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봇, 소리>를 보고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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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로봇, 소리>


최 성 수*


(이호재, 드라마, 12, 2016)

 


※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로봇, 소리> 예고편



10년 전 실종된 딸, 포기하려는 순간 녀석이 나타났다!

2003년 대구, 해관(이성민)의 하나뿐인 딸 유주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아무런 증거도 단서도 없이 사라진 딸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해관은 10년 동안 전국을 찾아 헤맨다. 모두가 이제 그만 포기하라며 해관을 말리던 그때,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억하는 로봇 소리를 만난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이 녀석이 내 딸을 찾아줄 것 같습니다.”

해관은 목소리를 통해 대상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로봇의 특별한 능력을 감지하고 딸 유주를 찾기 위해 동행에 나선다. 사라진 딸을 찾을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소리가 기억해내는 유주의 흔적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둘. 한편, 사라진 로봇을 찾기 위해 해관과 소리를 향한 무리들의 감시망 역시 빠르게 조여오기 시작하는데과연 그들은 사라진 딸 유주를 찾을 수 있을까?


2003년에 일어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사회의 안전망에 총체적인 부실을 폭로했던 계기가 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비록 한 사람의 방화로 시작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물론 그 후에도 안전사고는 끊이지 않아 임시방편에 불과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명을 달리했고, 사망자와 관계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안타까운 소식을 지켜본 수많은 국민들을 슬픔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로봇, 소리>는 대구지하철 참사를 추억하는 영화다. 사건을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대신에 감독은 소리를 매개로 하는데, 추억하는 방식이 매우 새롭다. 곧 세간에서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 문제와 정보전쟁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벌어지는 미국과 한국 정보원의 갈등관계로 이야기가 둘러싸여 있어 중심 토픽에 접근하는 태도가 대단히 은은하고 흥미진진하다. 대구지하철 참사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묻거나 탐색하려는 의도는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다만 13년이 지난 후라도 참사 희생자와 가족의 관계에서 아직도 진행 중인 슬픔과 아픔을 소리를 매개로 애틋하게 보여줄 뿐이다. 또한 소리를 매개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와 부모를 떠날 수밖에 없는 자녀에 대해 성찰하면서, 부모와 자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나와 너를 잇는 소리

영화의 소재인 소리에 대한 이야기로 접근해보자. 소리는 그 종류가 많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고유하여 목소리를 통해 특정인을 식별해내는 기술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음성 구조는 다소 유전적이라도 목소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잠시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관계의 변화는 소리를 통해 나타난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어떤 종류, 어떤 형태의 소리로 소통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지금 내가 그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 줄을 알 수 있다.

소리의 매력은 그것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또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 연인들의 소리는 달콤하고,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요정들의 노랫소리는 영혼을 사로잡으며,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는 소리들은 친밀하다. 숲 속에서 듣는 나뭇잎들의 춤추는 소리는 마음을 치유하고, 바닷가에서 듣는 파도소리는 때로는 오래 전 기억을 회상하는 듯 때로는 미래의 꿈을 꾸는 듯 아련하다. 도시의 번잡한 소리는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는 해도 때때로 생동감을 준다. 성악가들의 소리는 천지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마음을 모아주고, 각종 악기들이 내는 소리들은 영혼을 들썩거리게 한다.

소리에는 힘이 있다. 소리로 유리를 깨기도 하지만, 소리를 통해 권위를 표현한다. 소리에 내재한 힘의 속성 때문에 과거에는 신분에 따라 내는 소리가 달랐다. 하나님의 소리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실 정도로 권능을 갖고 있다. 때때로 소리는 그 변화무쌍함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소리가 변하면 동일한 사람이라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혹은 관계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소리는 달라진다. 기분이 좋을 때, 화가 나 있을 때, 슬플 때, 행복할 때, 대화할 때, 외칠 때 등. 소리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위로를 주기도 한다. 심지어 소리는 사람을 살리기도 또 죽이기도 한다. 사람은 소리를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특정 감정을 표현하거나 원하는 뜻을 성취한다. 아니, 소리가 변함으로써 사람은 그런 소리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소리는-음향의 형태든 말의 형태든-귀에 들리는 것이다. 소리가 있다 함은 듣는 귀를 전제한다. 들을 귀를 염두에 두지 않는 소리는 더 이상 소리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 의미 없는 소리, 공허한 소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귀에 들리진 않아도 기계장치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소리들도 있다.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고막으로 들을 수 있는 범위를 넘기 때문에 들을 수 없기도 하다. 그러나 일상 언어적인 측면에서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을 일컫는다. 소리가 있었지만 듣지 못했다면, 청각신경에 이상이 있거나 들을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소리를 듣는 일에도 마찬가지다. 설령 들었다 해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못들은 것과 다르지 않은 반응을 한다.

 

소멸된 소리를 찾아서

<로봇, 소리>는 비록 소리의 미학을 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진 않아도, 사람의 관계를 소리와 관련해서 성찰하도록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이 전혀 이질적인 것의 소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음으로써 비로소 진실을 깨닫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설정되어 있는 소리와 관련해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유주(채수빈)가 어릴 때 아버지 해관(이성민)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갑작스런 부재로 부모의 마음을 애태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서 있는 딸을 발견한 아버지의 소리에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오가는 소리는 때로는 연인 사이에서 오가는 것이기도 했고, 때로는 친한 친구 사이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딸이 커가면서 해관에게 들리는 딸의 소리는 점점 드물어지고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엔가는 엄마와 딸 사이의 비밀에 파묻혀 듣기가 쉽지 않게 된다. 딸의 성장과 함께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다. 딸은 자신의 소리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옮기는 중이었지만, 아버지는 이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소리에 딸이 귀 기울여 줄 것만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삐걱거리자 결국 딸의 소리는 거짓말로 둔갑하고 아버지 해관의 분노로 가득한 고성을 유발한다. 자신의 소리로 아름다움을 만들고 싶다며 흐느끼는 딸의 소리와 해관의 고성이 뒤섞인 혼잡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딸과 헤어지고, 그 후로 둘은 서로의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다. 대구지하철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아버지 해관은 더 이상 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황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종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단지 들을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해관은 그렇게 소리를 찾아 10년 넘게 방방곡곡을 찾아다닌다. 그러는 중에 어느 섬에 이르게 되었는데, 해관은 이곳 인근 해역으로 떨어진 위성을 발견한다. 위성은 미국이 전 세계 통화를 도청하기 위해, 곧 각종 소리를 수집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했던 전략에서 만든 인공지능이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스스로 상황을 판단해 궤도를 이탈해 추락한다는 설정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인공지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한 소녀의 소리에 대해 반응을 했다는 사실에 천착해서 본다면 그렇게 흠잡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 모든 소리를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있는 로봇임을 보여주고 싶은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해관은 모든 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로봇을 통해 딸의 행방을 찾을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고, 로봇에게 소리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함께 딸을 찾아 나선다. ‘소리가 기억하고 있는 딸의 통화 내역을 추적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결국 이르게 된 곳은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났던 역이다.

 

소리를 듣는 방법

영화는 대구지하철참사를 추억하면서, 아버지가 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또 그동안 오해로 점철된 관계를 회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일종의 아버지 성장 영화이며 또한 로드무비다. 영화를 통해 얻는 질문은 이렇다. 부모는 어느 정도까지 자녀를 보호해야 하는가? 지극히 평범한 질문을 소리와 관련한 이야기를 통해 제기하는 것이 신선하다.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은 많은 경우 구속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아빠 해관과 딸 유주의 관계가 바로 그랬다. 이것은 단지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과거에 비해 부모와 함께 사는 기간이 길어지고, 또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모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성년이 되어서도 부모의 통제를 받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다. 본인이 원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부모의 과잉보호가 성인 자녀를 지속적인 미성년으로 머물게 만들기도 한다. 로봇 소리가 말하고 있듯이, 보호라고 해서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자녀는 언제든지 부모를 떠나야 하고 또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비록 자녀들이 힘들고 험한 길을 선택하여 걷더라도,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주는 것이 부모로서 올바른 도리가 아닐까. 마지막 장면에서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로봇 소리의 모습은 비록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해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면 박수로 격려해주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영문 제목을 보니 내면의 소리(voice from the heart)”로 되어 있다. 이는 영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딸은 멀리 있지 않고 아빠 자신 안에 숨어 있었다는 의미로 독해된다. 자신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려 했던 결과가 딸과의 이별로 이어졌다면, 10년의 시간은 자신의 내면에 울리는 진실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채 방황한 세월이다. 해관은 딸의 소리를 알려주는 로봇 소리와 함께 한 여정에서 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됨으로써 비로소 아버지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우리가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내면의 소리가 있음을 환기하고,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것에 귀 기울일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놓쳤을 때 어떤 비극이 전개될 수 있는지를 대구지하철 참사를 비유로 삼아 이야기하고 있다.

 

소통 - 하나님의 소리, 인간의 소리

소리는 기독교에서 매우 비중 있는 위치를 차지한다. 창조의 과정은 소리와 함께 이뤄졌고, 하나님은 소리를 통해 인간과 소통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애굽의 억압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내려오셨다. 인간의 탄식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 기도는 마음의 소리로 혹은 육성으로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당신의 뜻에 따라 응답하신다. 가난하고 억울한 자의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또 그들의 소리를 외면하는 자들에게 엄히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서 찬양 소리를 듣길 원하셨다. 소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매개이다. 나팔 소리와 함께 임재하시고, 미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은 스스로를 외치는 소리로 인식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듣는 이에게 복이 되는 소리를 말한다. 하늘의 소리를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선포되었다.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안에서 안식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깨워 세상을 잠잠케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내 안의 성령의 소리를 듣고 듣지 않는 것은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중요한 일이다.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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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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