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수의견>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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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봉사

<소수의견>

 

최 성 수




감독 김성제 │ 장르 드라마 │ 15세 관람가 │ 2015



영화 <소수의견>은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재개발 사업 때문에 벌어진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두 명의 사망 사건을 두고 전개되는 법정 싸움을 다룬다. 비록 허구라도 현실적으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관해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건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드러나 다양하게 볼 수 있다. 관객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나중에 가서야 진상이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은 오직 법정 소송 과정을 통해서만 재구성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 게임에 참여하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처음부터 검사의 고압적인 태도와 숨겨진 정치적인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은 진실 게임이 아니라 연상되는 현실 정치를 조롱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이것은 영화가 겨냥하는 것이 단순히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스릴러 형태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영화는 크게 세 가지 큰 이슈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건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판사의 시각 차이, 그리고 직업적인 동료의식과 법의 형평성의 문제다. 사건의 진실과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기보다는 직업적인 측면에서 서로의 이익을 공유하면서도 괜찮게 보이는 그림을 그려 사회적인 비난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으로 가득하다.

다른 하나는 영화의 중심 주제는 아니라도 간과할 수 없는 메시지인데, 법률가와 기자 사이에서 드러나는 시선의 차이다. 법률가는 법의 논리로 사건을 보고 또 법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 기자는 더 이상 법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정의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고 여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한국의 언론사가 실제로 이렇지는 않으니 다만 그렇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영화는 법의 힘과 여론의 힘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올바른 법 집행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정부나 여당에 치명적일 수 있는 정치적 사안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물 타기 전략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론기관을 친(親)정부측 인사로 채워 넣는 이유도 정부 정책에 불리할 수 있는 불필요한 여론을 사전에 막으려는 의도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냄비 근성적인 태도를 버려야 할 것이며,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태도가 올바른 법 집행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영화의 중심 주제라고 생각되는 국가의 권위 문제다.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마지막 장면에서 전직 검사인 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상대역을 맡았던 젊은 국선 변호사에게, 자신은 국가를 위해 봉사를 했고, 피고인은 희생을 했다면,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충고한다. 글의 제목은 바로 이 대사에 착안해서 붙인 것이다. 영화의 내용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는 말인데, 단순화 시켜서 말하면 이렇다.




경찰이 재건축 반대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력행위로 아이가 사망했다. 아들이 경찰에 의해 폭행당하는 장면을 본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을 둔기로 뒤통수를 쳐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검사는 국가를 위해 변론하고, 아들을 잃었지만 경찰을 사망에 이르게 한 국민은 피고자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런 경험도 힘도 없고 또 지방대학 출신으로서 내놓을 만한 백도 없는 국선변호사가 변호를 맡았다. 만일 공권력의 폭력행위가 입증되고 피고인의 살인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되면, 곧 국가의 잘못이 인정되면, 그에 따른 피해보상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만일 검사의 주장대로, 경찰이 아니라 용역깡패가 폭력을 행사했고,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국가에는 아무 잘못이 없게 된다. 국가에게 잘못이 없으면 피해자인 국민은 동시에 범죄자가 된다.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국민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검사를 보면서 이런 질문이 들었다. 국가는 국민에 대해 잘못을 행하지 않는 걸까? 그럴 가능성은 처음부터 배제해야만 하는 걸까? 물론 할 수 있는 한 그렇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각종 행정소송과 행정재판에서 볼 수 있듯이, 공무원의 실수 혹은 고의적인 잘못에 의해 국민은 피해를 입는다. 행정소송은 바로 이와 관련해서 피해자인 국민의 이익과 권리를 되찾아 주려는 의도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국가는 왜 국민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길 두려워하는 걸까? 피해 때문에 짊어져야 할 법적인 혹은 경제적인 책임이 부담스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만 국가의 위상 때문일까? 후자의 경우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영화에서 변호인은 100원을 피해보상액으로 놓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결코 경제적인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메시지다. 이 소송에서 검사는 국가를 변호한다. 국가의 정당성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할 뿐만 아니라 아무 잘못도 없는 국민을 범죄자로 몰아간다. 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배후를 의심케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국가의 권위에 대한 잘못된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국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은, 국가가 잘못행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념과 목적을 위해 혹은 다수 국민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할 일을 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가 판단해줄 것을 기대한다. 그러니 피해자인 국민은 오히려 국가의 미래를 위해 마땅히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이면서 범죄자로 전락하는 국민은 국가를 위한 희생자가 되는 것이고, 국가를 변호하는 검사는 국가의 정당성을 옹호함으로써 어떤 행위든 국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는 국가에 봉사하는 셈이다. 마지막 장면의 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국가관에서 비롯하는 말이다.


이즈음에서 희생과 봉사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희생은 특정 대상을 위해 혹은 어떤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 자신의 존재 혹은 가치 혹은 주장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다수결의 원칙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보통 희생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형태로 이뤄진다. '대'와 '소'의 구분은 수적인 차이나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말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희생하는 자의 평가에 좌우되는 것이다. '대'가 '소'를 위해 희생하는 경우가 있다면, 적어도 '소'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희생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것이든, 그것 혹은 그 사람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결과로 일어난다. 때로는 가치 평가가 아닌 다만 생명 자체를 위한 희생도 있다. 재난 상황의 경우에 특히 그런데, 이때는 가치 평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나 순전히 직업 때문에 희생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에 비해 봉사는 다른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혹은 어떤 단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고하는 일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돕는 행위에 기반을 둔다. 기능 향상을 위해 돕고, 목적 실현을 위해 돕는다. 봉사는 철저하게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일어나야 하는 일로 강제적인 경우는 결코 봉사라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를 위한 희생과 봉사가 이해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국가를 전제한다. 잘못된 국가를 위한 희생은 개죽음에 불과한 것이며, 이런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인격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충견일 뿐이다.

 

최근 들어 교회를 위한 희생과 봉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인 비난이 커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다. 굳이 사회적인 비난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해도,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내적으로는 성도의 희생과 봉사가 과연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담임목회자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당회원들을 위한 것인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교회를 위한 희생과 봉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희생과 봉사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일을 교회가 제대로 수행할 때, 성도들의 희생과 봉사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성수 │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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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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