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 사회를 넘어서려면




 

 

1. 갑의 횡포, 을의 설움


공공기관의 입구에서 경비를 하는 분들이 그 건물로 들어오는 차량에 거수경례를 붙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거수경례는 군대에서 하는 인사다. 계급의 구분이 명확한 조직에서 상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일상적인 의례인 것이다. 민간인들끼리 그런 경례를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요즘 경비원들은 거의 외부 용역 업체의 직원들이라서, 일하는 현장의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차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과 공식적인 상하관계로 엮여 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깍듯한 예의를 갖추는 것은 용역업체의 지시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기관과의 재계약에 목을 매야 하는 <>의 입장에서 최대한 서비스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사원들 특히 고위직의 환심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갑을관계라는 말이 지난 해 갑자기 유행했다. 원래 그 말은 계약서에서 쓰던 용어인데, 이제 인간관계의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그것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영어에서 굳이 대응어를 찾는다면 Party AParty B 또는 ownercontractor가 된다. 일본이 서양의 계약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그 용어를 갑과 을로 번역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약의 당사자들을 구분하는 용어이지, 상하관계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일본에서 갑을관계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힘의 불균형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갑과 을이 통용된다.


, 권력, 인맥, 지식 등의 자원을 쥐고 있는 사람이 갑이다. 갑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을의 처지가 달라지고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갑을관계는 공식적인 계약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에서도 통용된다. 뭔가 상대방에게 아쉬운 것이 있는 사람이 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남녀관계에서도 구애하는 쪽이 을인 것이다. 배우자 사이에 어떤 이유에서든 눈치를 보아야 한다면 을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다른 많은 인간관계에서도 갑과 을의 관계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갑의 처분에 자신의 삶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을은 갑의 비위를 맞추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은 갑인가, 을인가? 적어도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갑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유권자인 국민의 마음을 면밀하게 헤아려야 하고, 재벌도 정치인이나 주주나 소비자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갑의 위치에 많이 서는 사람과 그 반대인 사람들로 폭넓은 스펙트럼이 형성될 수 있겠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상황에서는 갑이고 어느 상황에서는 을이다. 공식적인 조직에서는 갑과 을의 입장에 동시에 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사에게는 을이지만 부하 직원에게는 갑이다. (물론 부하 직원에게도 을이라고 느껴지는 상황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을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왜 그럴까. 갑으로서 누리는 권력보다 을로서 겪는 설움이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준 상처는 곧 잊히기 쉽지만 내가 받은 상처는 오랫동안 응어리로 남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는 과도한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갑을관계는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명백한 것일 수도 있지만, 주관적인 해석의 여지도 매우 크다. 둘 다 자신이 갑이라고 또는 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점점 더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을 을의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경제적인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면서 약자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그 맥락에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갑질이라고 한다. 계약상에서 무리한 조건을 강요하면서 횡포를 부리는 것 말이다. 생존의 터전이 점점 비좁아지는 현실에서, 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갑질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갑에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을에게 모욕감을 주는 언행이 다반사로 이뤄진다. 서울의 압구정동 아파트 경비원 분신자살에서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난해에 유난히 그런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다. 직장에서는 성희롱은 많이 줄어들었는데 파워 하라스먼트가 늘어났다고 한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막말로 상처를 주는 것을 가리킨다. 을의 처지는 단순한 역할이나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속성으로 체감되기 일쑤다. 자신의 인격이 송두리째 짓밟히고 부정당하는 관계에서 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괴감과 무력감을 수반한다. 그 감정이 분노와 적개심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그렇다면 왜 갑질을 일삼는 것일까. 힘깨나 있다고 그것을 마구 휘두르면서 타인들을 복종시키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런 저열한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2. 내가 누구인줄 알아?

 

법원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했던 어떤 젊은이의 경험이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할 때가 많았다. 하루는 법원 입구에서 유턴 신호를 기다리는데, 앞 차가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급해서 경적을 울리다가 공교롭게 함께 법원에 들어섰고 급한 마음에 그 차를 앞질러 나아갔다. 내리고 보니 그 차 안에는 법원장이 타고 있었다. 몇일 후 상사가 그 젊은이를 부르더니 앞으로 30분 늦게 출근하라고 했다. 이유는 법원장의 차보다 더 비싼 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법원장이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래 사람들이 그 불편한 심기를 헤아려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위가 한참 낮은 직원이 기관장보다 더 좋은 차를 몰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지만, 지체 높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사소한 것에 자존심을 거는 사람들이 많다. 어디에서든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이 깍듯하게 떠받들어주는 것에 익숙한 이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방식으로 계속 확인시켜야 직성이 풀린다. 예를 들어서 기념식 같은 공식 행사장에서 자리의 배치나 축사의 순서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자기보다 낮은 등급에 있다고 여겨지는사람이 더 상석으로 여겨지는자리에 앉는다거나, 더 먼저 연단에 오르게 되면 몹시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측근이나 비서들은 시시콜콜한 것들을 알아서 챙겨야 한다. 그런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해보면 그런 위세 경쟁을 둘러싼 이런저런 압력들을 실감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권력을 순조롭게 과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 아무렇게나 대한다고 여겨지는사람, 또는 자기의 신분을 알고는 있지만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지는만큼의 대우를 해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가 나고, 참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다. 그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 있다. 바로 내가 누구인줄 알아?’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다 보면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그렇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 화자의 주인공은 대개 남자들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내가 누구인 줄 알아?’라는 말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 희박한 정체성이 답답해서 제발 좀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는 실존의 절규라는 것이다. 말장난처럼 붙여본 해석이지만,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그렇게 다른 이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권세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회적인 인정을 중시하는 것은 존재의 뿌리가 허약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런 사람들은 두려움을 많이 갖고 있다. 내면이 빈곤하기 때문에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초조해 한다. 진정한 실력이 있거나 그것이 없더라도 스스로 행복한 경험을 창조할 수 있다면 편안하게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기에 늘 방어적이고, 사소한 것에 신경질을 낸다. 자기에 대한 불만을 상대에 대한 질책으로 해소한다. 자기의 허약함이 드러나기 전에 선제공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자기보다 힘이 약한 사람 앞에서만 자기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상하관계를 객관화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궁리하는데, 모욕과 경멸이 단골 메뉴가 된다.



3. 느슨한 연대, 열린 관계

 

모멸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갑질은 권력관계나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상황에서 자행된다. 힘의 위계 속에서 눈치를 살펴야 하거나, 금전적인 우열 속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사야 할 때 을의 처지가 된다. 그러한 일방적 관계 속에서 부조리한 처사가 횡횡하기 쉽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폐쇄적인 울타리에 틈을 내서 합리성이 작동할 수 있도록 투명성을 제고하는 일이다. 보편적인 선()과 정의로움이 깃들 수 있도록 개방하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그 실체를 조명해야 한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을 보자. 그 회사 내부인의 입장에서 조현아 씨의 이번 행동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직원들을 노예처럼 취급하며 갖은 비난과 욕설로 모욕감을 주는 태도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회사는 자신의 절대 권력이 마음껏 행사되는 왕국이었다. 누구도 거기에 저항은커녕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비행기를 회항시키지만 않았어도 아무 문제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폭언 다반사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렇듯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던 조현아 씨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죄를 하고 결국 징역형 선고까지 받게 된 것은 그 어이없는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이라는 아성에 감히 작동할 수 없었던 상식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회적인 잣대가 적용되면서, 그동안 내부에서 당연시되거나 묵인되어온 관행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직원들 위에 슈퍼 갑으로 군림할 수 있었지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그 모든 권력이 돈에서 오는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 아무리 커다란 기업이라도 비인간적인 요소가 지나칠 때 공분(公憤)을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해도 인지상정의 공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그러한 마음이 움직이는 사회적 연대가 절실하다. 친밀한 사람들끼리의 강한 연대(strong tie)가 아니라 낯선 사람들 사이의 느슨한 연대(loose tie)가 필요하다. 느슨하다는 것은 허술하다거나 피상적인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의 핵심은 개방성과 유연성이다. 강한 연대에서는 특정한 가치를 기준으로 모종의 우열이 비교되기 쉽고 나이나 지위에 따른 위계서열이 고착되기 일쑤다. 그에 비해 느슨한 관계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자유롭게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대할 가능성이 높다. 자연인 또는 시민으로서 보편적인 권리를 대등하게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토대 위에서 시민사회의 공론장이 다양하게 열릴 수 있다.


느슨한 유대의 위대한 힘을 증명해주는 일이 최근에 호주에서 벌어졌다. 지난 해 12월에 시드니 시내에서 벌어진 인질극으로 인해 반이슬람 정서가 확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제이콥스라는 여성이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어떤 무슬림 여성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서 히잡을 살며시 벗는 것을 보았다. 제이콥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걱정마요, 제가 당신과 같이 있어줄께요라고 말했고, 이에 무슬림 여성은 울음을 터트리면서 제이콥스를 포옹하고 나서 혼자 걸어갔다. 이 사연이 트위터에 공개되었고, 어느 네티즌이 "종교적인 복장으로 혼자 버스에 타기 불안한 분이 있으시면 제가 같이 타드릴게요. 버스 타는 시간 알려주세요"라고 올렸다. '#같이 타드릴게요'라는 태그가 번져 2시간 만에 4만 건, 4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15만 건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문명의 수준은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만큼 배려가 이루어지는가를 기준으로 가늠할 수 있다. 낯선 사람들끼리 서로를 지켜주고 협력할 수 있는 신뢰가 그 핵심이다. 갑질의 무자비함을 제어할 수 있는 공의(公義)는 그러한 바탕 위에서 자라날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는 초고속으로 진행되었고 민주주의의 경험도 압축적이었다. 그래서 시민적인 질서와 보편적인 규범을 스스로 세우고 내면화할 겨를이 없었다. IMF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는 저성장 경제 속에서 사람들의 심성은 더욱 각박해져가고 있는 듯하다. 제몫 챙기기에 급급하게 만드는 경제 체제와 사회 구조 속에서, 공동의 선()을 창출하여 모두의 삶을 격상시키는 기틀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절박한 과제다.



4. 극기복례와 자존감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인가. 오랫동안 유교를 숭상해온 나라답게 우리는 지금도 윗사람에 대해 예의를 잘 갖추는 편이다. 지하철에서 경로석이 확실하게 보장되고, 일반석에서도 노인이 서 있으면 젊은이들은 자리를 거의 양보한다. 집단이나 조직 안에서도 위계서열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와 대조적으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켜지지 않는 모습이 곳곳에서 너무 자주 드러난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행태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으면서 종업원에게 막말을 한다. 그리고 자주 접하거나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갑질도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란 무엇인가. 유교학자 핑카레트(Fingarette)는 그것을 인간의 상호의존과 존경을 내용으로 하는 성스러운 의식이라고 정의한다.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문화권의 연구자로서, 그 개념을 최대한 보편적인 언어로 풀이한 것이라고 본다. 예는 의식이기 때문에 겉치레와 형식에 불과한 것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우리는 허례허식에 매달리고 체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의 핵심은 자기를 억제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신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충서(忠恕),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먼저 세우고, 자기가 이루고 싶으면 남을 먼저 이루게 하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에서 압축되듯이, 자신을 넘어서는 곳에서 예는 실현된다. 사람과 사람을 아우르는 천지만물의 질서로 심신이 고양될 때 ()’이라는 사람됨의 길이 열린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갑을관계는 비좁은 에고에 집착하는 병리의 한 징후이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행태를 극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떠받듦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격()이 높아지는 역설을 체득해야 한다. 그 상호존중의 미학을 사회적인 윤리로 확장시켜 갈 때, 갑을관계의 덫에서 서로 해방될 수 있다. 진정으로 힘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할 수 있다.


타인 위에 군림하지 않고 위엄을 누릴 수 있을까.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한 기품은 어디에서 우러나올까.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어느 수도원 사제들의 우아한 자태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수도회의 사제, 그 가운데서도 우아한 복장을 한 사제들은 좌중에서 특히 두드러져 보였다. 그들의 복장은 순종과 절제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상당한 위엄을 부여해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고서도 겸손하게 보이도록 행동할 줄 알았다. 그러다가도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을 때면, 다른 어떤 신분의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을 자족감을 보이고 있었다.’


자족감이란 자기 안에 갇혀 안주하는 폐쇄적인 만족감이 아니다. 세계에 열려 있으면서 존재의 뿌리에 든든하게 중심을 내리고 있는 무게감이다. 사소한 권력이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너그러운 품성으로 타인을 헤아리고 수용하는 품격이 거기에서 우러나온다. 그 경지에서 우리는 자신을 존중하고 타인을 공경할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자존감의 발현이고, 그러한 기풍이 사회와 마음에 스며들 때, 사람다움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구현될 수 있다.

 

자료 제공: (사)한국기독교언론포럼


글을 쓴 김찬호 박사는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로 있다. 사회학을 전공했고 일본의 마을 만들기를 현장 연구하여 박사논문을 썼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과 교육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서울시대안교육센터 부센터장을 지낸 바 있고, 현재 교육센터 마음의 씨앗 부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을 비롯해, 『사회를 보는 논리』 『도시는 미디어다』 『문화의 발견』 『휴대폰이 말하다』 『교육의 상상력』 『생애의 발견』 『돈의 인문학』 『인류학자가 자동차를 만든다고?』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작은 인간』 『경계에서 말한다』 『학교와 계급재생산』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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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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