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영화 <아가씨> 읽기 -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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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칸 영화제에서 경쟁작으로 출품되었고, 미술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02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삼아 제작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1부와 2부 전반부의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새로운 창작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은 물론이고 인물 캐릭터와 시대적 배경까지 모두 달라졌다. 세라 워터스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19세기 동성애 문학을 연구했는데, “핑거스미스는 자신의 연구 경력을 살려서 지은 소설이다. 거듭되는 반전으로 유명한 이 소설을 에이슬링 월시 감독이 2005년에 원작에 가깝게 제작한 동명 제목의 영화와 비교하면, 박찬욱 감독의 영화적 특징과 원작과의 차이를 확인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핑거스미스>에 더 끌리지만, 원작에 나오는 신분의 뒤바뀜 문제는 대한민국 드라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다소 식상함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 새로운 각색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비주얼과 시대적인 문제를 반영하는 점에선 <아가씨>가 더 뛰어날 뿐만 아니라 감독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영화 이야기

 

(※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이며 일제 군국주의가 가장 빛을 발하던 시기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후 맘속에 언제나 생과 사를 품고 사는 귀족 히데코(김민희)가 있다.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은 탓에 유일한 핏줄인 이모의 손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후견인은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이다. 그는 일본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다.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기 위해 귀화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인 아내와 이혼했을 정도다. 그는 뛰어난 성애를 묘사하는 글들을 찾아내 일본인 귀족들에게 읽혀주는 일종의 독서클럽을 운영한다. 물론 외설로 가득한 글을 사람들 앞에서 읽어야 하는 사람은 그의 아내, 곧 히데코의 이모(문소리)였고, 그녀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후로 코우즈키 이모부는 엄격한 훈육을 거쳐 조카인 히테코를 그 자리에 앉힌다.

 

어느 날 한 남자(하정우)가 그녀가 결혼하게 되면 물려받을 재산이 있음을 알고 접근한다. 자칭 백작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조선의 버려진 아이들을 일본에 팔아넘기는 사기꾼에 불과했던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먼저 아가씨의 원래 몸종을 내보낸 후에 자기와 함께 일하는 고아 출신 숙희(김태리)를 히데코의 하녀로 보낸다. 숙희의 도움을 받아 히데코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결혼한 후에 히데코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재산을 탈취하겠다는 속셈이다.

 

하녀인 숙희는 백작과 자신 꾸민 음모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자신에게 맘을 빼앗긴 아가씨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고, 아가씨가 자살을 하려고 하는 순간에 자살을 막으면서 백작과 자신이 꾸민 음모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숙희는 아가씨에게서 또 다른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듣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는 계획이었다. 누구를 위한 계획이 실행에 옮겨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숙희가 모르게 실행된 또 다른 계획에 따르면, 백작은 처음부터 자신이 접근하는 이유를 히데코 아가씨에게 드러낸다. 단지 돈만이 아니라 후견인에 의한 구속과 성적 착취에서 아가씨를 자유롭게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모부가 히데코의 결혼을 승낙해줄 리가 없기 때문에 야반도주를 계획하는데, 문제는 어디를 가든 이모부가 아가씨를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는 사실이다.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가씨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고, 하녀를 그 희생양으로 선택하여 이중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아가씨를 속이려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하녀를 속인 것이다. 두 여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백작의 음모를 알게 된 두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오히려 백작과 이모부에 대한 통쾌한 복수극을 성공시키고 자유로운 삶을 산다.

 


여성주의적 의미

 

이야기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의 전반부는 원작과 동일하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각으로 조명되어 있다. 원작에 충실한 부분인데, 숙희의 시각과 히데코의 시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다른 시각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백작의 두 개의 상반된 음모를 각각 분리해서 보여준 것이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시각이 아니라 두 개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1(하녀를 통해 아가씨를 희생시키는 음모)2(하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음모)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야기는 크게 보아 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상태를 진지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아가씨와 돈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려는 백작의 음모를 스릴러 형식으로 다룬다. 겉보기에는 후견인인 이모부의 구속과 성적 착취에서 그녀를 해방시켜주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자유는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남자에 의한 구속과 착취로 이어지고, 게다가 백작의 야욕을 채워주기 위해 다른 여성을 신체적으로 구속하고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얻는 대가일 뿐이었다. 전형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 갇혀 반복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여성의 숙명적인 한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굴레에서 두 여성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을 해도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두 여성은 서로 의기투합한다.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성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착취한 이모부와 그의 구속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미명하에 접근하면서도 또 다른 구속에 불과한 백작에게 통쾌한 한 방을 먹이고, 여성 자신들만의 힘으로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누린다. 숙희가 아가씨를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 책들을 찢으며 서재를 무너뜨리고, 또한 이모부의 허락 없이는 나갈 수도 없고 또 들어올 수도 없게 하는 경계선이었던 뱀의 머리를 파괴하는 장면은 여성주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데, 곧 마침내 숙희와 히데코가 남성중심의 울타리를 벗어났다는 것을 가리킨다.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동성애 장면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압델라티프 케시시, 2013) 를 연상케 한다. 남성사회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을 향한 남성의 관음적인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감독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감독의 설명보다는 영화가 실제로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이 되었는지가 관건이겠다. 아직 미혼인 히데코에게 외설 소설을 읽히는 장면 역시 매우 자극적이지만, 여성이 겪는 현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말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상업영화의 성격상 충분히 남성들의 시각을 고려해서 평가할 여지가 없지 않고, 또 그것을 전면 부정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필자는 두 여인의 성애가 하나의 약호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곧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난 후에 삶의 희열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고 또 여성의 해방과 연대의 기쁨을 굳이 동성애 코드로 나타내야 했는지를 의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표현한 것은 다분히 원작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개되는 내용만을 놓고 보면 자신을 이용하고 버린 남성에 대한 복수극을 다룬 <친절한 금자씨>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고 보는데, 남성에게 구속되고 이용당하며 또 성적으로 착취 받는 여성이 남성을 복수하고 또 여성 스스로의 힘에 의해 남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한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긴 여성주의 영화로 여겨진다. <아가씨><델마와 루이스> 그리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연결 짓는 시도가 있는 것도 여성주의적인 독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해방

 

그런데 필자는 이 영화를 단순히 여성주의 영화로만 볼 수 없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점이 없지 않았지만, 설령 감독의 인터뷰가 없었다 해도 영화의 배경이 1930년대로 설정되어 있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는데, 필자는 과거 한국과 일본 그리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다음의 사실을 고려해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네 명(아가씨와 하녀 그리고 백작과 이모부)의 캐릭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일 합방은 조선이 근대화를 시작할 즈음에 이뤄졌다. 이미 조선말부터 시작된 나라의 혼란은 근대화 과정에서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히데코의 출생) 이런 극도의 혼란에 빠진 조선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주권 상실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본은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내선일치를 종용하였고, 그 속셈은 조선을 자기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었다. 조선을 위한다고 말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조선은 그들의 욕망 충족을 위한 노리개에 불과했다. 일본은 국가의 주권만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을 이간질했고, 조선의 말과 정신을 파괴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 조선인들 중에는 일본인보다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조선인을 착취한 친일파들이 있었다.(코우즈키 이모부가 지게 위에서 우아하게 책을 읽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조선인을 통해 조선인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써 우리 안에는 지금까지도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해방은 되었다 해도 이것이 진정한 해방일까 싶다.

 

한편, 이웃나라들은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조선의 해방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권을 챙기기 위한 야욕에서 그들이 얼마나 떳떳할지 의심이 든다(백작이 아가씨에게 접근한 목적). 해방이라고 해봤자, 결과적으로 그들의 실속을 챙기기 위한 먹이거리로 전락할 뿐이었다. 남북이 적대적으로 갈라지고 난 후 전개되는 이념적 갈등의 비극은 여전히 대한민국 안에서 진행 중이다. 우리의 진정한 해방은 무엇을 통해 얻을 수 있을까?

 

두 여성은 한편으로는 남성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을 대변한다.(히데코와 숙희)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코우즈키 이모부처럼 적극적인 친일세력이 아니라면 모두가 피해자였다는 말이다. 진정한 해방을 위해선 외세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서로 연대할 때만 가능하다. 마른 나뭇가지 하나는 쉽게 부러질 수 있어도, 세 개가 함께 모이면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영화 속 동성애

 

현재 한국사회, 특히 기독교에서 동성애는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따라서 영화 속 동성애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그다지 편치 않은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점은 단순한 추측을 넘어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 <아가씨>에서 사용된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는,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는 동성애적인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히데코를 통해 낭독되는 소설 중에도 등장하고, 이빨이 아프다는 히데코의 말에 숙희가 골무를 끼고 이빨을 만져주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성애를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매우 강력한 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킨다. 구체적인 동성애 장면은 결혼 초야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묻는 히데코의 질문에 하녀인 숙희가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 벌인 베드신과 두 남자의 욕망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가 된 몸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두 사람의 베드신이다.

 

감정을 통제하도록 훈련받은 히데코에게 성적인 감정은 다만 소설에서 읽고 또 소설에 삽입된 춘화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일 뿐, 자신은 그런 감정에서 초연할 수 있도록 훈육되었다. 그런 히데코에게 인격적인 만남에서 이뤄지는 성적인 감정은 본인에게도 충격적이었고 또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숙희와 히데코의 관계에서 첫 번째 동성애는 다만 오직 히데코의 머리에 있는 성적인 판타지를 시각화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원작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동성애 연구가가 쓴 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한다면, 두 여성의 동성애는 서로를 겨냥한 백작의 이중 음모를 모르고 있는 두 여성이 서로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연대하는 힘을 얻는 과정에서 매우 필요한 장면임을 영화는 설득한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앞서 언급했듯이, 남성의 구속과 성적인 착취로부터 해방을 경험한 두 여성의 희열과 연대의식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예술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장면 자체를 특별하게 문제 삼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동성애를 통하지 않고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이미 이전부터 드러나 있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한편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표현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공감을 한다. 그러므로 영화 속 동성애는 다분히 원작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의 의미를 위해 사용된 동성애 장면 자체를 두고 섣불리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편, 영화의 의미를 표현함에 있어서 동성애를 하나의 기호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여성 동성애는 남성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는 것인가? 여성 동성애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연대의식의 반영일까? 이런 의미에서 동성애는 사회문화적으로 관용되어야 하는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아가씨>는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일련의 질문을 매개로 성찰하면서, 필자는 동성애가 영화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동성애적인 표현들이 상업적인 측면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예컨대, 만일 남성의 억압과 착취를 고발하는 의미로써 여성 동성애의 정당성을 이해한다면,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도 그렇고 여성 억압이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에서 여성 동성애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따라서 <아가씨>에서 사용된 동성애적인 표현은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동성애를 성차별과 여성 억압이 낳은 결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최성수 박사가 본 <아가씨>는?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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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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