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를 보고 - 오늘 우리에게 '사도 세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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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사도 세자는 누구인가?

<사도>

 최성수


감독 이준익 | 장르 사극 | 15세 | 2015



영조가 아들 이선, 곧 후세에 사도 세자로 알려진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을 역사에서는 임오화변(영조 3817625)이라 일컫는다. 영화 <사도>는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되기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일에 집중한다. 에필로그 형태로 짧게나마 정조의 이야기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비록 임오화변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3대에 걸친 서사를 다룬 셈이다. 영화가 화두로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영조는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참혹한 슬픔을 겪는다 하여 참척이라 했다. 아버지 영조에게는 참척을 넘어서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무엇일까?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지닌 극적인 측면 때문에 임오화변은 다양한 장르에서 즐겨 사용된 소재다. 오랜 세월에 걸쳐 관심이 표출된 만큼 사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그 중 주류에 해당하는 정치적 해석에 따르면,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벌어진 정쟁의 희생으로 본다. 이것은 당대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이었지만, 지금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다. 혹자는 사도세자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렵게 확립한 강력한 왕권의 위기를 염려한 영조 개인의 결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7~80년대 학교 역사 시간에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설명이다. 영조가 친히 세자의 죽음을 그렇게 규정했다고 배웠다. 뿐만 아니라 영조가 과거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 겪었던 트라우마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해석도 없지 않다. 심리학적인 이해가 바탕이 된 해석으로 비교적 최근에 제시된 이유이지만,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다. 이들 이해 방식들은 모양은 달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왕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것들이 각각 타당한 근거를 갖고 역사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준익 감독은 <사도> 안에 사도 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회자하는 다양한 이유들을 모두 담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것 하나로 편중하지 않고 지금까지 전승된 해석들이 함께 머물 공간을 한 영화 안에 모두 마련해놓았다는 말이다. 감독으로서 뛰어난 기량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점이다. 이 영화를 계기로 임오화변의 역사적인 이유들과 관련해서 많은 토론이 있을 것이고, 또한 현대 정치와의 관계에서 조명하려는 시도도 많이 나타날 것이다. 관례적으로 시대극은 역사 자체의 재현보다는 현실을 패러디 하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제작되기 때문이다.

 



한편, 필자는 이 영화가 기존의 해석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에 국한하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그런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이 주목하고 있는 점은 다른 곳에 있다. 말하자면 현대적인 맥락에서 임오화변을 독해하도록 했다고 보는데, 그 결과 대중에게 각인된 사도 세자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자체를 보는 새로운 시각도 열어준다.

 

그의 시도는 뒤주 사건을 현대의 시점으로 옮겨 놓고 플래시백을 통해 그것이 발생하게 된 이유들을 탐색하는 구성 방식을 취한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뒤주 사건에서 핵심은 현상적으로는 세자가 왕인 자신을 죽이려 한 것 때문에 영조가 분노한 결과였지만, 실제로는 왕위를 이을 세자에 대한 영조의 실망이 극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실망은 염려와 두려움으로 이어지게 했고, 결국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들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세자가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영조와 세자 사이에 오간 상상적인 대화를 통해 확인된다.


사실 영조는 뒤늦게 얻은 세자로 인해 매우 기뻤고, 어린 세자가 보여준 총명함과 영특함에 감탄해마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공부이외에 다른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세자를 보고 영조는 크게 실망했다. 관객 중 한 명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결국 뒤주사건은 세자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냐고 푸념을 늘어놓는 것을 들었는데, 그 만큼 세자의 공부에 대한 영조의 집착은 대단했다. 이는 예법이 사람을 만든다는 당시 유교적인 사고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영조가 자신이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위기들을 극복하고 안정된 왕권을 세웠던 전례에 비춰볼 때, 영조는 과거 자신이 겪었던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세자가 적어도 신하들의 수준을 뛰어 넘는 학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세자에게 기대했다. 왕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세자가 갖춰야 할 왕의 자격을 오직 공부에만 제한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영화에선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오늘 우리 시대에 더욱 근접할 여지를 얻는다.

 

왕권 확립을 위해 공부를 강조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영조의 트라우마를 뒤주 사건의 원인으로 보는 것과 어느 정도 중첩된다. 그러나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세자에 대한 실망은 영조에게 결국 세자의 존재 자체가 역모라고 여겨질 정도로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데, 세자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겨지니 당연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영조는 왜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역사를 들여다보면, 세자가 공부이외에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두려워해서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한다. 노론에 치우친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다소 경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영조에 반기를 들 의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자는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는 존재였다. 이렇게 본다면 영조의 실망과 불만은 결국 세자가 노론에 치우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고 또 오직 왕권의 안정만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정책을 백성을 위한 정책으로 바꾸려 했다는 사실 때문에 가진 불편한 심기에서 비롯했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공부를 빌미로 세자를 미워하고 압박한 것은 당시 유교적인 가치관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가능하다. 당시 사회에서 성리학적인 예법은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윤리이며 도덕이고, 국가를 통치하는 이념이며 세상을 이해하는 세계관이었다. 예법을 모른다 함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능케 할 기본을 갖추지 못한 것이니, 사람됨의 도리를 모르는 것이고, 더 나아가 국가 통치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을 의미했다. 당시 성리학은 거대담론에 해당한다. 세상을 보고 이해하며 설명하는 틀이며, 사람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사람됨의 도리를 밝히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세자에 대한 실망은 결국 성리학적인 거대담론을 거부한 세자에 대한 실망이었다. 대리청정(왕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왕세자가 왕을 대신해서 정치하는 일)에서 세자가 영조의 탕평책(실제는 노론 중심이었지만)을 부정하는 듯한 결정을 내린 것은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영조의 모든 불만은 세자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수렴되었다. 그러므로 공부를 게을리 한 세자에 대한 실망은 사람됨을 당대의 시대정신에 따라 규정하려는 영조의 욕망이 좌절했기 때문에 비롯한 것이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관용하지 못한 영조에게 잘못이 없지 않다.


 


이처럼 <사도>18세기 조선의 시대정신을 형성하였던 성리학 예법을 강조했던 영조와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길 강요하는 거대담론으로서 그것을 거부한 세자의 갈등 구조에 집중한다. 세자가 자신의 아들(후에 정조)에게 활을 쏘며 했던 말을 기억해보라. 과녁을 벗어나 허공으로 날아가는 활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 한 마디에 세자는 자신이 성리학적인 세계관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길 어떻게 열망하고 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아버지로부터 자애로운 시선을 받고 싶었지만,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제나 배척받아 결국 뒤주 안에서 죽어야 했던 세자는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조명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진다. 뿐만 아니라 같은 이유로 영조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그렇게 정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후에 영조는 세자를 사도(思悼)라 칭하며 세자의 신분을 회복시켰다. 곧 슬픔을 생각한다는 의미다. 필자는 뒤주 속 세자를 결코 역사적인 인물에 제한해서 볼 것이 아니라 유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만한 단서는 충분하다. 예컨대, 영화 제목을 사도라 붙인 점이다. 사도는 단지 고유명사를 가리키진 않는다. 오히려 오늘 우리에게 슬픔을 생각하라는 메시지다. 마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처럼 오늘 우리가 뒤주에 가둬 죽음으로 내몬 존재들을 기억하며 슬픔을 생각하라는 메시지다. 영화를 통해 마땅히 들어야 하는 의미심장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사도 세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슬퍼하며 생각해야 하는가?

 

거대담론의 희생자들, 국가 혹은 전체에 의한 폭력적인 권위에 굴복하기보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 희생된 사람들,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다 희생된 사람들, 소수자의 인권을 주장하다 사회적으로 매장된 사람들, 매커시즘이나 종북몰이에 의해 희생된 자들, 성공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회의 낙오자들, 입시제도의 희생자들, 금융자본주의를 비롯한 각종 자본주의에 희생된 무산자들,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여성, 불평등 구조에 의해 희생될 수밖에 없는 청년들, 정의롭지 못한 법에 의해 희생당한 자들, 그리고 세월호에 갇혀 죽어야 했던 아이들과 사회적 약자들 등.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권력자와 부정한 방식으로 치부한 자들에게 미움의 대상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뒤주 속 세자. 시대의 슬픔을 생각하게 하는 자들이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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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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