방문에도 전혀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집나간 손자가 돌아온 것처럼 친절하게 돌보는 노부부의 모습이 참 인상 깊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아이들은 소원 성취가 분출하는, 두 신칸센 열차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을 향해 힘차게 달린다. 빠른 굉음과 함께 남에서 북으로, 또 북에서 남으로 달리는 두 열차를 긴장감을 갖고 바라본다. 마침내 기차들이 자신들 앞에서 서로 교차되는 순간에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원들을 힘껏 외친다.
바라던 일과 그들이 생각했던 기적은 이뤄질 것인가? 영화는 기적의 실현을 뒤쫓지는 않는다. 아마도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바람들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또 좌절하게 되는지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것의 실현이 아니라 단지 목표지점에 이르는 여정에만 방점을 두었다.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모든 과정이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 정도로 긴 장면들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일상과 그들이 느끼는 세상을 함께 느끼며 일별해볼 수 있을 정도로 감독은 장면 하나 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영화는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관객의 시선을 자라나는 아이들, 그들의 꿈, 여정에서 만나는 친절함, 그들이 보고 느끼는 많은 것들에 주목하게 한다. 이런 것들을 통해 성장해가는 일이 기적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고 묻는 것 같다. 아니, 꿈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일상들이 하나같이 기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사실 아이들이 바라는 것들은 죽은 강아지의 경우만 제외하고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직 아이들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는 자신이 기대했던 기적을 현실로 경험하게 될 것이고, 누구는 다른 길을 선택함으로써 단지 어릴 때 추억으로만 간직하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 일어난 일들도 있다. 가족 해체를 다시 원상회복하는 일을, 부모의 의지만 있으면 해결될 일을 기적으로 여기는 아이들의 생각이 안타깝다. 아마도 이런 꿈을 가진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 결정된 상황이 자신에게는 결코 재현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기적을 의미론적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과학의 영역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초월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초월적이든 의미론적이든 분명하고 또 중요한 것은 적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우리에겐 기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이면 달이 뜨는 것, 꽃이 피고 지는 것, 아이들이 자라는 것, 이 모두가 기적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인상 깊은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형제 고이치와 류스노케는 해체된 가족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정작 빌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동생은 아빠가 하는 모든 일들이 잘되기를 바랐고, 고이치는 말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세계(세계의 평화? 안녕?)를 소원했다. 왜 그랬을까? 고이치가 말하는 세계를 위한 기도에서 구체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눈을 돌려 그들이 사랑하고 또 그들이 꿈꾸는 더 큰 세상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동생의 소원 역시 아빠가 잘 돼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결국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앞에 있는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진실에 마음을 둔 포석이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도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각종 소재를 통해 형성된 작품을 통해 진리가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한다. 존재는 스스로를 예술작품에 안착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계시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예술의 신학적인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측면이다. 이 영화에서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두 명의 아이가 자신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과 또 더 원대한 것을 소원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상에서 기적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이런 예외적인 일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하나인 다음의 말씀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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