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버넌트>를 보고 - 생존과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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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과 공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모험/드라마, 15, 2015)


최 성 수*


※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영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예고 동영상


2016년 가장 강렬한 실화!  전설이 된 한 남자의 위대한 이야기!

서부 개척시대 이전인 19세기 아메리카 대륙, 사냥꾼인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아들 호크를 데리고 동료들과 함께 사냥하던 중 회색곰에게 습격 당해 사지가 찢긴다. 비정한 동료 존 피츠 제럴드(톰 하디)는 아직 살아 있는 휴를 죽이려 하고, 아들 호크가 이에 저항하자 호크 마저 죽인 채 숨이 붙어 있는 휴를 땅에 묻고 떠난다. 눈 앞에서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휴는 처절한 복수를 위해 부상 입은 몸으로 존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살아남기 위해서 - 승자와 패자 사이에서

살아남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생명을 지속하기가 힘든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전제하며, 이런 상황과 조건을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고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것이 생존의 의미다. 생존을 위한 노력은 모든 생명체에게 본능적이다.

어려서 진화론을 배울 때 빠지지 않고 들었던 말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것들만이 진화의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넉넉하지 못해 경쟁은 불가피했고, 이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진화의 기회를 얻었다는 말이다. 인류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고도 했다. 인류 사회의 생존경쟁은 새로운 인류의 출현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들으며 자랐다.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적합한 자만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해서 적자생존이라 말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대부분 전쟁이나 질병 그리고 자연재해로부터 생존이었다면, 시간이 갈수록 인문학적 환경과 조건에서 일어나는 경쟁 비중이 커졌다. 천성적으로 경쟁을 싫어한 나는 참으로 끔찍한 현실이었다.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며 살아온 나는 그래서 늘 아웃사이더이다.

경쟁에서 이긴 자는 강한 자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강자가 되어 살아남기 위해선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체력을 단련해야 하고, 지력을 위한 교육도 받아야 한다. 최근에는 감성지수도 하나의 힘으로 작용함에 따라 감성교육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어,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더 좋은 조건의 파트너를 얻어야 한다. 성공 신화와 맞물려 사회에서 성공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성과사회로의 진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뤄졌고, 지금은 그 후유증 단계인 피로사회라 불린다.

힘의 크기를 결정하는 기준도 바뀌었다. 육체적 힘, 군사력, 기술력, 지력, 감성, 정보력, 금융자본력 등, 시대에 따라 힘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경쟁의 양상도 바뀌었다. 오늘 대한민국은 강자와 1등 그리고 성공한 자들만 기억하는 사회로 인지된다. 특히 권력과 자본력이 생존을 좌우하는 불평등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쟁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다 보니 권력과 자본력에서 뒤진 사람은 뒤질 수밖에 없다. 자살은 생존의 의지를 상실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방법이다.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은 그만큼 생존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 이기와 이타 사이에서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생존시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생존이 하나의 문화 코드로 여겨진 것이다. 그만큼 인문 및 자연 환경과 조건이 열악해졌고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거리로 부각되었다.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한 전략에 기여하도록 조율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고 또 실제로 그렇다. 생존시대에는 만일 윤리적으로 특별한 통제가 없다면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창궐할 수밖에 없다. 생존본능 자체는 극도로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DNA를 남겨 놓으려 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라고 한 것인데, 이기성은 일종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러므로 생존을 하나의 문화코드로 삼는 사회는 지극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피하기 위해선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에 천착하여 살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또 그 대답을 찾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가 전부인 사람들이 있다. 노숙자, 독거노인, 실직자, 구직자, 비정규직, 노사 간의 갈등으로 노동쟁의 중에 있는 자, 을의 입장에 있는 자, 보험적용에서 제외된 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가족 등. 이들은 사실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생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삶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자신이 가진 기득권으로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와 경쟁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생존해야만 한다면 타인을 배려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 수만 있다면 타인이 받는 불이익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생명 자체에 가치를 두는 사회에선 사는 것이 선한 것이 된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 있는 것이 결국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는 한 면죄의 기회는 언제나 존재한다. 역사를 평가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런데 생존의 위기를 겪는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혹은 굳이 경쟁관계에 있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생존을 가능케 하는 추진력이면서 또한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악의 근원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생존보다는 공존을 더 소중한 가치로 삼아야 한다.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수 있도록 조율되어야 한다. 만일 생존경쟁이 진화의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면, 반대로 공존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더욱 드러내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생존 가능성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보다는 배려하는 쪽이 훨씬 더 높아진다. 영화 <라이프 오프 파이>(이안, 2012)는 기록적인 표류기간을 보낸 후에 구조된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그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면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잡아먹으려 했던 호랑이와 한 배에서 공존했기 때문이다. 생존의 시대가 깊어질수록 그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가야 하는 당위성이 커질수록 교회는 공존의 가능성과 가치를 위해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죽음 - 욕망과 복수 사이에서

<레버넌트>는 대사도 별로 없고 단지 보고 느끼는 영화이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성찰이 다소 길어졌다. <레버넌트>89회 아카데미에서 네 개 부분에서 후보를 올렸고, 평론가들은 그 중에 특별히 주연으로 출연한 디카프리오의 열연에 상응하는 대가가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말해서 생존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버드맨>에 이어 또 다시 감독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 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롱테이크로 잡은 배경이 너무 아름다워 반드시 영화관에서 볼 것을 권한다. 내용적으로 영화는 미국 역사에서 서부시대가 열리기 전 시기에 전설적인 사냥꾼으로 소문난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곰을 만나 거의 반죽음의 상태를 겪은 후에도 혹한의 추위를 이겨낸 생존 실화를 담고 있다. 대사가 별로 없고 상영시간도 길어 조금 지루한 것 같아도 아름다운 영상 때문에 결코 졸리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서구인은 원주민들과 공존하기보단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인디언 부족을 전멸시키기도 하고, 그들을 속여 이익을 얻기도 했다. 물론 역으로 인디언의 보복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먼저 공격한 것은 서구인들이었다. '휴 글래스'는 서구인 출신으로 인디언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아들 '호크'를 얻는다. 그러나 서구인의 공격에 아내가 죽은 후 '글래스'는 '호크'와 함께 서구인들의 가죽사냥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비록 아내를 잃었지만, 아들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다 숲 속에서 곰을 만나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대장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고 치료한 후에 데리고 가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혹한의 추위와 눈보라로 '글래스'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대장은 더 이상 그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한 후에 그를 돌볼 사람을 남겨두고 떠난다. '글래스'를 돌보기 위해 남게 된 '존 피츠 제럴드(톰 하디 분)'는 인디언의 추격을 받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글래스'의 아들 '호크'를 죽일 뿐만 아니라 또한 더 이상 살 희망이 없어 보이는 '글래스'를 산채로 매장하였다. 그에 대한 복수심은 '글래스'가 생존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는데, 결국 생존을 위한 노력은 본능적이라도, 생존을 실현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피츠 제럴드'는 생존의 의지가 욕망을 만나게 될 경우를 대표한다. 생존의 의지 자체가 삶의 욕망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피츠 제럴드'는 자신의 삶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존을 등한시 하였다. '글래스'에 의한 복수는 이런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할 것인지를 형상화한다.

비록 인간으로서 생존을 염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해도, 기독교인은 생존보다 공존을 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메리카 점령군과 원주민 사이의 관점의 차이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들의 상반된 관점을 은유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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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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