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치플랜팅] 교회의 미래2- 시대의 표징, '읽기(discerning)'와 '되기(becoming)'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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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미래2

시대의 표징 읽기(discerning)와 되기(becoming) 사이에서

 

성 석 환


올 초 본원에서 발표한 문화선교트렌드에서 건물 없는 교회, 처치 플랜팅의 새로운 트렌드[관련기사 보기]가 제시되었습니다. 예배당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교제임과 동시에 주님의 몸이며 제자 삼으라는 선교적 사명을 받아든 공동체라는 교회론의 조명이 일어나고, 진정한 교회를 향한 새로운 형태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두가 교회의 위기를 말하고 교세가 줄어들 것을 걱정하지만, 그 가운데 새로운 형식의 교회가 개척되고 있다는 현상은 본질을 향한 갈망이 여전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에 문화선교연구원에서는 오늘의 문화 상황을 짚고 본질로 돌아가 교회의 의미와 존재 의미를 신학적으로 성찰, 장차 다가올 미래 교회의 방향성에 대해 짚어보는 연재 기사를 기획했습니다.

● 교회의 미래1 / 기성 교회들의 위기와 변화를 위해

 교회의 미래2 / 시대의 표징, '읽기(discerning)'와 '되기(becoming)' 사이에서 (현재글)

 교회의 미래3 / 생존을 위한 조건 [마지막]


큰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잘못된 일들이 있다면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고 객관적인 프로세스이다. 사안에 따라 그 방법과 원인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이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최근 몇 몇 경우를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때로 누군가는 분노하게 되고, 또 누군가는 체념하게도 된다. 서로 다투고 싸우는 통에 사건의 진상규명이라는 본래 취지는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이 객관적인 프로세스 외에, 비공식적인 부문에서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또 다른 프로세스, 즉 주관적 프로세스가 있다.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 그러니까 그 사건의 시대적 의미를 해명해 내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은 공기관이나 객관적인 프로세스 라인에서 할 수가 없다. 이런 작업은 사회적 의미를 생산해 내는, 예컨대 종교기관이 대표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지난 세월호 사건을 두고, 많은 교회와 종교단체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사회가 사람의 생명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어린 아이들의 속절 없는 죽음 앞에서 기성세대들이 반성해야 한다고. 각종 성명서와 선언문이 기독교계에서도 쏟아져 나왔는데, 거기에는 세월호 사건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읽어야 할 시대의 징표가 무엇인지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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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선교, “시대의 표징을 읽는 것

 

선교는, “시대의 표징을 읽어내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상황과 현장에서 그분의 일하심을 명료하게 표현(articulation)하는 일이다.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흐름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수용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선교의 주체가 아니라 참여자이거나 도구이고, 선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과거 교회가 선교의 전적인 대리자라고 생각했던 시기에 서구 교회들은 잘못된 오만한 선교를 진행했었다. 선교는 곧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고, 서구 교회의 교단적 팽창을 의미했다. 이는 문화적으로는 동방과 남방의 교회들에게 서방 교회의 우수한 문화를 전수하는 것을 의미했고, 구원론적으로는 영벌에 처할 이들을 영생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에 교회가 주체이며,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넓히는 것이 곧 선교였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선교가 교회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기 시작했다. 윌링겐(Willingen) 세계선교대회(1952)에서 에큐메니컬이 이러한 주장을 먼저 시작했고, 이후에 복음주의자들도 강조점이 다소 달랐지만 로잔대회(1974)’를 통해 선교가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에 동의하였다. 이는 선교는 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교회의 선교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보내시며, 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보내신다는 이 삼위일체 교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시대의 표징을 분별하고 이에 응답하는 것을 포함하여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이후의 새로운 선교 개념이었던 것이다. 52년에서 74년으로 가는 길목에는 그 논쟁적이고 혁명적이었던 60년대가 있었다.

60년대야말로 시대의 표징을 해석해 내는 일 자체를 선교로 해석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켜 나가신다고 생각한 나머지 소위 인간화세속화가 선교와 동일시되기까지 하던 시기였다. 교회는 이러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인간의 해방과 자유의 증진이 선교의 목표가 되었다. 전쟁과 인종갈등, 문화전쟁과 충돌은 모두 시대의 표징으로 읽혔고, 그곳에 선교의 현장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선교를 인간의 역사와 문화로 환원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가 주도하는 사회운동들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본래 삼위일체 교리에 토대를 두고,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선교적 본질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면서 교회는 교회 자체로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 또는 대안문화 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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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표징이 되기로서의 선교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7장에 의존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선교가 상황에 응답하고, 심지어 문화 속으로 성육신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한 쪽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했다면, 이렇게 대안적인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선교라는 주장을 하는 쪽이 80년대 이후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시대의 표징을 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그 표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부르심 받은 이들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감으로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회의 해방이나 정의를 위해서는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종종 이들의 주장은 대안문화적이라기보다는 반문화적(anti-cultural)”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교회가 선교적 주체가 아니라 할지라도선교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교회가 여전히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러나 그 방식은 대안적이어야지 19세기처럼 정복적이거나 승리주의에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실 선교적 교회에 대한 재발견도 이러한 연상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시대의 표징을 읽어내고 해석하는 일에 대한 방점과 시대의 표징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강조점은 일정 부분 긴장을 이루고 선교를 구성한다.

21세기의 교회의 미래는 이 긴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정당한 방식으로 실천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미래를 두고 생각할 때, 이 긴장에 대한 해석의 역사적 의의는 그 어떤 지역의 교회들보다 더 중대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읽어내야 할 무수히 많은 시대의 표징들이 우리의 선교적 정황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교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결코 이러한 정황들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대적 표징에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으로서 또 거룩한 성도들로서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고 다가올 종말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 빛을 서서히 잃어가고 사회적인 비난에 직면한 까닭은 분명 교회다움을 상실해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시대의 표징을 구하는 일에 열심인 만큼, 교회는 또한 스스로 시대의 표징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미래는 선교의 미래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교회는 선교적일 때만이 교회일 수가 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미래는 교회의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선교가 목적이 아닌 교회, 그러니까 조직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거나 또는 교회 자체의 팽창이 목적인 교회는 미래가 아니다. 21세기의 교회의 미래는 교회의 선교를 시대적 표징을 분별하고, 그래서 교회를 시대의 표징이 되도록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 전 미국 찰스톤의 한 흑인교회에서 백인우월주의자의 총에 피크니 목사와 함께 9명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메시지를 교도소에 갇힌 그에게 보냈고, 장례식에 참석한 오바마 대통령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 교회 공동체는 악마가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외치며, 증오 대신 사랑을 선택했다.

이 일을 통해 많은 미국인들은 아마도 교회의 시대적 징표의 해석과 실천을 보았을 것이다. 21세기의 교회의 힘은 곧 시대적 징표를 신앙공동체의 독특한 양식으로 해석해 내고, 그것을 과감하고 결단력있게 증언하는 선교적 실천에서 나올 것이다. 시대를 분별하는 것은 신앙공동체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사회에서 행하고 계시는 선교에 동참하기 위한 영성이며, 기도이자, 예배이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이제 시대의 징표를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그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증언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 교회의 선교만으로, 또 인간의 역사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적 사랑과 화해의 선교에 동참하는 다양하고도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정말로 한국교회의 미래는, 21세기의 새로운 표현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표현해 내는 실천에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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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jccconverge.com



성석환 교수는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와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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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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