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리덤>을 보고 - 한결같은 은혜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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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은혜와 자유

<프리덤>

(피터 쿠센스, 드라마, 12, 2014)

 

최 성 수


<프리덤>10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두 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 영화다. 두 이야기는 평행구조로 전개된다. 한편에는 영국 노예 무역선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1725~1807)의 회심(1748)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100여년이 지난 후인 1856년에 미국의 한 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도주하여 퀘이커 교도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캐나다에 안착한 노예 사무엘의 회심이 있다.

 

두 이야기를 이어주는 매개이면서 또한 영화의 중심 소재가 되는 것은 찬송가 305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요에 존 뉴턴이 가사를 붙여 만든 이 곡은 1772년에 출간되었는데, 뉴턴이 회심이 있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영어로 된 찬송가 중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고 또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찬송가로 꼽힌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이 찬송가의 유래를 밝히면서 또한 이 찬송가가 노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100년이 훨씬 지나고 또 지역의 한계를 넘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엮어졌다. 뿐만 아니라 두 이야기 사이에 도주한 사무엘 가족을 쫓는 노예 사냥꾼을 등장시킴으로써 영화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두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과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자유에 대한 결코 중단되지 않는 소망을 매개로, 특히 성경을 매개로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과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는 성경을 매개로 서로 겹쳐지는 두 이야기를 통해 어제나 오늘이나 또한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것 때문에 가능한 자유에 대한 소망을 말한다. 놀랍고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제목을 프리덤(자유)”으로 붙인 이유는 아마도 영화 이야기가 미국 흑인 노예들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었기 때문이고, 또한 뉴턴이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운데 경험한 구원을 자유로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뉴턴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를 여읜 후로 어려서부터 선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배를 타고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무절제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자유로운 영혼의 삶이었지만, 회심 후 그것은 결코 진정한 자유일 수 없었다. 뉴턴은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회심 후에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뉴턴과 사무엘은 자유를 매개로 서로 연결된다. 사무엘은 흑인 노예를 짐승 취급하는 백인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노예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사실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하나님을 믿긴 해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고, 종종 불신의 태도를 내비치길 주저하지 않았다. 도주하는 중에 퀘이커 교도들의 도움을 받는 상황에서도 그의 불신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심지어 자신들을 쫓는 노예 사냥꾼에게서도 도움을 받게 되어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자, 그때 비로소 사무엘은 그동안 의심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된다. 영화는 한편으로는 뉴턴의 회심을 표현한 노래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계속 불릴 수 있는 이유를 탐색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에 대한 두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한다.

 

그러나 영화를 자유에 중점을 두고 본다면, 많은 점에서 아쉬운 작품이다.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선 억압과 구속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래서 실제로 노예들의 자유를 말하는 다른 영화들은 폭력 사용에 있어서 과감했다. 그런데 <프리덤>에선 이점에서 너무 약하다. 물론 노예들이 겪는 고난의 상황을 굳이 상세히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비슷한 영화들을 통해 충분히 상상할 순 있다. 그러나 그것을 관객의 몫으로 돌리기보다는 영화를 통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보고 느끼는 것을 겨냥하는 영화 속성상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노예들이 생명을 걸고 추구했던 그 자유의 가치를 공감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기독교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을 고려해서 폭력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바로가 출애굽 과정의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노예 사냥꾼들의 끈질긴 추적을 통해 노예들이 겪는 구속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은 뉴턴이 과거에 누렸던 자유에 비해 회심 후 얻은 진정한 자유를 공감적으로 느끼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설득력 있는 극적인 전환이 부족하다 보니, 자유의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는 영화로서는 여타의 다른 영화에 미치지 못한다. 예컨대 영화를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는 사람도 과연 뉴턴의 회심에 담겨진 보편적 가치에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기독교인들만이 긍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프리덤>은 기독교 영화로서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로 제작된 것 자체에 우선적인 의의를 두어야 할 것 같다. 비록 스케일이나 연출에서 과거의 기독교 영화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유를 보편적 가치로 부각시키는 데에 있어서 여타의 유사한 소재나 주제의 영화에 비해 다소 부족한 점이 있지만, 기독교 영화가 가뭄인 상황에서 보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영화 감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함께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한편, 1800만 명이나 되는 미국의 노예들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퀘이커 교도들의 희생을 무릅쓴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되면서 필자는 뉴턴과 사무엘보다 오히려 퀘이커 교도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명의 위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노예들이 자유를 얻도록 도와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철저하게 신앙의 양심에 따르는 삶이었다. 법보다는 언제나 신앙의 양심을 우선적 가치로 여기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시대의 한계를 넘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구체적인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기독교가 퀘이커를 보는 시각이 곱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이미 제도화된 기독교가 잃어버리고 있는 신앙의 중요한 것들을 그들은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말씀대로 살려는 그들의 노력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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